휴학하고서 일주일이 흘렀다.
애리얼은 백작저에 머물렀고, 레이신도 아직 백작저에 있었다.
개학하고 다음 날 여전히 백작저에 있던 그와 마주쳤을 때, 애리얼은 놀라기보다는 의아해하며 물었었다.
“왜 여기 계세요, 서하? 아카데미에 안 가셔도 괜찮아요?”
“응. 휴학 중이라.”
“휴학……. 대체 언제부터요?”
“어제부터.”
“그럼 개학하는 날 휴학 신청을 하신 거예요?”
“응.”
“……왜요?”
“네가 없어서.”
“…….”
“딱히 다닐 맛이 안 났어.”
깊은 밤중 침대에서 조용히 눈을 뜬 애리얼은 그와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레이신의 하트는 세 개 반이었다. 그를 제외한 공략 대상의 호감도는 전부 하트 다섯 개를 넘어갔다. 그 격차를 생각하면, 묘한 감상이 들었다.
세 개 반인 레이신의 호감도는 ‘호감도 피버 타임’이라는 아이템까지 써서 만든 것이었다. 그 아이템이 아니었다면, 레이신의 호감도는 아직도 목표 수치인 세 개를 채우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애리얼은 그 아이템을 쓰기 전까지 텅 비어 있던 그의 호감도 창을 기억했다.
바닥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호감도 수치. 특별 엔딩의 가장 큰 난관으로 남아 있었던 그, 레이신.
그래서 애리얼은 다른 공략 대상보다도 그의 감정을 가장 믿지 못했다.
어쩌면 데본시아보다도 더 의심스러운 게 레이신의 감정이었다.
그의 호감도는 아이템으로 만들어진 거였으니까.
그녀가 휴학했다는 걸 알았던 당일 곧장 그녀를 따라 휴학 신청까지 한 그의 진심을 그대로 믿기가 어려웠다. 그가 제 감정도 아닌, 억지로 만들어진 감정에 휘둘리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애리얼은 심란함에 눈을 붙이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돌아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그녀가 하는 일은 그들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짓이었다. 그들의 감정이 커질수록 그녀의 죄책감도 자꾸만 커졌다. 그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을 단순한 공략 대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었다. 두렵고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나와 엮이지 않았을 텐데.’
회귀하기 전 최초로 빙의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어쩌면 데본시아도 회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겠지.
그녀는 집으로 가고 싶었다. 기억을 찾고 싶었다. 이곳이 도무지 제 세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도.
그럼에도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 않기에, 그녀는 이곳에 정이 들고 말았다. 텅 빈 그녀에게 추억할 기억을 준 세계였다. 이 세계는 그녀의 전부였다. 기억을 찾지 못하면 이곳이 전부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다.
막연한 두려움이 그녀를 휘감았다. 진짜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전부를, 너무나 소중한 누군가를, 끝내 기억해 내지 못하고 이곳에 안주하게 될까 봐…… 두렵다.
감정이란 참 복잡했다. 한없이 이기적인가 싶으면 어느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세계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이 세계를 나름대로 좋아했다.
그래도 그녀에게 남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애리얼은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를 그리워하게 되겠지. 이 세계에 관한 기억을 잃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레이신으로 시작해서 이어진 사고는 어느새 이 세계에 대한 것에 도달해 있었다.
특별 엔딩을 보기 전까지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심해로 가라앉듯 기분이 저조해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방 안이 답답했다.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녀는 어느새 문을 열고 있었다. 산책이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달빛이 내려앉은 조용한 복도로 나섰다.
백작저는 무척 고요했다. 서넛 정도의 인원을 제외하면 밤에는 대기하는 사용인이 거의 없었다. 항상 서른 명 이상의 사용인이 비상근무를 서고 스무 명에 달하는 기사가 교대해 가며 지키는 대공저와는 달랐다.
애리얼은 이런 백작저가 편안했다. 이 세계에서 그나마 가장 편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감시하지 않는 장소다.
창문 너머로 달 아래 드러난 어슴푸레한 정원을 편안하게 바라보며 일 층으로 내려갔다. 만약 현관문을 통과해 정원으로 가더라도 아무도 붙잡지 않겠지. 가벼워진 걸음이 일 층 복도에 들어섰다.
달빛이 희미하게 내려앉은 어두운 복도. 그 중간쯤, 응접실의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아직 안 주무시고 계신 건가?’
애리얼은 고개를 갸웃하며 응접실로 다가갔다. 응접실 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호기심에 슬쩍 그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환하게 불이 켜진 방 안, 창문을 보고 선 뒤태가 보였다. 꼿꼿한 자세와 등을 덮은 긴 금발. 레이신이었다.
애리얼은 놀라서 호흡하는 걸 잊었다. 그가 있을 걸 예상하지 못했다. 왜 접근 알림이 울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휴대폰을 침실에 두고 왔다.
‘어쩌지…….’
이대로 조용히 못 본 척 위층으로 올라갈까 싶었다.
하필이면 침실에서 그에 관한 생각을 했던 터라 괜스레 더 껄끄러웠다.
그냥 물러날까 싶던 차에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금색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녀가 있는 문 틈새를 향했다. 그 눈빛은 이미 그녀가 있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했다.
그가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들어올래?”
깊은 밤에 어울리는 묵직한 목소리였다.
애리얼은 어색하게 응접실의 문을 밀어 열었다.
“계신 줄 몰랐어요.”
“응.”
“뭐 하고 계셨어요?”
“그냥 잠이 안 와서.”
“아…….”
“그러는 너는?”
“저도 잠이 안 와서요.”
“그렇구나.”
그는 나직하게 말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럼 같이 말이나 나눌래?”
말을 나누자고. 애리얼은 어쩐지 그답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했다. 그는 호감도가 오르고 난 이후에도 애리얼을 그냥 보기만 했으니까. 굳이 애리얼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애리얼이 그의 감정이 거짓 같다고 여긴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조금 달랐다. 굳이 대화를 제안하다니…….
밤은 사람을 상당히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그 탓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애리얼은 그와의 대화를 피하지 않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녀 역시도 감성적이 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의 호감도가 낮은 편이라 안심한 걸 수도 있고.
‘근데 뭘 말하지?’
애리얼은 갑작스럽게 어색함을 느끼며 레이신을 보았다. 그다지 대화가 많았던 상대가 아니어서, 무슨 주제로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조금 경직되어 보였다.
아무 말도 없이 눈만 오래 마주쳤다.
의외로 먼저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것은 레이신이었다. 기다란 금발이 그의 옆얼굴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진한 금발을 바라보던 애리얼은 문득 궁금해졌다.
‘왜 안 묶고 다니지?’
그도 그럴 게, 레이신은 백작저에 있는 동안 계속 머리를 풀고 다녔다. 평소에 땋거나 하나로 묶거나 한 가지는 하던 걸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부스스하게 산발이 된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고서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네?”
느닷없는 사과에 애리얼은 어리둥절해졌다.
“네가 준 거…… 잃어버렸어.”
“…….”
“미안해.”
“아……. 괜찮아요.”
그의 사과에 애리얼은 오히려 제가 사죄하듯이 시선을 내리깔고서 손을 꾹 맞잡았다.
레이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가 ‘네가 준 거’라고 언급한 순간 눈치챘다. 그가 최근에 계속 머리를 풀고 다녔던 이유를.
“죄송해요, 서하.”
그녀가 사과하자 레이신은 당황스러워했다. 눈을 크게 뜨고서 그녀를 보았다.
애리얼은 죄인이 된 심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서하께 드렸던 선물을…… 잊고 있었어요. 제가 직접 고른 거였는데, 바로 알아보지 못했어요.”
금세 끊어질 것만 같은 끈으로만 대충 머리를 묶고 다니던 그. 좀 더 좋은 거로 묶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의 생일 선물로 검은색 머리 끈을 골랐다. 벨벳이라 촉감이 부드럽고 끝에는 종달새 모양의 자그마한 금장식을 달아 놓았다.
그게 그냥 머리 끈이 아니라 무도회에서 쓰는 리본이라는 걸 안 건 포장까지 마친 후였다.
여성이 착용하는 제품이어서 그에게 선물하는 건 결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급히 새로운 것으로 구매를 했었는데, 이전에 사 둔 것이 그에게 전해진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그 머리 끈이 무도회 리본인 줄 모르고 사서……. 급하게 새로운 걸 준비했었는데, 전에 사 뒀던 게 서하께 전해진 모양이에요.”
애리얼은 계속 바닥만 보며 사실을 실토했다.
“그럼 새로 산 건 어디 있는데?”
“아마 제 방에 있을 거예요.”
“그거, 내가 가져도 돼?”
“네? ……네, 당연하죠! 잠시만요…….”
그의 말에 애리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꽤 필사적이었다. 응접실을 나서는 움직임이 급했다.
그녀는 냉큼 침실로 올라가 드레스 룸을 뒤져서는 서랍 안에 보관해 둔 선물 상자를 찾아 꺼냈다. 흰 리본이 묶인 남색의 상자였다. 손에 조심히 쥐고서는 빠르게 일 층의 응접실로 돌아갔다.
레이신은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지었다.
애리얼은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가 선물 상자를 건넸다. 그의 생일에서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선물을 주게 되다니. 미안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생일…… 축하드려요.”
“응, 고마워.”
레이신은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하며 곧장 상자를 열었다.
남색 상자의 안에는 곱게 접힌 하얀 머리 끈이 들어 있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비단으로 만든 끈이었다. 에인절 실크라 부르는 특수한 원단으로 만든 것이라 불에 타지도 않고 해지는 일도 없는 귀품이었다.
“예쁘네.”
레이신은 고저 없는 어투로 그리 평했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좋아.”
그는 비단 머리 끈을 상자에서 꺼내 쥐었다. 촉감이 뛰어난 하얀 비단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사념에 잠긴 표정을 짓다가, 무심한 얼굴로 애리얼에게 끈을 내밀었다.
“묶어 줄 수 있어?”
“제가요?”
애리얼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는 난처해하는 얼굴을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혼자서는 잘 못할 거 같아서.”
수줍은 듯 꺼내는 말. 슬그머니 눈을 굴리며 애리얼을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어색해서 애리얼은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은 한밤중이었다. 곧 잠들어야 할 상황에서 갑자기 머리카락을 묶어 달라니. 이런 부탁이라곤 일절 없던 사람이…….
누가 봐도 응석을 부리며 유혹하는 것 같은 상황이 아닌가.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신은 능청스럽게 표정을 꾸미며 애리얼에게 손짓했다.
“내 옆에 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