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에요?”
“그래야 묶어 주기 편할 테니까…….”
그는 말끝을 흐리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뺨에는 옅은 홍조가 들었다. 호기롭게 머리 끈을 내밀었으면서 유혹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그 풋풋함에 애리얼은 경계가 풀려 버렸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못 들어줄 것도 없다. 제 앞으로 다가온 하얀 머리 끈을 받아 쥐고서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가 애리얼을 향해 등을 돌려 기다란 금발을 내어 주었다.
애리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금발을 조심스럽게 빗어 내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자 레이신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사락사락, 손가락이 머리칼을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응접실을 채웠다.
애리얼은 기다란 금발을 세 갈래로 나눠 엮기 시작했다. 부스스한 금발의 촉감은 약간 거칠었다. 아무리 꼼꼼히 땋아 내도 잔머리가 삐죽 튀어나오고 만다. 그 결을 조금이라도 더 매끄럽게 가다듬느라 속도가 느려졌다. 그럴수록 적막이 길어졌고, 대화의 부재가 신경 쓰였다.
“제가 이런 데 서툴러서…….”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겨우 꺼낸 말이었다.
레이신은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뒷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네가 더 잘할 거야.”
“평소 묶어 주시던 분보다요?”
“응.”
“믿어 주셔서 감사하지만…… 엉망으로 됐어요. 미안해요.”
애리얼이 시무룩한 얼굴로 금발을 매듭지었다. 하얀 끈이 엉성하게 땋은 머리칼의 끝에 리본 모양으로 묶였다.
레이신은 금발의 매듭 부분을 손으로 끌어와 확인하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 나보다 훨씬 잘했어.”
“……묶는 거 직접 하셨던 거예요?”
“응. 누가 묶어 주는 거 처음이야.”
“처음…… 이요?”
“거의 잠들어 있기도 했고, 가문이 약간 방임주의이기도 해서. 애초에 챙겨 주는 일 같은 게 딱히 없었어.”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으나 애리얼은 경악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고위 귀족인데 챙겨 주는 일이 없었다니.
평소 그의 행색을 생각하면 아예 신빙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솔렘의 후계자인데 보좌관은커녕 호위 하나 따라붙는 일이 없었고, 늘 흐트러진 차림이었다.
‘약간 방임이 아니라 아예 무관심에 방치인 수준…….’
“애리얼.”
그의 목소리가 솔렘 공작가를 향해 분노를 키우던 애리얼의 사념을 멈추었다.
등을 보이고 있던 레이신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돌아앉았다. 그의 서늘한 이목구비가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심하기만 하던 평소와 다른 표정이었다.
애리얼은 조금 쑥스러워져서 시선을 피했다.
“도망갈래?”
그가 말했다.
애리얼은 내리깔았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되물었다.
“도망이라니요?”
“스카이라, 렉시우스. 다 너를 힘들게 하잖아.”
그러니 도망치고 싶지 않냐고, 레이신은 묻고 있었다.
대놓고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라 애리얼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렉시우스의 호감도가 위험 수위에 바짝 다가간 지금, 도주라는 선택지는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 엔딩의 특성상 그들과 완전히 멀어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기한 사안이었다.
사실 그들을 피해 어디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들키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그랬기에 도리어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도망칠 만한 장소가 있어요?”
“여기 말고, 네가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너를 찾지 못할 곳.”
“거기가 어딘데요?”
“솔렘의 지하에 마수를 키우는 방이 있어.”
마수. 애리얼은 과거의 일이 생각나 잠시 움찔했다.
“……안전한 곳인가요?”
“공작저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야. 마력을 흡수하는 곳이라 마법이 거의 통하지 않고, 솔렘의 결계로 보호받는 장소라 공작저를 날려 버리지 않는 이상 추적도 불가능해.”
잠자코 듣던 애리얼의 낯이 조금 굳었다. 그의 설명에 하필이면 우레우스가 갇혀 있던 대공저의 지하 공간이 떠올랐다. 들어가면 그 누구도 쉽사리 찾지 못할 견고한 장소. 그만큼 감금당하기도 쉽겠지. 레이신의 배드 엔딩 중 하나가 어떤 종류인지 언뜻 알 것 같았다. 행방불명이 되어 마수가 갇히는 추적 불능의 방 안에 영원토록 갇히는…….
애리얼은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과한 추측이었다.
‘레이신은 그런 생각으로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게 아니야.’
그의 호감도는 믿지 않으면서 그가 감금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다니.
“어때? 도망칠래?”
레이신이 재차 물어 왔다.
애리얼은 그의 제안을 무작정 위험한 것으로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백작저를 떠나고 싶진 않아요.”
그러나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전했다.
그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곧이어 애리얼이 먼저 자리를 뜨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
으적으적.
성장기의 어린 마수가 싯누런 마력석을 순식간에 씹어 먹었다.
레이신은 무심한 눈으로 마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력을 먹어 치우며 급격히 자라난 마수는 벌써 몸길이가 일 미터를 넘었다.
“다 죽일 때는 언제고 새로 키우고 있구나.”
마수를 향하던 레이신의 시선이 움직였다. 견고한 철문이 황색을 띠는 솔렘의 마력에 반응하여 열려 있었다. 이 장소에 이토록 쉬이 진입할 수 있는 자는 그를 제외하고는 오직 한 명뿐.
“굳이 수고롭게 구는 저의가 무엇이냐.”
“아버지.”
레이신은 제 옆으로 다가온 공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솔렘 공작이 미간을 찡그린 채 그를 마주했다.
“이럴 거면서 뭐 하러 죽였어.”
“사죄의 뜻입니다. 마수를 전부 죽이지 않으면 명분도 챙길 수 없었으니까요.”
“명분이라니, 솔렘의 후계로서의 명분을 말하는 것이냐? 작년 시험의 책임이라도 지려고 마수를 모두 죽였다는 게야? 그딴 이유가 아니지 않아!”
솔렘 공작은 무표정한 제 아들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그는 이제야 제 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레이신이 마수를 몰살한 이유가 비단 마수를 사육하는 방식에 염증을 느껴서 뿐만은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랬다면 이렇게 마수의 유체를 살려서 제 마력석을 먹이지는 않았겠지.
“네가 마수를 말살한 건, 그 공녀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지 죄악과 책임을 느껴서가 아닌 건 나도 안다.”
레이신은 말없이 마력석 하나를 더 던졌다. 곧장 걸어온 마수가 마력석을 빠드득 씹어 삼켰다.
공작은 입술조차 떼지 않는 제 아들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는 철문에 새겨진 마법 방지 술식을 바라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허클리 공녀가 황자비로 지정되었다더군.”
“…….”
“공작 부인은 물 건너간 것인데, 어쩔 테지? 공녀를 잡아 와 가두기라도 할 것이냐?”
“…….”
“마수를 말살한 건 헛수고가 되었구나.”
“아니요, 아버지.”
레이신이 입을 열었다. 그 음성은 조금도 동요한 기색 없이 차분했다.
“애리얼은 저는 불편해하지 않지만 황자는 불편해합니다.”
“확연한 신뢰감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고작 그런 게…….”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으로 처음 알았습니다.”
레이신이 구시렁대는 공작의 말소리를 단호히 잘라 냈다. 의욕도 없이 조용히 듣기만 하던 아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공작이 레이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아들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무엇을?”
“여기가 감금에 좋다는 것을요.”
감금에 좋다. 그 말을 할 때 레이신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공작은 위험을 눈치채고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제 아들을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양 마주했다. 공작의 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레이신, 너…….”
“안심하세요, 아버지. 제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말을 마친 레이신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곡선을 그렸다.
공작은 후두부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제 아들의 웃는 모습을 이런 순간에 마주하게 될 줄 몰랐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
9월 10일, 렉시우스의 생일.
대공저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전장을 드나드느라 생일을 그냥 지나가는 일이 많았던 대공가의 장남을 위해서, 대공비가 간만에 대공저를 개방했다.
본관의 연회 홀에는 샹들리에가 일곱 개나 올라갔고, 흰색 애스터가 곳곳을 장식했다. 홀과 이어지는 정원 길에는 하얀 카펫이 깔렸다. 테이블에는 샴페인이 준비되었다.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연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홀에 가득 들어찬 손님들은 대부분 귀족이었고, 대공가와 인연이 있는 평민 출신 기사들도 몇몇 참석했다. 고위 계급들도 빠짐없이 와서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 데본시아. 바쁜 탓에 연회에는 죄 빠졌던 황태자의 등장에 홀이 술렁거렸다.
“생일 축하해, 렉스.”
남의 생일에 주인공인 양 등장한 그가 렉시우스의 앞에 와 섰다.
그야 그러든 말든, 렉시우스는 벽면 기둥에 기대어 심드렁하게 홀만 주시했다.
“나 기분 더러워 하는 거 보려고 왔어?”
“친우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거야.”
“웃기고 있네.”
“진심인데.”
데본시아는 웃으며 근처 테이블에 놓인 샴페인 잔을 들었다. 시종이 빠르게 다가와 샴페인을 따르고는 물러갔다.
제국에서는 열아홉이 되면 성년을 맞는다.
그는 샴페인이 담긴 잔을 슬쩍 기울이며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렉시우스에게 내밀었다.
“어때? 성년을 맞는 생일이잖아.”
“너나 마셔.”
“난 아직 못 마셔. 미성년이잖아.”
“어차피 동갑인데 뭘 그렇게 징그럽게 굴어. 술맛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술맛을 어떻게 알아.”
렉시우스의 말에서 뭔가 묘한 위화감을 느낀 데본시아가 표정을 바꿨다. 미소를 짓던 얼굴이 의심을 내비치며 일순 서늘해졌다. 예리해진 시선이 렉시우스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그 시선을 느꼈음에도 렉시우스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데본시아가 뭘 느끼고 포착하든 상관없다는 듯. 조금은 부러 암시를 주는 부분까지도 있었다. 술맛을 모르는 것도 아닐 거라고.
“뭐야……. 기억났어?”
데본시아가 다시금 부드럽게 입꼬리를 휘며 샴페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렉시우스는 홀의 출입문만 응시하며 말했다.
“기억났지.”
회귀의 기억을 시인한 순간, 출입문으로 애리얼이 들어왔다. 그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유일한 손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