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살짝 굳은 얼굴로 홀로 들어갔다. 시선은 정면에 고정하고서 손에는 렉시우스에게 줄 선물을 꼭 쥐고 걸었다.
장내의 이목이 그녀를 향했다.
대공자를 공자로 격하시키고 목줄을 채운 인물. 황자비로 지정된 백작가의 공녀.
순간적으로 장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조용해진 홀의 중앙으로 렉시우스가 걸어 나왔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 그가 홀을 나아가던 애리얼의 앞을 막아섰다.
애리얼은 그가 ‘주인님’과 같은 호칭을 꺼낼까 긴장하며 먼저 선수를 쳤다.
“공자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충성의 맹세를 나눴기에, 주인 된 자로서 극존칭은 쓰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는 일도 없었다. 애리얼은 차분하게 말을 마치고서 그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렉시우스는 그녀가 내민 상자를 곧장 손에 쥐고서 포장을 뜯었다. 그의 행동에 홀의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선물을 건넨 이의 앞에서 받은 선물을 대놓고 뜯어 보는 건 무례였다. 심지어 타인의 눈이 가득한 곳이었다. 렉시우스의 행동은 모욕에 가까웠다.
상자를 묶은 리본이 풀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애리얼은 간신히 평정을 유지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상자 안을 보고서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검은 넥타이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집혀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넥타이에 꽂혀 있던 넥타이핀이 함께 드러났다. 검정 넥타이와 백금으로 된 넥타이핀 그리고 넥타이핀을 장식한 루비에 이곳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만천하에 그녀의 선물을 공개한 렉시우스가 그 무례함과는 상반된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 호칭에 애리얼의 양손이 움찔 떨렸다.
렉시우스가 뱉은 말의 파급으로 주변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경악에 물든 면면들, 쏟아지는 시선이 괴로웠다.
“그럼, 전 이만…….”
선물도 전했겠다, 용건이 끝난 애리얼이 슬금슬금 몸을 물리려 했다. 렉시우스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툭, 상자가 떨어졌다.
내용물을 빼내고 빈 상자를 버린 그의 손이 애리얼을 붙잡았다. 손목에 감긴 그의 손가락이 은근한 압력을 행사해 왔다.
애리얼이 주춤거리며 멈췄다.
이렇게나 눈이 모인 장소에서 그를 함부로 뿌리칠 수 없었다.
살짝 벌어졌던 거리가 그로 인해 빠르게 좁혀졌다.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워진 렉시우스가 손가락 사이에 끼운 넥타이를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생일인데…… 부탁드려도 될까요?”
엉거주춤 선 그녀의 손목을 당기고 그 손안에다 넥타이를 쥐여 주었다. 평소와 같이 아무것도 매지 않은 셔츠 칼라까지 손수 세우고 넥타이를 걸 수 있도록 상체를 숙였다.
“사이좋은 척해야지. 스카이라도 와 있을 텐데. 황자비가 되긴 싫잖아.”
그가 조용히 그녀에게 속삭였다.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 강요되자 애리얼은 잠자코 넥타이를 그의 목에 걸었다. 은색의 초커를 흘깃 보면서 넥타이를 그러잡았다.
“묶을 줄 몰라요…….”
“마법으로 위장할 테니까 하는 척만 해.”
타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연신 미소 짓는 그 덕분에,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꽤 다정하게 보일 장면이었다.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무섭다더니, 왜 왔어?”
그가 조용히 물었다.
“선물 주는 강박이라도 있나?”
애리얼은 저를 한껏 비꼬는 말소리를 무시하며 넥타이를 엉망으로 묶었다. 일부러는 아니고 할 줄 몰라서였다. 렉시우스가 마무리를 하는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개며 위장술을 펼쳤다. 엉망이던 넥타이가 완벽하게 묶인 형태로 변모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데본시아는 어느 타이밍에 나서면 좋을지 재고 있었다. 보기 불쾌한 장면을 바라만 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이쯤 있었으니, 도와주는 척 슬쩍 나설까.’
슬그머니 걸음을 떼는 그의 앞으로 누군가 선수를 쳐서 나아갔다.
하나로 땋은 긴 금발의 끄트머리에서 하얀 리본이 흔들렸다.
있는지도 몰랐던 레이신이 애리얼과 렉시우스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데본시아는 미간을 구기며 쓴웃음을 짓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파국으로 갈 상황에 굳이 끼어드는 취미는 없었다. 그 상황에 구원자로 나선다면 또 모를까. 현재의 애리얼이 자신을 구원자로 받아들일 리도 만무하고, 여기서 조용히 지켜보다가 제게 유리한 상황을 연출하는 게 더 낫겠지.
“시에나.”
데본시아가 제 수족을 불렀다.
지척에서 손님으로 위장하고 있던 그의 직속 시녀가 은밀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니 올라오라고, 공자에게 전해 줘.”
“네.”
짧게 고개를 끄덕인 시에나가 손님인 척 빠르게 표정과 동작을 바꾸고서 홀을 나갔다.
그동안 데본시아의 눈은 소란이 일기 직전인 홀의 중앙으로 향했다.
레이신이 다가오자 렉시우스가 자연스럽게 그의 앞을 막았다. 애리얼을 제 뒤쪽에 두고서 셔츠에 묶인 넥타이를 자랑스레 드러냈다. 그 넥타이에 위장술이 걸린 것을 보고 데본시아는 픽 웃음을 지었다.
‘묶을 줄 모르는구나.’
넥타이를 만지는 애리얼의 서툰 손길을 생각하자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리숙한 그녀를 향한 애정. 그리고 그에 뒤이어 그 손길을 차지한 렉시우스에 대한 질투가 났다.
데본시아는 불쾌함을 삼키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셔츠에 감긴 검정 넥타이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생선 가시를 삼킨 것만 같았다. 알고 있는 몇 가지 상스러운 욕이 입 안을 맴돌았다. 계속 보고 있다간 실제로 뱉어 버리고 말겠지. 혀를 씹으며 시선을 돌리자 자신과 비슷한 기분을 느낄 만한 이가 눈에 들어왔다.
적나라한 감정을 내비치며 활활 타오르는 푸른 눈. 저와 닮은 얼굴이 험한 욕을 뱉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시선을 등진 애리얼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저렇게 도망치고 싶어만 해서야…….’
일이 잘 풀리겠네.
상황이 제게 유리해질 것임을 직감한 데본시아가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실실 웃고 계시네요. 문란해 보이는데 좀 자제하시는 게?”
감히 그를 매도하는 말이 그의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공자, 너무 스스럼이 없는 태도가 아닌지.”
“실례했습니다. 기분 나빠 하실 줄 몰랐네요.”
블랑셰의 모습으로 위장한 휘아킨이었다. 그는 한 번 주의를 들었음에도 비꼬는 소리를 이어 갔다.
“좋은 구경거리라더니, 기분만 더러운데. 황태자님은 이런 취미이신가.”
“기다리면 재밌어질 거야.”
데본시아는 그의 무례함을 너그러이 받아넘겼다. 멀리 서서 애리얼을 보기만 하는 황태자의 두 눈에 희미한 희열이 담겼다.
“적당한 순간이 오면 나서서 손만 뻗어 봐. 그러면 너도 재밌어질 테니까.”
“적당한 순간이 언젠데요.”
“보면 알 거야.”
그가 뒷짐을 지고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조명이 꺼졌다.
자연광조차 없는 완벽한 암흑. 마법이었다. 정확하게는 공간 안의 빛을 일시적으로 소멸시키는 술식.
휘아킨은 본능적으로 황태자의 곁에서 멀어졌다. 황태자가 말했던 ‘적당한 순간’이 곧 황태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리라. 이제부터 조용한 곳에서 확실한 기회를 노려야 한다.
주변이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동요하는 인기척 사이로 작은 비명까지도 섞여 들려왔다.
마력을 가진 귀족의 대부분이 낯선 마력의 기운을 느끼고서 동요했다.
‘대공저까지 일부러 와 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따위의 상투적인 대화를 나누던 렉시우스와 레이신도 불쾌한 상황 변화를 맞이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번잡한 인기척과 소음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렉시우스는 지금을 오히려 기회로 여겼다. 이 어둠을 틈타 애리얼을 레이신과 떨어트려 놓을 수 있다면, 더 나아가 대공저에 다시금 데려올 수 있다면 최상의 결과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빛을 지우고 홀에 흐르는 마력이 데본시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움직이면 함정을 파고드는 격이겠지. 지금은 애리얼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렉시우스는 주변을 경계하며 애리얼을 품으로 당겨 왔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혼란에 빠진 애리얼은 순순히 그에게 끌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기기 전에 저항하듯 멈추었다. 제 손목을 감싼 그의 손을 붙잡고서 물었다.
“선배가 한 거예요?”
“그런 거였으면 내가 이렇게 동요할 리 없잖아.”
렉시우스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날카로워진 음성에는 분노마저 서렸다. 아무리 대공저에서 벌어진 일이라지만 곧장 저를 의심할 줄이야. 그녀의 태도에 그의 마음은 곧장 생채기를 입었다. 어둠 속에서 상처 입은 눈을 하고 애리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왜 너는…….”
“애리얼, 위험하니까 이쪽으로 와.”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렉시우스의 시선이 움직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속, 소란이 이는 홀의 안에서 정확하게 레이신을 찾아냈다.
“위험하다고?”
렉시우스가 천천히 물었다. 애리얼이 무어라 대답하거나 움직이기도 전에.
“누가?”
“네가.”
렉시우스의 물음에 레이신이 대답했다.
애리얼은 레이신을 막아야 한다고 느꼈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렉시우스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려 오고 있었다.
‘너무 렉시우스의 편을 들지도 말고, 레이신을 적당히 제지하기만 하는 수준으로…….’
그녀가 할 말을 정리해서 막 입을 연 순간이었다.
“그래? 그럼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네.”
웃음기가 섞인 저음이 낮고 조용히 퍼졌다. 가까이 있는 애리얼은 주변의 소음 사이에서도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뿌리쳐지지 않았다. 렉시우스의 손가락이 진득하게 손목을 감아 왔다.
“그만……!”
애리얼이 말하는 중간에 불이 켜졌다.
홀이 다시금 환해졌다.
그 눈부심에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짙은 암흑에 놓였던 시각은 밝은 홀에 쉬이 적응하질 못했다. 눈꺼풀을 감아도 시야가 번쩍거릴 정도였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가 꾹 감기를 대여섯 번은 반복한 후에야 시각이 안정화되었다.
차츰 명료해지는 두 눈으로 홀을 확인했다. 때아닌 정전 사태로 분란하던 주변의 술렁임이 멎어 있었다. 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지독한 위화감이 망막으로 스며들었다.
애리얼은 오싹함을 느끼며 얼어붙었다.
제 손목을 잡은 렉시우스, 그 앞에 그와 마주 보고 선 레이신, 그리고 그녀 자신. 셋을 제외한 모든 이가 멈추어 있었다. 정전으로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표정 그대로, 미동도 없다. 홀에 가득한 방문객 모두가 석상이라도 되어 버린 듯했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아니면 환각을 보는 건가.
애리얼은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렉시우스와 레이신은 조용히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공간에 흐르는 것이 누구의 마력인지 알았다. 이 정도 술식을 이렇게 대규모로 펼치는 이는 쉽게 특정된다. 이 사태의 주범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던 둘의 시선이 어느 순간 한데로 모였다.
“내가 주는 생일 선물이야, 렉스.”
목소리가 울리고, 애리얼의 시선이 뒤늦게 따라갔다.
모형처럼 굳어 버린 귀족들 사이로 익숙한 이가 걸어 나왔다.
제국의 황태자, 데본시아. 눈이 멀 만큼 아름다운 남자가 백조가 그리는 잔물결처럼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근데 조금 아쉽다.”
모두가 고요히 멈춘 장소를 둘러보며 홀로 떠들던 그가 애리얼을 포착하고는 시선을 멈췄다. 그녀를 눈에 담고서, 미소 띤 입술로 섬뜩한 말을 뱉었다.
“불까지 꺼 줬는데, 받아먹질 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