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마치 데본시아와 렉시우스가 짜고서 이런 상황을 연출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불이 꺼졌을 때 렉시우스의 반응은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 상황을 기회로 여겼던 것도 사실이었다. 여전히 제 손목을 죄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그 증거나 다름없었다. 뼈를 으스러뜨릴 듯한 이 악력은 걱정에서 기인한 붙잡음이라기엔 지나치게 무도하지 않은가.
데본시아는 위기감에 굳어 가는 애리얼의 낯을 가만히 감상하다가 렉시우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잔뜩 열이 받은 렉시우스를 향해 싱긋, 웃음을 날렸다.
렉시우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사납게 인상을 쓸 듯이 안면을 움직이다가 느른하게 표정을 폈다. 여기서 화를 내면 데본시아에게 말려든다. 분노는 이성을 쉽게 흐리고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니까.
“다시 꺼 봐. 이번에는 잘 받아먹을게.”
렉시우스가 제 손에 붙들린 애리얼의 손목을 느긋하게 문지르며 도발을 던졌다.
데본시아의 눈동자가 슬쩍 애리얼의 손목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고귀한 황태자의 존안은 잔잔하기만 했다. 고상하게 휘어진 입술이 렉시우스의 도발을 너끈히 받아쳤다.
“그래, 그럴게.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
딱.
데본시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다시 홀 안의 불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어떤 소란도 없었다. 정적 위로 긴장감이 칼날처럼 도사렸다.
애리얼의 시야는 다시금 암전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제 손목을 옥죈 렉시우스의 손만이 선명히 느껴질 뿐이었다. 손목을 비틀어도 놓아주지 않고 더 악착같이 들러붙는 손가락에 진절머리가 났다.
애리얼은 렉시우스가 이 어둠을 틈타 저를 데리고 순간 이동을 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감금이라도 당하나?
번쩍!
플래시가 터지듯 순간적으로 빛이 일었다 사라졌다.
그 순간 애리얼의 생각도 소각되었다. 상황을 예측하던 도중 갑작스레 발발한 빛에 사고가 멈추었다.
뒤늦게 ‘무슨 일이지?’ 하고 의문을 가졌을 때 다시 번쩍!
두 번째로 빛이 터진 찰나, 애리얼은 새하얗게 밝아진 홀의 중앙에서 생긋 웃고 있는 데본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등허리로 오스스 소름이 올랐다.
이 상황은 그가 만든 것이다.
이유가 뭐든 애리얼은 이 상황이 제게 무척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알았다. 도망쳐야 한다. 어떻게든 대공저를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여전히 손목은 렉시우스에게 붙들려 있고,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번쩍, 번쩍, 번쩍!
연달아 빛이 터지며 주변이 하얗게 표백되었다가 다시 어두워지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밝아진 찰나의 순간들이 스톱 모션처럼 이어졌다.
애리얼은 굳어 있었지만, 렉시우스는 굳어 있지 않았다. 애리얼은 그가 손을 휘둘러 뭔가를 시도하는 걸 보았다. 그 직후 그를 막으려는 듯 뭔가를 날린 레이신도 보았다. 방관자처럼 멀리 떨어져 있던 데본시아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짧은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애리얼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빛이 명멸할 때마다 혼란에서 기인한 공포가 온몸을 타고 퍼졌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기절할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쾅! 챙강! 퍽!
어디선가 깨지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상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렉시우스와 레이신이 대치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파지직!
적색의 스파크가 터졌다. 마력끼리 충돌하여 과열되었을 때 보이는 색상이었다.
사람이 가득한 홀에서 둘은 공격술을 날리고 있는 거였다.
와장창! 쿠웅!
거대한 물체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애리얼은 황급히 몸을 숙이고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추락하지 않았다.
애리얼은 가늘게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번쩍거리는 시야로 거대한 샹들리에가 보였다. 형편없이 파손된 상태로 조각난 파편과 함께 공중에 떠 있었다. 멈춰 버린 방문객들과 똑같이, 샹들리에도 멈춰 있었다.
어떤 변수도 이 무대에 난입하지 못한다는 걸 알리듯이.
샹들리에는 투명한 유리 파편으로 분해되는 도중의 모습으로 멈추었다.
비현실적으로 충격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빠르게 명멸하는 빛, 시간이 정지한 듯 멈춘 주변, 눈으로는 따라잡지도 못할 속도로 공격술을 주고받는 렉시우스와 레이신.
애리얼은 이 광기의 난장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과하게 경직되었던 나머지 사지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쨍그랑! 쿠웅!
아까와 비슷한 소음이 울렸다.
이번에도 샹들리에가 부서진 걸까.
두려움에 기절할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애리얼은 제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난장판 속에서 다가온 찰나의 기회였다.
애리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장 손목을 비틀어 뺐다.
“가만히 있어!”
렉시우스가 뒤늦게 그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애리얼은 곧장 뒷걸음질을 쳤다. 후들거리며 떨리던 다리에서 힘이 풀려 몸이 크게 넘어갔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 덕분에 렉시우스의 손을 수월하게 피할 수 있었다. 요행이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찾아 곧장 몸을 틀었다.
이때를 노린 것처럼 빛의 명멸이 멎었다.
“데본시아!”
렉시우스가 고함을 질렀다. 이 사태의 원흉을 향해 흉흉한 분노를 드러냈다.
애리얼은 얼얼한 둔부를 문지르다가 얼른 몸을 낮췄다. 일어나지도 못해 기는 자세로 도망쳤다. 괜히 움직임을 크게 했다간 들킬 확률이 높았다. 이대로 바닥을 짚고 조금이라도 멀어지자. 무작정 렉시우스의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이게 데본시아가 일부러 의도한 상황이더라도, 그녀는 지금을 이용해야 했다.
애리얼은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기어갔다. 그녀가 서 있었던 곳은 홀의 중앙. 출입문을 통과해 일직선으로 곧장 걸어오다가 렉시우스와 맞닥뜨렸다. 그러니 뒤로 돌아 일직선으로 쭉 가면 출입문이 나올 것이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어 가며 기는데, 평평하지 않은 무언가가 만져졌다. 매끈한 촉감, 바닥을 딛고 있는 누군가의 구두였다.
데본시아의 마법으로 멈춰 버린 손님 중 누군가의 구두인가.
애리얼이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옆으로 몸을 트는데, 앞에 있던 구두의 주인이 움직였다. 몸을 확 숙여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그녀는 움찔 멈추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이 바닥에 엎드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녀를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누구지?’
애리얼은 큰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 손길에 의지해 일어났다.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섣불리 저항했다간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렉시우스에게 제 위치를 들킬 수도 있었고.
‘공략 대상 중에 하나일까?’
적어도 렉시우스와 레이신은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그녀의 뒤에서는 소음이 계속 난무하고 있기에.
그러니 그 둘을 제외하면 남은 인물은 데본시아다.
이 난장판에서 이토록 자연스럽고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은 그밖에는 없다. 그렇게 추측되자, 거부감이 밀려왔다.
애리얼은 저를 부축하는 이를 조심스레 밀어냈다.
그는 잠시 밀려나는가 싶더니 그녀를 천천히 당겼다. 상당한 완력으로 위험할 정도로 밀접하여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위험해.”
귓가에 울리는 스카이라의 음성에 애리얼은 소리 없이 소스라쳤다.
“어, 언제부터 여기에?”
반사적으로 물음이 튀어 나갔다. 잔뜩 낮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스카이라는 다독이듯 다정한 손길로 애리얼을 품에 가두며 말했다.
“나중에 대답할게. 일단은 나가자.”
그가 답을 미루며 탈출을 속삭였다.
묘하게 찝찝한 태도에 애리얼은 다리에 힘을 주고 그를 밀어냈다.
“어디로?”
“그건 나중에.”
“짧게라도 말해 줘.”
억지로 버티며 묻자 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황성으로 가.”
그가 말을 꺼낸 절묘한 타이밍에 불이 켜졌다.
애리얼은 불이 켜진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가 말한 황성이라는 장소만 머리에 남았다. 백작저도 아니고 왜 황성으로 간단 말인가. 뒤이어 제가 황자비로 지정된 상태라는 것에까지 사고가 이어지자, 그녀는 곧장 스카이라를 밀쳐 냈다.
그 짧은 순간에 스카이라의 표정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정교한 이목구비를 담은 안면이 하얗게 질려 일그러졌다.
상처받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애리얼은 몸이 떨렸다. 서슬에 베인 듯 쓰리고 선득했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선의로 그녀를 돕기 위해 왔을지도 모른다. 스카이라는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으니까. 솔렘 공작저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궁지에 몰렸을 때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손에 번번이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의 손을 붙잡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하트 다섯 개를 찍은 그의 호감도 창이 빠르게 지나갔다.
“왜…….”
스카이라는 추궁이라도 하듯 입을 열었지만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녀가 저를 피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일그러진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애리얼은 급히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가슴 속이 욱신거렸으나 애써 무시했다.
더 안전한 사람이 필요하다.
‘레이신.’
아직 안전한 편인 그의 호감도 수치를 떠올리며, 그를 찾아 눈을 돌렸다.
홀의 내부는 기괴했다.
끊어진 샹들리에가 공중에 걸려 있었고, 파손된 유리 사이로 노출된 조명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아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 얼굴로 여전히 멈춰 있었다.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 안을 촬영해 놓은 것 같았다.
그 사이 홀의 중앙에서 살짝 오른쪽 부근에 렉시우스와 레이신이 있었다. 공격술을 주고받느라 생긴 얇은 생채기들이 뺨과 목, 손등 등에 자잘하게 자리했다. 거동이 불편한 것인지 움직임이 뻣뻣해 보였다.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레이신에게로 걸어갔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던 둘은 느릿하게 서로를 훑다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애리얼에게로 둘의 시선이 모였다.
레이신이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사르르 풀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제게 걸음할 줄 알았다는 듯이.
반면 렉시우스의 안면은 더욱더 굳어졌다. 그녀가 누구를 찾아온 것인지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레이신에게 지지 않겠다는 양, 미간을 좁히고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다정한 목소리였다. 렉시우스는 사나운 표정까지는 차마 고치지 못했으나 목소리만으로라도 회유하고 있었다. 다섯 개 반의 호감도로.
애리얼은 진저리를 치듯 움찔 떨면서 시선을 틀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레이신이 있었다.
레이신은 제게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서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우우웅-
겉옷의 안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애리얼은 갑작스러운 진동에도 최대한 동요하지 않고 표정을 숨겼다.
방금의 진동은 레이신의 호감도 상승 알림일 것이다. 그 역시 공략 대상이기에 결국 완전히 안전할 수는 없다는 경고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순간 이동을 쓸 줄 모르는 그녀는 곧장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선배님.”
산뜻한 음성에 레이신에게 닿을 듯하던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몹시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
레이신을 눈앞에 두고서 고개를 돌렸다.
추락하기 직전의 파손된 샹들리에 아래, 블랑셰의 모습을 한 휘아킨이 아리앨라와 함께 서 있었다. 고개 숙인 아리앨라는 그의 명령만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휘아킨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안전히 안내해 드릴게요.”
언제 왔는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위의 공략 대상은 히든 캐릭터로 공략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그는 리스크가 없는 완벽한 선택지였다.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휘아킨을 향해 팔을 뻗었다. 휘아킨이 그녀를 순식간에 휘감아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