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14)화 (202/264)

순식간에 세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레이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가 제게 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던 그는 뻣뻣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허공을 향해 뻗은 손이 맞잡아 줄 사람을 잃고서 바르르 떨렸다.

“아.”

한숨을 쉬듯 내뱉은 말 뒤로 욕설이 이어졌다.

정지된 홀에 파지직, 금색의 스파크가 튀었다. 강한 마력의 여파에 잔해들이 밀려났다. 대기가 진동했다. 공간이 곧 붕괴할 것처럼 덜덜 떨렸다. 샹들리에의 조각난 유리 파편들이 멈춰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제야 물러나 있던 데본시아가 나타났다.

“레이, 귀족들을 몰살할 셈이야?”

능청을 떨며 등장한 황태자에게로 홀에 남아 움직이는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레이신, 렉시우스, 스카이라.

대공비조차 멈춘 가운데, 특수 마법 등급을 지닌 뛰어난 마법사들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치하느라 마력을 소모한 렉시우스와 레이신의 움직임은 조금 느렸다.

데본시아의 수작이었다.

심층 결계와 정지 결계를 결합하여 펼치자 홀 안의 마력이 떨어지는 모든 존재가 멈추었다. 조각상처럼 굳은 귀족들이 홀 안에 가득 위치한 가운데, 그가 지정한 주연들만 서로를 의식하며 움직였다.

관객의 개입을 막는 동시에 극의 주연들조차 함부로 날뛸 수 없는 무대인 것이다.

그 후 데본시아는 가장 불안정한 렉시우스를 향해 미끼를 던졌다. 기름에다 불을 놓듯이 말로 도발하고서 홀을 암전시켰다. 순간 이동을 하기만 하면 그녀를 독차지할 수 있는 환경을 연출한 것이다. 당연히 레이신과 스카이라도 덩달아 자극을 받았고, 불이 꺼지는 순간 긴장감은 극을 달렸다.

그 상황에서 데본시아는 연쇄적으로 빛을 점멸시켰다. 어둠에 적응하지 못하도록. 동시에 짤막한 시각적 정보를 전달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위치를 보고 견제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의 사람을 몰래 접근시켜도 인지할 수 없게.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가 신성 마법사인 동시에 회귀자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애리얼의 룸메이트를 언제 회유한 거야.”

레이신이 마력을 거두며 물었다. 지지직 일어나던 스파크가 멎었다.

데본시아는 박살 난 샹들리에를 보며 중지와 엄지를 붙였다.

“내가 그걸 왜 알려 줘야 해?”

하하, 웃으며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울리며 홀은 결계가 생기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 조각났던 샹들리에가 다시 온전해져서 천장에 걸리고, 굳었던 사람들이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홀 안에는 말소리와 음악 소리가 퍼졌다.

데본시아는 온화한 얼굴로 사람들 틈에 섞여 들었다. 황태자를 알아본 이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다가왔다.

삽시간에 벌어진 불쾌한 변화에 남은 세 명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황당하다가 돌연 화가 치솟았다.

렉시우스가 가장 먼저 홀을 박차고 떠났다.

대공비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 나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렉시우스는 대공비가 쫓아오는 것을 알 텐데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심기가 크게 틀어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심기가 틀어진 건가.

오늘 연회는 완벽했고, 애리얼도 그를 찾아와서 넥타이까지 매 주며 좋은 그림을 만들지 않았는가. 정지되어 있던 대공비는 그의 심기가 틀어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공자! 멈추세요!”

대공비가 영영 멀어질 것같이 속도를 붙이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렉시우스가 제 뒤를 급히 쫓아온 대공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 공자! 상처가!”

대공비는 렉시우스의 얼굴을 보고 놀란 나머지 무심코 손을 뻗었다. 걱정이 가득한 손길이 그의 오른쪽 뺨을 향했다.

렉시우스는 그녀의 손을 슬쩍 피하며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피가 소량 묻어났다. 방금 있었던 암전 사태가 환각이 아님을 알리는 긴 생채기가 그의 볼에 그어져 있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대공비 전하.”

“제가 어찌 신경을 안 씁니까……. 언제 다친 건가요? 설마 누군가 공자를 공격한 것은 아니겠지요?”

“상상이 지나치십니다.”

렉시우스는 대공비의 걱정을 매정히 끊어 내며 몸을 돌렸다.

대공비가 놀라서 그의 팔을 붙들었다.

“렉시우스, 무슨 문제가 있었어? 말을 해 다오.”

“겉옷을 벗으려다 커프스 버튼에 살짝 긁힌 겁니다.”

“그게 말이 되는…….”

“전 괜찮습니다, 어머니. 약간 피로한 것뿐이니 조금 쉬고 다시 오겠습니다.”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돌린 렉시우스가 차분하게 대공비를 안심시켰다. 석연치 않은 변명에 대공비는 미심쩍은 기색이었으나 차마 더 붙잡지는 못했다.

대공비의 손이 떨어지자 렉시우스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혼자가 된 그는 곧장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함정임을 알면서도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군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화가 났다. 그 화를 애먼 대공비에게 풀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

그는 후원의 끝까지 걸어 나와 성벽을 마주하고서야 겨우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 불이 꺼졌을 때 애리얼을 데리고 나오려고 했다면 성공했을까.

목깃에 묶인 검은색 넥타이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성공 확률이 두 번째 암전 때보다는 훨씬 높았겠지. 찬 바람이 불어와 뜨거워진 이마를 스쳤다.

그럼에도 뜨거워진 머리는 식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애리얼을 가질 수 있을까.

극단적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그는 그 극단적인 방법들마저 싫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

주인공이 없는 연회에 초대된 귀족들만 신이 났다. 형을 대신하여 자리를 지키는 우레우스를 둘러싸고서 아양을 떠는 움직임이 분주했다.

지루하게 그 광경을 관찰하던 스카이라, 레이신도 홀을 떠났다. 적당히 자리를 지키던 데본시아마저 흥미가 떨어진 눈으로 홀을 빠져나갔다.

애리얼이 없는 곳엔 굳이 붙어 있을 가치가 없다.

***

높다란 첨탑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애리얼은 그 높은 탑을 보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뾰족뾰족하게 솟은 탑을 가득 지닌 순백색의 성.

단 한 번 와 봤던 무하 공작저였다.

휘아킨의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백작저로 이동될 것인가. 아니면 무하 공작저로 이동될 것인가. 전자가 더 좋았겠으나, 후자여도 큰 상관은 없었다.

“괜찮아요?”

휘아킨이 멍하게 첨탑만 바라보는 애리얼의 눈앞에다 손을 휘휘 흔들었다.

애리얼은 살짝 젖혀져 있던 고개를 바로 하면서 그와 눈을 맞췄다. 그는 블랑셰의 외관을 하고 있었다.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무해한 외관에 애리얼은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아, 미안. 경황이 없어서.”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럴 만해요.”

휘아킨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좀 쉬는 게 좋겠어요.”

“어……. 그래.”

애리얼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에게 끌려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와 함께 이동했어야 할 아리앨라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힘으로 공작저까지 왔을 텐데.

의구심이 든 애리얼은 성의 주변을 살피다가 정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작저의 정문으로 통하는 미로 정원의 입구, 담쟁이가 가득 자란 벽의 너머에서 아리앨라가 삐죽 얼굴을 내밀며 나왔다. 그녀는 애리얼과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왜 저런 곳에서 나오지?’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인사를 받으면서 의문에 잠겼다. 보통 타인과 함께 순간 이동을 할 때는 신체의 어디든 연결된 상태여야 했다. 당연히 이동한 후에도 가까이 붙어 있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동한 후 그녀의 곁에는 휘아킨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아리앨라랑 어디든 접촉을 했었나?’

의문이 또 하나 생겨났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상황이 워낙 급박했기에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애리얼은 의구심을 파헤치며 걷다가 문득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때아닌 제비꽃에 둘러싸인 하얀 저택이 보였다. 본채인 성과는 정원을 사이에 두고 분리된 장소였다. 흰 계단과 삼각형의 지붕을 갖춘 포치, 그 아래 아치형의 더블 도어가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여긴 어디야?”

저택의 현관문 앞에서 애리얼이 물었다.

휘아킨이 문고리를 돌리며 대답했다.

“공작저의 별관이에요.”

“별관?”

“본관보다는 여기가 편할 것 같아서요.”

그는 애리얼을 이끌고 별관으로 들어갔다. 서로의 손은 여전히 맞잡은 상태였다.

별관의 내부는 외관만큼 화려하거나 우아하진 않았다. 가구도 단순한 디자인으로 단출하게 갖추어져 있고, 그렇게 크지도 않았다. 장식품도 거의 없었다.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 놓아 전체적으로 깔끔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휘아킨은 거실로 보이는 공간의 큰 소파에 애리얼을 앉혀 놓고서야 손을 놓았다.

“거창한 건 없고, 캐모마일 같은 건 있는데. 마실래요?”

“……아, 아니. 괜찮아.”

“그럼 따뜻한 물이라도 가져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정말 괜찮아. 그것보다는 당장 궁금한 게…….”

“시간은 많아요, 선배님.”

그가 금방이라도 다시 일어나려는 애리얼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단호한 제지에 애리얼이 순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토닥토닥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선배님, 아까부터 계속 몸을 떨고 계시던데, 좀 쉬시는 게 좋겠어요.”

그제야 애리얼은 제 몸이 간헐적으로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과도한 긴장 상태에 놓였던 여파였다.

그의 말대로 좀 쉬어야 했다.

“응……. 그럴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편하게 계세요.”

휘아킨은 거실과 연결된 복도로 걸어갔다.

애리얼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수전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이 바르르 떨렸다. 탈진한 것같이 온몸에 힘이 없었다. 알게 모르게 과도한 마력에 노출된 탓인가. 피로가 몰려왔다.

그 시각, 휘아킨은 욕실로 향했다. 이어링을 제거하고 샤워를 마친 뒤, 짧아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얼굴을 확인했다. 블랑셰가 아닌 휘아킨의 모습이 비쳤다. 소녀가 아닌 소년의 모습. 청년으로 넘어가는 그 길목에 있는 섬세한 이목구비를 바라보다가 옷을 걸쳤다.

그는 어깨에 수건을 걸친 채 주방으로 돌아와 물을 끓였다. 이후 물을 담을 도자기 잔과 캐모마일을 우려낼 찻잔을 준비해 놓는데, 뚜르르르, 소음이 울렸다.

휘아킨은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주방 한구석에 놓인 전화기로 다가갔다. 수화기를 들고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야, 공자.

“아, 황태자 전하. 저에겐 무슨 일로?”

-……위장을 풀었네.

부쩍 차가워진 음성이었다.

휘아킨은 슬그머니 입술을 휘었다.

“집에선 저도 좀 편하게 있어야죠.”

-백작저로 가기로 하지 않았나?

“애리얼의 손을 잡으니까 마음이 바뀌어서요.”

-공자.

서늘한 중저음이 수화기를 넘어왔다. 데본시아가 분노한 것을 느끼고 휘아킨은 코웃음을 쳤다.

“이러라고 저를 붙이신 거잖아요.”

-…….

“애리얼과 최대한 친하게 지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황태자님.”

간드러진 음성으로 전했다. 확연한 남성의 목소리로 고고하신 황태자님의 성질을 있는 대로 긁어 놓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