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끊겼다.
데본시아는 진정하려는 듯 숨을 고르다가 수화기를 집어 던졌다.
쾅!
수화기가 벽에 부딪쳐 큰 소음을 만들었다. 겉면을 이루는 부분이 부서져 파편이 튀었다. 망가진 수화기가 내부 전선을 드러낸 채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렸다.
데본시아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거칠어진 호흡을 골랐다.
무하 공자가 저럴 수 있다는 걸 예상했음에도.
“생각보다 더 기분이 더러운데.”
그는 간신히 분노를 참으며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무하 공작저로 쳐들어가 마도구를 낀 공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
진노로 열감이 어린 숨을 길게 토해 냈다.
커튼을 내려 둔 어두운 집무실에 잔뜩 화난 그의 한숨 소리가 퍼져 나갔다.
조명도 켜지 않은 그늘진 집무실에서 책상을 짚고 분노를 삭이는 황태자의 뒷모습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곁을 지키던 시에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처리할까요?”
“아니. 절대 손대지 마.”
데본시아가 고압적으로 명령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시에나는 그의 명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고하신 분의 명이니 절대 거스를 일은 없었으나, 그 의도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공자가 저토록 무도한데 왜 처리해선 안 되는 것인가.
분명 무하 공자는 귀하고 귀하신 공작가의 외동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귀함은 반쪽짜리일 뿐. 마저증을 앓고 있는 그는 무하 공작가의 불량품이었다. 무하 공작은 제 아들의 체질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성별까지 속여 가며 신분을 숨기고 위장한 채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사생아나 다름없는 취급이었다.
죽이는 것까지는 몰라도 불구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다시는 저러고 반항하지 못하게 잔혹한 형벌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태자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무하 공자에게 극도로 분노했음에도 혼자 분을 삭이면서, 그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말했다.
시에나는 황태자가 저토록 공자를 미워하면서도 조금도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허클리 공녀 때문이신가?’
시에나는 정말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질문하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나가 있어.”
황태자가 싸늘한 어투로 명했다. 시에나는 조용히 몸을 물렸다.
집무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가 분노해서 나가라고 명하자 시에나가 복도까지 전부 비워 놓은 탓이었다.
데본시아는 책상에 놓인 달력을 들었다. 일 월 일 일까지는 넉 달 조금 안 되게 남았다.
즉위식의 준비는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고, 모든 것은 아직 그의 상정 내였다. 전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애리얼과 대화를 나누지 못한 지 두 달이 되어 간다. 여름 학기 이후론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오늘 겨우 그녀의 얼굴을 보았으나, 대화의 기회는 주어지지 못했다. 렉시우스에게 잡혀 있다가 스스로 무하 공자를 선택해서 달아나는 모습만 보았다.
혀를 씹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는 오늘 대공저 홀에서의 난장판 속에서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을 되새겼다. 빛이 돌아온 순간 저를 향해 연하게 반짝이던 검은색 눈동자. 저도 모르게 곧장 미소를 지어 주고 말았던 그녀의 얼굴을 되새기자 묘하게 열이 올랐다.
세상에 오직 둘뿐인 것만 같았던 그 찰나를 오래도록 되새기며, 그는 잔존한 분노를 천천히 눌렀다.
***
번쩍거리던 홀과 멈춰 있던 사람들, 부서진 채 떠 있던 샹들리에. 피로감을 일으키던 그 장면이 되살아났다. 머리가 아팠다.
번쩍, 번쩍, 번쩍. 빛이 빠르게 명멸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장면들은 온통 험악하기만 했다. 눈을 감았으나 지워지지 않았다. 잔상이 어두운 시야를 비집고 들어와 어지러이 늘어졌다.
챙그랑! 챙강! 쿠웅!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찔러 댄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누군가가 손목을 아프게 잡아 왔다.
“이리 와.”
묵직한 저음이 차갑게 명령했다.
싫었다.
힘껏 손목을 비틀어 뺐다. 저항이 거셌던 탓일까. 몸이 뒤로 넘어갔다.
지면이 훅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까지 추락하는 걸까?
아찔한 감각에 몸을 웅크렸다.
누가 나를 좀 도와줘…….
“선배님.”
조용한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이어서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식은 이마를 훑고 지나갔다.
애리얼은 가늘게 눈을 떴다.
휘아킨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휘…… 아킨?”
힘겹게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그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애리얼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악몽 꿨어요?”
“아…….”
애리얼은 잠긴 목소리를 내며 눈가를 문질렀다.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내가 잠들었어?”
“네. 한 삼십 분 정도요.”
그는 흑발을 매만지던 손을 거두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끙끙거리시길래 깨웠어요.”
그의 손에는 흰색 찻잔이 들려 있었다. 애리얼의 시선이 찻물을 담은 도자기 잔에 닿자 그가 친절히 찻잔을 내밀었다.
“마실래요?”
애리얼은 멍하게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 상체를 일으키고 손을 내밀었다.
“응.”
“아까 말했던 캐모마일이에요. 물보다는 이게 더 나을 거예요.”
그가 애리얼의 손에 찻잔을 조심히 쥐여 주었다.
애리얼은 손바닥에 스미는 따스한 온도를 만끽하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편안한 허브의 향기가 풍겼다. 악몽에 시달리던 몸이 노곤하게 풀려 가는 느낌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진정이 됐다.
휘아킨은 평정을 찾을 때까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기다렸다. 세심한 배려였다.
애리얼은 멍하니 잔을 보다가 찻잔을 입에 대고 따스한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휘아킨이 적당히 식혀 놓은 것인지 찻물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미지근한 찻물로 목을 축이자 긴장이 풀리고 나른해졌다. 한결 차분해진 애리얼은 찻잔을 쥐고서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은은하게 켜진 스탠드가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완전히 어두웠다.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이것도 휘아킨이 신경 써 준 걸까 싶었다.
주변을 훑던 애리얼의 눈이 제 옆자리의 휘아킨에게 가닿았다.
그는 흰 셔츠에 베이지색 스웨터 조끼를 걸치고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책을 들고서 동그란 안경을 쓴 채 집중하고 있었다.
항상 교복 차림만 본 터라 그의 사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교복을 입었을 때보다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원래도 강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예민한 느낌은 조금 있었는데, 지금은 순하게만 보였다. 다정한 인상의 엘리트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보시면 책을 읽을 수가 없어요, 선배님.”
시선을 느낀 그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애리얼은 뜨끔하여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 미안…….”
사과를 전하자 그가 푸흣 웃음을 터트렸다. 책을 덮어서 테이블에 올려 두고선 애리얼을 향해 고개를 고정했다.
“그냥 장난이었는데, 선배님이 너무 진지하게 사과하시니까 괜히 제가 더 미안하네요.”
그가 부드러이 눈을 휘며 장난기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분명 장난일 텐데 은근한 유혹의 기색을 느낀 건 왜일까.
묘한 기류를 느낀 애리얼은 모르는 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사용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어 가는 시각이라 그런 건가. 그렇게 추측하자 긴장감이 더 높아졌다.
‘이 밤중에 공작저에서 휘아킨과 단둘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룸메이트로 한방을 썼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그때와 지금은 좀 다르지 않은가.
애리얼은 어색함을 느끼며 찻잔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
휘아킨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감사 인사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전 별로 한 일도 없는걸요.”
“아냐, 네가 아니었다면…….”
“솔렘 공자님을 따라가셨으려나?”
그의 발언에 애리얼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휘아킨이 유일한 구명줄이라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선택지여서 고른 거였다. 그런데 그를 유일한 구원인 양 묘사하려 했으니, 그에겐 기만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미안해.”
조용히 우러나온 사과에 휘아킨은 묘한 표정을 짓다가 낮게 웃었다.
“추궁하려는 게 아니에요.”
“…….”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수도 있었는데, 저를 선택한 거잖아요.”
“그건…….”
“그래서 전 더 좋았어요.”
그는 상냥했다.
애리얼은 그의 상냥함이 선후배 간의 정이나 룸메이트로서의 호의, 정의감과 도덕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제게 이성적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히든 캐릭터라 한들 호감도 창은 존재하고, 하트가 상승했다. 애리얼은 휘아킨이 제게 가진 호감도가 꽤 된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대공저 홀에서는 그가 히든 캐릭터라는 사실에 안도하여 그를 붙잡았지만, 더는 그래선 안 된다. 그의 감정에 보답도 대답도 하지 않을 거면서 이용만 하려는 건…… 지나치게 이기적이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휘아킨도 그리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할 터다.
‘우선은 백작저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새로 대책을 세워야…….’
애리얼은 홀로 설 생각을 하자 떨려 오는 몸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꺼냈다.
“너도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을 텐데, 배려해 줘서 고마워.”
슬그머니 운을 떼자 휘아킨은 시큰둥하게 눈을 내리깔고서 말을 돌렸다.
“배 안 고프세요? 저녁 드실래요?”
“아, 그…… 시간이 늦지 않았어?”
“한 여덟 시 정도일걸요?”
“……시간이 많이 늦었네.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올게.”
“내일 온다고요.”
“응. 더 있으면 폐가 되잖아. 충분히 신세를 많이 졌어. 좋아하는 거라도 있으면 말해 줘. 준비해서 내일…….”
“백작저가 더 위험하지 않아요?”
휘아킨이 물었다.
그녀의 속내쯤은 다 안다는 듯이, 그는 몇 단계를 뛰어넘어 곧장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애리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도 다 알고서 도운 것이다. 애초에 아리앨라를 대동하고서 대공저에 나타난 이유가 뭐겠는가. 휘아킨도 정계며 사교계에 퍼진 황자비에 대한 소문을 모를 리 없었다. 오히려 가장 잘 알 터였다. 아카데미에서부터 스카이라와 악연으로 엮인 당사자니까.
휘아킨은 사정을 다 알고서 그녀를 도울 생각으로 온 거였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요. 결계도 없고, 경비도 허술하고, 선배님을 지킬 인력도 부족하고.”
그의 말은 단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백작저로 가기가 두려웠다. 백작저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레이신이 벌써 와 있을지도 몰랐다.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그를 보기가 껄끄러웠다.
그래도 레이신만 있다면 차라리 나은 상황이었다. 렉시우스가 와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몰랐다. 둘 다 있는 게 가장 최악이었다. 거기에 스카이라까지 있다면…….
“그러니까, 여기서 지내실래요?”
휘아킨이 그녀의 생각을 훤히 꿰뚫고서 말했다.
“평생 살라는 거 아니에요. 무서운 선배들이 우리 애리얼 선배님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때까지만.”
그녀의 구명줄이 되어서 제안했다.
“제가 남자인 게 거북하시면 블랑셰 멜로르의 모습으로 위장해 있을게요.”
과도한 친절을 베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