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16)화 (204/264)

“왜…… 그렇게까지…….”

애리얼이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선배님은 왜 그랬는데요?”

“……뭘?”

“제가 아카데미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 선배도 나섰잖아요.”

그의 말에 애리얼은 아카데미 제3 기숙사 동에서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마저증으로 약점을 잡혀 집단 괴롭힘을 당하던 휘아킨. 저급한 말들이 난무하고 멸시와 방관만 가득한 가운데 홀로 담담히 그 상황을 견디던 그.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던 불합리하고 저급한 상황들.

“그때는…… 화가 나서 그랬어. 널 괴롭히는 이들이 너무 무례하고 무도하고 끔찍해서, 당연히 나서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저도 그래요.”

휘아킨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도 선배님을 괴롭히는 인간들 때문에 화가 났거든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나섰어요.”

차분히 그녀의 심정에 공감하며, 그녀와 같은 이유를 들며, 그녀를 돕고자 손을 내밀었다.

애리얼은 떠나고자 마음먹었던 것과 달리 크게 흔들렸다.

그의 도움이 없다면 특별 엔딩이 이루어지는 날짜까지 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오늘 같은 일이 두 번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크게 자극을 받은 렉시우스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백작저라는 방어선은 종이 벽보다도 못했다.

오늘은 구 월 십 일. 일 월 일 일까지는 이제 석 달 반 정도가 남았다.

애리얼은 염치 불고하고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고 싶었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며칠…… 아니, 몇 달쯤 머물러도 괜찮을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휘아킨은 조용히 팔을 뻗어서 애리얼의 어깨를 부드러이 감싸 품으로 당겼다. 애리얼은 힘없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서 캐모마일의 향기가 묻어났다. 라벤더를 닮은 꽃향기도 미미하게 느껴졌다. 포근했다.

많이 지쳤던 탓일까. 애리얼은 그를 밀어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애리얼의 등을 감싸 안으며 소곤거렸다.

“얼마든지요, 애리얼.”

우우우웅-

겉옷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애리얼은 그 소리를 외면했다.

그는 히든 캐릭터니까, 호감도가 올라도 괜찮다. 그렇게 안심하면서.

애리얼은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였다.

왜인지 의식이 몽롱하다.

그녀는 그가 제 이름을 불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아내려 합니다.)

▷현재 위치: 솔렘 공작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휘아킨 무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쫓아다니고, 붙잡고 싶어 합니다.)

▷현재 위치: 무하 공작저 별관 - 거실』

***

백작저에 연락을 넣고, 아리앨라를 보내 필요한 것들을 공작저로 챙겨 왔다.

일전에 대공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애리얼은 아리앨라가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이 일을 달리 수행할 사람이 없었다. 무하 공작저의 결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으면서 애리얼의 사정을 아는 이는 그녀뿐이었다.

애리얼은 굳이 그때의 일을 아리앨라에게 묻지 않았다. 렉시우스의 앞에서 휴대폰에 해제 마법을 건 것이 렉시우스의 협박 때문이든, 아니면 그녀의 호기심 때문이든, 어느 쪽이라도 큰 상관은 없었다.

아리앨라는 애리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 탓에 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애리얼도 괜찮았다. 아직도 아리앨라에게는 고마움이 더 컸다. 그녀가 의심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애리얼은 아리앨라가 마법으로 차곡차곡 정리해 주고 떠난 방을 돌아보았다.

백작저에서 가지고 온 물건은 많지 않았다. 옷 몇 벌과 책 몇 권, 노트 한 권과 필기구 몇 가지가 다였다.

욕실이 딸린 방은 적당한 크기였다. 제3 기숙사 동의 방과 비슷한 넓이로 창가에 침대가 놓여 있고, 옷장과 책상 등 필요한 가구만 있었다.

대충 점검을 끝낸 애리얼은 푹신한 침대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맑고 하늘은 깨끗했으나 방은 그늘이 져 있었다.

별관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휘아킨은 어젯밤 그녀에게 원하는 방을 골라 보라고 했었다. 본관과 별관 중 어디에서 지낼지를 먼저 고르게 했으나, 그는 선택지를 주면서도 본관에서 지내는 걸 만류했다. 본관에는 온갖 마법사들과 각종 마도구들이 즐비하며, 아리앨라처럼 마력과 마법에 심취한 이가 많다고 전했다. 그 이야기에 애리얼은 곧장 별관에서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혹시라도 휴대폰이 그들의 눈에 띄어 빼앗기게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별관은 마도구도 거의 없고, 출입하는 이도 휘아킨과 사용인 몇이 다였다.

방은 총 여섯 개였고, 가장 큰 방은 서재였다. 서재를 제외한 나머지 방은 전부 비슷한 크기에 가구나 구조도 비슷했다. 애리얼은 거실과 가까운 방을 적당히 골랐다.

확실히 사람이 크게 없으니 마음이 편했다. 그와 단둘이 지내는 건 또 다른 문제였지만.

“정리 끝났어요?”

창문을 바라보던 애리얼이 고개를 돌렸다.

짐을 넣느라 열어 둔 문 앞에 휘아킨이 서 있었다. 손에는 블랑셰의 모습을 할 때 쓰는 은색 이어링을 쥐고 있었다.

“위장하게?”

“네. 아카데미로 가려면 그래야죠.”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거야?”

“휴학계를 내기에는 늦어 버려서요.”

그가 농담조로 말했다. 애리얼은 그가 완전히 농담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느꼈다.

“그러지 마. 휴학계를 내면 페널티가 크잖아.”

“페널티라고 해 봐야 다음 학기 성적에 반영되는 게 다인걸요.”

휘아킨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해가 가는 자신감이지만 애리얼은 그가 페널티를 지면서까지 휴학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스카이라로 인해 퇴학당할 뻔한 것을 억지로 보류하고서 겨우 얻어 낸 학생 자리였다. 그가 부디 무탈하게 아카데미 졸업장을 쥐길 원했다.

“성적에 반영되는 거 자체가 치명적인 거지. 되도록 안 하는 게 좋아.”

“그런데도 선배는 용케 휴학계를 내셨네요.”

그가 하하 웃었다.

애리얼은 달리 변명할 말이 없어져서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나, 나는 성적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푸흡, 그래요?”

그녀의 뻔뻔한 태도에 휘아킨이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웃음기가 잔뜩 어린 목소리에는 놀리는 기가 다분했다.

차라리 말하지 말걸.

애리얼은 후회와 함께 볼을 붉혔다.

휘아킨은 문틀에 기대어 홍조가 살짝 든 그녀의 뺨을 관찰했다. 은회색 눈동자에 집요한 빛이 깃들었다. 연한 홍조에 물든 듯이 그의 눈가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도 성적에 신경 안 쓰는데.”

웃음기를 잃지 않는 나긋한 미성이 애리얼의 귓가에 닿았다.

애리얼이 슬쩍 시선을 마주하자 그는 헤실헤실 웃었다.

“그럼 휴학계 내도 괜찮으려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어…….”

애리얼은 애매한 감탄사만 내뱉었다. 설마하니 진짜 휴학계를 낼까. 당황이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에 묻어났다.

얼빠진 그녀의 얼굴을 향해 휘아킨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다녀올게요.”

짧은 인사를 남기고, 그는 별관을 떠났다.

애리얼은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휘아킨이 기숙사로 돌아가면, 나는 여길 혼자 쓰는 건가?’

그가 며칠 혹은 몇 주씩 없다고 생각하니 그건 그거대로 또 불안했다.

어제는 지쳐서 일찍 잠들었기에 휘아킨과 말을 많이 나누지 못했다.

이대로 여길 차지하고 지내도 정말 괜찮은 건지. 무하 공작은 자신이 여기에서 지내는 걸 알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휘아킨은 이미 아카데미로 떠난 후였다.

***

다행히 휘아킨이 휴학계를 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계속 붙어 있지도 않았다.

그는 출퇴근하듯이 아카데미와 별관을 오가며 생활했다. 당장이라도 아카데미를 때려치우고 싶은 눈이긴 했으나 꾸역꾸역 나가기는 나갔다.

애리얼은 그게 신기했다.

처음에는 아리앨라가 그를 아카데미까지 순간 이동 시켜 주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아리앨라가 뛰어나다 해도 순간 이동은 고위 술식이라 힘들 텐데. 궁금증에 그에게 묻자 그는 공작저와 아카데미를 잇는 연결 통로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위치는 알려 주지 않았다. 애리얼도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았다.

애리얼이 궁금해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공작 서하께서도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계셔?”

소파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보는 휘아킨을 향해 물었다.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아세요. 허락도 하셨고요.”

“그랬구나…….”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세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저한테 말하시고요.”

“그럴게. 고마워.”

휘아킨은 짧게 고개만 까딱거렸다. 책에 어지간히도 몰두한 모양이었다.

그제야 애리얼은 마음이 꽤 놓였다.

무하 공작도 알고 있고 허락을 받았다면 머무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백작저에 머무는 것보다 훨씬 좋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무하 공작저의 보안은 솔렘 공작저나 대공저보다도 더 삼엄한 구석이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황성과도 비견될 정도였다. 공작저는 극도로 폐쇄적이라 손님을 부르기는커녕 안의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는 일조차 별로 없었다. 공작저를 감싼 미로 결계는 황성의 인재라도 풀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신성 마법사인 황태자가 작정하고 나서는 게 아닌 이상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황태자가 그러고 나설 일도 없을 거고.

무하 공작저의 보안은 그만큼 믿을 만했다.

다만, 조금 불편한 게 있다면 안이 완벽하게 보호되는 만큼 바깥의 상황을 잘 알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도 휴대폰이 있으니 위치 정보 정도는 알 수 있고……. 크게 위험한 건 없어.’

제 방으로 돌아온 애리얼은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관찰하며 상황을 가늠했다.

공략 대상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데본시아는 황성 북관, 스카이라는 황성 중앙관, 렉시우스는 대공저, 레이신은 솔렘 공작저.

그중에 아카데미에 가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라도 대공저에서의 탈출 때문에 다른 공략 대상들이 휘아킨을 추궁하거나 괴롭히지는 않을까 싶었으나 기우였다. 그들은 아예 마주치는 일 자체가 없었다. 애리얼이 관찰한 바로는 그랬다.

그래도 그녀가 보고 있지 않을 때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애리얼은 휴대폰을 오래 들여다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사용인도 특정 시간 외에는 출입하지 않는 별관이라 휴대폰을 쓰기가 쉬웠다.

대공저에서는 더디게 가던 시간이 공작저 별관에서는 조금 빠르게 갔다.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고 보안이 단단해서 마음이 편한 덕분이었다.

애리얼은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씩 휘아킨과 마주했다. 거실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대공저에서처럼 격식을 차린 자리는 가지지 않았다. 기숙사에서처럼 테이블에 각종 음식을 늘어놓고 먹었다. 그래서 더 편했다.

휘아킨은 그녀의 생활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느긋한 생활에 마음이 늘어져 경계심이 허물렸고, 애리얼은 조금씩 나태해졌다. 가끔 늦잠을 자서 아침에 그를 못 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애리얼을 보고 식사를 마친 뒤 아카데미에 갔다가 공작저로 귀환해 애리얼과 저녁을 먹었다. 귀찮기도 할 텐데 꼬박꼬박 별관으로 돌아오며 이 루틴을 지켰다.

그리고 그는 별관에서는 절대 블랑셰의 모습으로 위장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랬다.

곧 아카데미로 가야 할 시간인데도 휘아킨은 꿋꿋하게 본모습을 유지한 채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는 찻잔에 과일 향이 나는 진홍색 차를 따르며 물었다.

“불편한 건 없어요? 필요한 거라든가.”

그가 주기적으로 던지는 질문이었다.

애리얼은 여느 때처럼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눈이 달력을 찾아 움직였다.

‘렉시우스의 생일이 구월이었고 다음 생일은 스카이라…….’

십일 월 십일 일이었다.

애리얼은 약간 초조해졌다.

아직 날씨는 선선한 편이었고, 시간이 그렇게 흐르지는 않았을 터. 그래도 미리 선물을 준비해 놓는 게 좋았다. 탈 없이 건넬 방법도 생각해 둬야 하니까…….

‘그런데 달력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애리얼은 거실의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찾는 거 있어요?”

휘아킨이 좋은 향기를 풍기는 찻잔을 애리얼의 앞으로 밀어 주며 물었다.

“달력은 어디 있어?”

“달력이요?”

“응. 날짜를 보고 싶은데, 달력이 없어서.”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를 텐데, 달력이 소용이 있나 싶은데요.”

휘아킨이 무심히 이야기했다.

애리얼은 그 말투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를 텐데’.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애리얼이 날짜를 모를 거라는 확신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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