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겠지. 설마 휘아킨이 일부러 그랬겠어……. 그냥 추측한 걸 거야.’
술렁대는 의심을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더 달력이 필요해. 며칠인지도 모르고 너무 팔자 좋게 사니까 자꾸 게을러지고……. 며칠 전에도 늦잠 자느라 너 나가는 것도 몰랐잖아.”
“좀 느긋하게 살면 어때요. 선배님, 너무 시달리면서 사셨잖아요. 별관에 온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요.”
그가 넌지시 날짜에 관한 힌트를 던졌다.
일부러 하는 말인지 지나가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애리얼은 그가 아직 한 달도 안 됐다고 언급한 것을 정확히 들었다.
‘그러면 아직 시월 초라는 거지?’
스카이라의 생일까지는 한 달 정도의 여유가 있다. 선물이야 하루면 준비할 수 있고, 어떻게 건넬지가 중요했다. 오늘부터 온종일 방법을 고심하면 뭐든 그럴듯한 방안이 하나 정도는 마련되겠지.
어쨌든 날짜를 알고 계산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야?”
“아마도 시월……. 죄송해요. 저도 날짜를 잘 헤아리지 않아서.”
그의 대답에 애리얼은 다시금 묘한 의심이 들었다. 아카데미에 다니는데 날짜를 잘 헤아리지 않는다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카데미를 다니면 매일 시간표도 보고 시험 날짜도 헤아릴 텐데, 왜 네가 날짜를 몰라?’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유를 모르게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돌연히 의식이 몽롱해지며 의심까지 흐려졌다.
애리얼은 고개를 저으며 나른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괜찮아. 아무튼 달력이 있었으면 좋겠어.”
“……알겠어요. 오늘 저녁에 가지고 올게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달력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애리얼은 또다시 그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내내 자신의 부탁을 바라는 듯이 필요한 게 없냐고 묻더니, 막상 달력이 필요하다고 하니 못마땅해하는 듯한…….
“고마워.”
애리얼은 이번에도 티 내지 않고 그를 대했다. 살짝 미소까지 지어 보이자 그는 은근히 뺨을 붉혔다.
“더 필요한 건 없어요?”
“응. 괜찮아.”
“……네.”
휘아킨은 약간 아쉬운 듯 애리얼을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마저 준비하고 올게요.”
“응.”
애리얼도 따라서 일어났다. 달콤한 향이 나는 찻잔을 든 채였다.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앉아 있어도 돼요. 그냥 저 나갈 때 배웅만 해 줘요. 선배님 말대로 선배님 늦잠 잘 때마다 얼굴도 못 보고 나갔으니까.”
“……이제 늦잠 안 잘 거야.”
“네, 그래요. 아침에 선배님 얼굴 못 보면 서글프거든요.”
그는 진담 같은 농담을 던지고는 제 방으로 사라졌다.
휘아킨은 대놓고 호감을 드러내는 듯한 언행을 하지 않았다. 종종 모호한 말을 던지기는 해도 렉시우스나 레이신에 비해서는 그 선이 명확한 편이었다. 언제든 빠져나갈 구석을 마련해 놓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휘아킨은 늘 우정이나 후배로서의 도리라는 식으로 덧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애리얼로서도 휘아킨이 그렇게 둘러대 주는 게 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거실로 나온 휘아킨은 여전히 위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손에 위장을 위한 이어링을 쥐고 있었을 뿐.
그는 애리얼의 앞에서는 고집적으로 제 본모습을 유지했다.
현관문으로 향하는 그를 애리얼이 쪼르르 뒤쫓아 갔다.
그 인기척을 느끼고 휘아킨이 산들바람처럼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는 더블 도어를 열고는 휙 돌아서서 애리얼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성장기의 소년임이 느껴졌다. 애리얼은 전보다 더 높아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아카데미, 잘 갔다 와.”
“네, 애리얼.”
휘아킨이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애리얼의 눈가에 닿았다. 눈 주변의 여린 살갗을 자늑자늑하게 누르고 금세 물러났다.
그 순간 애리얼의 정신은 멍하게 흐려졌다. 몽롱한 감각과 함께 전신에 나른함이 퍼졌다.
“다녀올게요.”
애리얼이 얼을 빼고 있는 사이 그가 자상하게 인사를 전하고 돌아섰다.
휘아킨의 뒷모습이 정원을 반쯤 빠져나갔을 때, 애리얼은 뒤늦게 제 눈가에 닿은 감촉을 상기하며 입을 막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신혼 같지 않아요?”
룸메이트였던 시절 함께 저녁을 먹다가 문득 던졌던 그의 말. 그게 다시금 생각났다.
지금의 상황과 완벽히 부합하는 말이었다.
매일 아카데미로 갔다가 돌아오는 그, 그리고 그걸 배웅하고 맞이하는 자신.
이 장면만 똑 떼 놓고 보면 부부나 다름없지 않은가.
애리얼은 무안해져서 황급히 별관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저도 모르게 휘아킨이 원하는 방향대로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너무 나태하게 지냈다.
그 자각은 그녀를 오싹하게 했다.
휘아킨이 다른 음습한 의도가 있어서 이런 상황을 유도했다고는 생각하기 싫었다. 과도한 억측 같았다.
심지어 그는 마저증이다.
애리얼과 그의 마력적 격차는 현격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휘아킨에게서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군다나 휘아킨은 공작가를 꽉 휘어잡고 있지도 않았다. 무하 공작이 대공비처럼 협조할 일은 없다. 공작이 휘아킨을 방치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여러모로 렉시우스와는 다르다.
물론 애리얼도 무력을 행사한다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휘아킨을 상처 입히거나 적대하기는 싫었다. 애리얼은 그에게서 큰 도움을 받아 대공저에서 벗어났다. 지금도 그의 도움 덕택에 이렇게 편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공략 대상들의 눈을 피해 있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휘아킨의 호의를 함부로 의심하지 마.’
스스로를 꾸짖듯 속으로 연신 되뇌고는 거실로 돌아갔다.
***
그날 오후 휘아킨은 약속한 대로 달력을 가지고 왔다. 깔끔한 디자인의 탁상용 달력이었다.
그는 시월 달력을 펼쳐 놓고 ‘5일’이라고 적힌 칸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날짜예요.”
“생각보다 오래되진 않았네?”
“그렇죠?”
그가 싱긋 웃으며 달력을 건넸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괜찮아. 고마워!”
애리얼은 목소리까지 높이며 밝게 감사를 전했다. 직접 날짜도 가르쳐 주며 배려해 주는 그를 보자 오늘 오전에 괜한 의심을 했던 게 미안해졌다.
휘아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티를 내다가 금세 하하 웃으며 수줍어했다.
그의 순진한 반응과 약간의 죄책감에 의심은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그 후로 휘아킨은 딱히 의심스러운 구석을 보이지 않았다. 물어보는 건 뭐든 잘 대답해 줬고, 주기적으로 백작과 통화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한번 무너졌던 의심은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애리얼은 휘아킨을 믿었다.
실제로 휘아킨은 그녀를 감시하지도 않았고, 문을 잠가 놓는 일도 없었다. 그녀의 휴대폰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를 의심하는 게 오히려 죄 같았다.
***
애리얼은 최근 멍하게 있는 일이 늘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창밖을 보거나 허공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집중해서 책을 읽는 몇 시간을 제외하면 대개 그랬다.
경계할 것 없이 느슨한 환경 탓인지. 아니면 지금껏 지나치게 신경을 쓰며 살아온 여파일 수도 있었다. 전신에 기분 좋은 나른함이 가득했다.
오늘도 거실의 너른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가물가물한 눈을 깜박거렸다.
그냥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았다.
아무도 저를 제재하는 이가 없으니까. 자유로우니까.
애리얼은 천천히 눈을 감으려다가 몸을 모로 돌렸다. 이 자세가 더 편했다. 등받이 깊숙이 등을 대고 누웠다.
자세가 바뀐 탓에 눈이 잠깐 뜨였다. 코앞에 테이블이 있었다. 애리얼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잠들고 싶었다.
금세 흐릿해지는 시야로 네모난 것이 잠깐 보였다.
[10월]
달력이었다.
‘……오늘 날짜에 표시를 했었나?’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몽롱한 정신으로 흐느적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같이 의식이 흐릿했지만 앉아서 달력을 집었다.
‘왜, 굳이 이 일을 하는 거지? 날짜는 휘아킨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그런 생각이 자꾸만 눈꺼풀을 감기게 했지만, 애리얼의 손은 테이블을 더듬어 펜을 들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무의식중에 되뇌고 있었다.
애리얼은 휘아킨에게서 달력을 받은 이후 하루하루 표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며 날짜를 헤아렸다.
‘근데 그게 뭐였지?’
달력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이 초점 없이 흐릿했다.
중요한 게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펜을 움직여 날짜를 체크할 뿐이었다.
[31일✓]
시월의 마지막 날에 이미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달력을 넘겼다.
[11월]
애리얼은 반쯤 감긴 눈으로 일 일에 체크 표시를 하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느낌표를 세 개나 그어서 표시한 칸이 보였다.
[11일!!!]
“십일 일……. 십일 월 십일 일!”
강조 표시 된 날짜를 되뇌던 애리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1월 11일.
스카이라의 생일.
어떻게 지금껏 잊고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멍했던 정신이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벼락같은 깨달음에 온몸이 흠칫 떨려 왔다. 손에서 달력과 펜이 우수수 떨어졌다.
‘왜…… 대체 왜…… 잊고 있었던 거지?’
아무리 편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애리얼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특별 엔딩을 위해서, 집에 가기 위해서 특별히 신경 써 기억하고 있던 정보가 아니었나. 무하 공작저 별관에서의 생활도 특별 엔딩을 맞을 날까지 안전을 기하기 위해 취한 선택인데,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애리얼은 자신을 꾸짖으며 급히 주방으로 향했다. 오른쪽 구석, 작은 탁자 위에 전화기가 있었다.
그나마 오늘에라도 알아서 다행이었다. 아직 여유가 열흘 정도 되니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면 늦지 않는다. 백작저에 전화를 걸기 위해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통화음이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