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18)화 (206/264)

애리얼은 고개를 갸웃하며 수화기를 보았다.

‘원래 이랬나?’

삼 일에 한 번씩 백작과 이 전화기로 통화를 했던 것 같은데, 이상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애리얼은 위화감을 느끼며 낯빛을 굳혔다.

‘며칠 전에도 통화를 했는데……?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뭔가 이상했다.

애리얼은 혼란스러워하며 번호를 입력했다. 드르륵, 드르륵, 원형 다이얼로 #710을 입력했으나 연결음은 없었다. 전화국도 연결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이얼을 돌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이얼에 끼운 손끝이 희게 질렸다.

‘고장이라도 난 건가?’

애리얼은 수화기를 살피다가 전화기도 훑어보았다. 검은색의 전화기는 금 간 데 하나 없이 매끈했다.

몇 번이고 살폈지만 부서진 곳은 없었다.

‘아래쪽이 부서졌나?’

의아해진 애리얼은 전화기를 아예 통째로 쥐고 들어 올렸다.

전화기는 무척 쉽게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매끈한 밑바닥을 내보였다. 전화기에 연결된 전선까지도 주르르 딸려 올라와 길게 늘어졌다.

이상하게도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분명 전선은 벽면에 연결되어 있을 텐데, 이렇게 간단히 당겨질 리가 없을 텐데.

강한 위화감을 느낀 애리얼은 전화기 뒤쪽의 전선을 쥐고 당겼다. 전선 역시 전화기만큼 쉽게 당겨졌다. 걸리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 감각에 그녀는 오한이 들었다.

아무리 당겨도 전선이 팽팽해지지 않았다.

까만 선을 당길수록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마…….’

애리얼은 초조하게 전선을 당겼다. 손이 떨렸다. 까만 선의 그 끝이 그녀의 눈에 담겼다.

전선이 잘려 있었다.

잘린 단면이 매끄러웠다.

인위적으로 자른 것이었다.

그것도 꽤 오래전에 자른 것으로 보였다. 전선 줄과 잘린 단면에 얇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애리얼의 안색은 이보다 나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분명 백작과 통화한 기억이 있다. 그것도 겨우 사흘 정도 전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전선은 그보다 훨씬 전에 잘린 듯했다.

‘기억이 조작된 건가……? 아니면 내가 뭘 착각하고 있는 건…….’

머리가 어지러웠다.

누가 언제 전선을 잘랐는가.

별관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데. 휘아킨과 그녀 자신밖에는 없는데…….

잠깐잠깐 청소만 하고 나가는 사용인이 이런 짓을 했을 리는 없었다. 주인의 명도 없이 함부로 이런 짓을 저지를 리는 없다.

했어도 누군가가 명령해서……. 별관의 주인이 명령해서…….

답은 순식간에 명확해졌다.

‘휘아킨.’

그러면 며칠 전 백작과의 통화도 그가 그럴듯하게 연출한 건 아닐까. 제가 안심하고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언제부터?’

전선에 쌓인 얇은 먼지가 손끝에 묻어났다.

‘설마…… 처음부터?’

공작저에 들어온 순간부터 전부 계획된 일인가?

애리얼은 대공저에서 휘아킨은 나타난 순간이 떠올렸다. 그때 그는 블랑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공저에, 렉시우스의 생일을 축하하러 오는데,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애리얼은 뒤늦게 오싹함을 느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대공저에 초대받은 이들은 고위 귀족이거나 대공가와 연이 있는 이들뿐이었다.

휘아킨이 대공저에 오려면 무하 공자라는 신분이어야 했다. 더군다나 위장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는 블랑셰의 모습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블랑셰의 모습을 하고서 대공저에 와 애리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자신은 무해 하다고 호소하는 것처럼…….

‘그렇게 내 경계심을 흐리기 위해서…….’

애리얼은 끊어진 전선을 희멀건 낯으로 바라보다가 휙 팽개치고는 주방을 빠져나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맥이 가파르게 뛰어 머리까지 울렸다.

왜 그를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왜. 왜. 왜.

공포와 배신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급하게 복도를 뛰어가 욕실 문을 열었다. 변기를 붙잡고 먹은 것을 게워 냈다. 믿음과 신뢰가 토해 내졌다. 눈물까지 줄줄 흘렀다. 고통스러웠다. 그가 보였던 미소, 상냥함과 다정함이 위선이 되어 그녀를 메스껍게 했다.

위액까지 뱉어 내고 나서야 울렁거림이 겨우 멈추었다. 휘청거리며 벽을 붙잡고 일어났다.

“여기서 나가야 해.”

홀연하게 뱉은 중얼거림이 의지가 되었다.

세면대에서 물을 틀고 입을 헹궜다. 찬물로 얼굴을 씻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휘아킨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애리얼은 이곳에 있으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스카이라의 생일을 잊고 있을 수가 있나. 매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도 자각이 없었다는 게 소름 끼쳤다.

정신에 무슨 짓을 당한 게 틀림없었다.

기가 막힌 사실에 또 속이 울렁거렸다.

애리얼은 냉수를 얼굴에 끼얹으며 속을 가라앉혔다.

계속 여기서 토하다가 탈진한 채 휘아킨에게 발견되기라도 할 셈이 아니라면, 여기서 냉정해져야 했다.

어차피 별관은 잠겨 있지 않고, 자신에게 따라붙는 감시도 없다.

공작은 휘아킨에게 무심하며, 그의 편이 아니다.

그러니 이대로 거실로 나가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그 뒤에 공작저로 들어가서 전화부터 빌리든지, 아니면 차를 내 달라고 하든지 하자.

행동 방향을 정하자 애리얼은 급격하게 차분해졌다.

물에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내자 거울에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이 드러났다. 냉정해진 눈동자 속에는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히든 캐릭터라더니, 정말로 대단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애리얼은 수건을 대충 걸어 두고는 곧장 욕실을 나갔다. 복도를 지나 거실을 거쳐 현관문까지 일직선으로 향했다. 망설임 없이 더블 도어를 열어젖히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 누구의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다.

쉬웠다.

지금까지 그를 맹목적으로 믿으며 맹하게 굴었던 것이 그의 방심을 불렀을지도 몰랐다.

애리얼은 제비꽃이 가득한 별관의 정원 너머 높은 첨탑이 보이는 본관으로 직진했다.

해는 중천이었고, 휘아킨은 아카데미에서 한창 수업을 들을 시간이었다. 그는 애리얼이 백작저에 도착하고 난 뒤에나 별관으로 돌아올 것이다.

애리얼은 오늘 이후로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데본시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오싹한 인간이었다. 마주하면 계획이고 뭐고 전부 어그러질 것 같았다. 이미 반 정도는 그렇게 되었다.

차라리 렉시우스와 있을 때가 나았다.

감시당하고 휴대폰을 빼앗겼어도 정신만은 멀쩡했으니까.

분노한 발걸음에 제비꽃이 사정없이 짓밟혔다.

화가 나 성큼성큼 빠르게 발을 뻗던 애리얼은 문득 기시감을 느끼며 멈추었다.

제비꽃은 별관 주변에만 피어 있었다. 그 범위가 5m는 될까. 그리 넓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런데 그녀는 거의 십 분째 걸으면서 계속 제비꽃을 밟고 있었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애리얼은 한기를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삼각형 모양의 포치가 있는 하얀 별관, 더블 도어가 보였다. 고작 몇 걸음 뒤에.

못해도 몇십 미터는 멀어졌어야 할 별관이 그녀의 바로 뒤에 있었다.

애리얼의 두 눈동자가 파르르 진동했다.

진정해야 한다.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애리얼은 애써 얻은 차분함을 잃어 가고 있었다. 같은 곳을 뱅뱅 돌게 될 것을 알면서도 미친 듯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뛰어도 뛰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본관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

“왜!!!”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치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애리얼은 제비꽃을 쥐어뜯으며 악을 썼다. 믿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도 믿어선 안 됐다. 이곳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스스로 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는데, 왜 도움을 바라서 손을 잡았을까. 헛된 희망을 품었을까.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서러움이 북받쳤다. 집에, 집에 가고 싶다. 이 세계가 아닌 진짜 집. 진짜 가족이 있을 그곳으로, 가고 싶다.

아무도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 곳으로, 제가 별것 아닌 곳으로 가고 싶다.

‘가서 평범하게 살고 싶어…….’

애리얼은 오열하며 울다가 제비꽃이 핀 잔디밭에 쓰러져 웅크렸다.

눈을 꼭 감고서 현실을 외면했다.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뜨면 긴 악몽에서 깨어나길.

하지만 이 세계는 그녀에게 찰나의 도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바스락, 바스락.

잔디를 밟으며 누군가 다가왔다.

웅크린 그녀의 곁으로 와서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선배님.”

부드러운 미성. 이제는 끔찍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다정한 손길로 헝클어진 흑발을 쓸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애리얼은 소스라치며 제 얼굴에 닿은 손을 쳐 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휘아킨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놀랍게도 블랑셰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하의 공자인 본모습으로 검은색의 아카데미 남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본래 신분으로 다녔던 건가. 언제부터?

의문이 들었으나 금세 흥미가 식었다.

애리얼은 무표정해졌다.

이 시간에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여기에 있는가는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지금 여기 나타남으로써 명확해진 사실이 하나 있었다.

휘아킨은 별관에 온갖 장치를 설치해 두고 자신을 가둬 두었다. 감시하지 않는 척 감시를 지속해 왔다. 그러니 제가 별관을 나가려 하자마자 이렇게 돌아왔겠지.

히든 캐릭터라는 명칭에 휘둘려 그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

애리얼은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백작저로 돌아갈 거야. 차를 준비해 줘.”

격앙된 표정과는 다르게 냉정하며 고저 없는 말투였다.

애리얼은 이 지경에 와서도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달력에 표시하는 걸 잊지 않은 덕분에 아주 늦어 버리기 전에 이 사태를 알아차렸다.

한번 눈물을 쏟고 났더니 평정을 조금 되찾았다.

기회가 있으니 다음을 노려야 한다.

휘아킨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애리얼은 무표정해진 얼굴로 협박했다.

“안 그러면 널 패서라도 여길 벗어날 거야.”

빈말이 아니라는 듯 애리얼은 마력을 방사하며 그를 쏘아보았다. 파지지직, 제비꽃을 스치며 검푸른 마력이 일렁거렸다.

휘아킨은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낮고 음습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진짜로 저랑 싸우시게요?”

애리얼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걸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 터다.

그녀의 의사를 정확히 알아들었음에도 휘아킨은 여유로웠다. 동요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선배님을 보내 드릴 수는 없어요. 선배님이랑 싸우기도 싫어요.”

그는 마치 달래는 듯한 투였다. 성이 난 아이에게 폭력은 안 된다고 타이르는 것 같았다.

애리얼은 그가 가증스러워서 손이 떨렸다. 손가락을 말아 쥐고 이를 꽉 물었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냥 여기서 지내면 안 돼요?”

“…….”

“제가 잘해 줄게요.”

“미친 새끼.”

애리얼은 데본시아에게도 하지 않았던 욕설을 그의 면상에 대고 내뱉었다.

그가 혐오스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