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전에서 욕설을 듣고도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되레 손까지 내밀며 기껍다는 듯 굴었다.
“일단은 들어가서 얘기해요.”
애리얼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그의 손을 세게 쳐 내며 잔디밭에서 일어났다. 그를 주시하며 천천히 손안에 마력을 응집시켰다. 마력을 어떻게 쏘아 맞혀야 그가 기절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마저증이니 제가 사력을 다했다간 죽어 버릴 것이다.
애리얼은 살인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를 그 정도로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냥 평생 얼굴을 안 보고 사는 정도면 된다.
어차피 이 세계를 떠나면 다시는 만날 일도 없다.
한 걸음, 두 걸음, 그와의 거리를 벌리면서 애리얼은 마력을 적당한 크기로 응축했다.
휘아킨은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천천히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선배님은 나 못 이겨요.”
그의 말에 애리얼은 딱딱하게 대꾸했다.
“아리앨라 백작님이라면 몰라도 넌 이겨.”
그는 마저증이다. 마력이 없는 이를 자신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애리얼은 제가 상당히 특출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솔렘 공작저와 아카데미의 시험을 거치며 규격 외의 파괴력을 스스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별관을 통째로 날릴 수도 있다.
그도 알기는 아는지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선배님이 강한 건 인정해요.”
“그러니까 적당히 하고…….”
“마력량은 좀 앞설 수도 있겠죠. 근데 응용력이나 지식, 술식의 정교함, 다룰 수 있는 술식의 종류, 순발력에서 전부 차이가 나잖아요.”
휘아킨은 애리얼의 말을 끊어 내며 괴상한 소리를 했다.
말의 첫머리부터 기괴했다.
‘마력량이 좀 앞서다니?’
애리얼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의 마력량은 아리앨라가 감탄할 정도였다. 어지간한 마력량을 지닌 고위 마법사들도 기피하는 총을 마도구로 사용하는 수준인데, 마저증인 그보다 마력량이 좀 앞선다고?
황당했다.
‘그냥 말을 돌리는 건가…….’
애리얼은 그와 말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만 원했다. 그녀는 손안에 알맞게 모인 마력탄을 쏘았다.
성글게 응축해 푸른빛이 더 강하게 도는 검푸른 마력탄이 휘아킨의 명치를 향해 날아갔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손을 휙 휘둘렀다. 그의 손에 닿은 마력탄이 픽 터졌다. 파지직, 작은 스파크를 만들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애리얼은 낯을 굳혔다. 렉시우스에게 마력탄을 쏘았을 때와 비슷한 기시감을 느꼈다.
휘아킨은 분명 렉시우스와 같은 방식으로 마력을 방사해서 마력탄을 막았다. 마도구나 미리 걸려 있던 방어술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체내의 마력을 방사해서 더 약한 마력을 지웠다.
마저증일 텐데.
“어떻게…….”
놀라 중얼거리던 애리얼의 눈에 마력탄을 튕겨 낸 그의 오른손이 담겼다. 검지와 약지에 은색의 평반지가 끼워져 있는 게 보였다.
휘아킨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평반지를 낀 검지를 세우고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떻게 얻은 건지는 안 알려 줄 거예요.”
놀리듯이 말한 그가 당황한 애리얼을 향해 환각술을 날렸다. 고위 술식 중에서도 몹시 복잡하고 어렵기로 정평이 난 마법이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빛 무리가 애리얼에게 쏘아졌다.
데본시아가 주었던 브레이슬릿 탓에 마력의 불균형이 심각한 애리얼은 환각술에 대처하지 못했다. 반응은 했으나 방어술답지도 못한 미약한 마법을 쓰다가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었다.
휘아킨은 빠르게 이동해서 뒤로 넘어가는 애리얼을 붙잡아 품에 안았다.
환각술은 상대의 오감을 조절하고 다양한 병증을 일으켰다. 세뇌와 조종에 쓰이며, 심하면 한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할 수도 있었다. 반면 상냥하게만 사용하면 상대를 조용히 잠들게 하거나 고통을 지워 줄 수 있었다.
보통은 물건 같은 데 술식을 묻혀 놓고 접촉하면 발동되는 식이었다.
휘아킨의 경우에는 찻잔에 주로 술식을 걸어 두었다. 차를 마시기 위해 입술을 대면 수면제와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이성과 의심을 흐리는 건 덤이었다.
“선배님, 또 제가 내려 준 차를 안 마셨죠?”
휘아킨은 곤히 잠든 애리얼의 볼을 콕 찔렀다. 환각술에 직격당한 그녀는 미동도 없이 그에게 안겨 있었다.
혹시 몰라서 달력과 수화기에도 걸어 두었는데, 술식의 강도가 조금 모자랐던 모양이다.
‘차라리 별관 전체에 환각술을 걸까?’
그 정도면 아무리 황태자의 마력이라도 한계에 달하려나.
휘아킨은 잠시 고민하다가 애리얼을 데리고서 별관으로 들어갔다.
***
애리얼은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눈을 떴다.
베이지색 벽지에 큰 장식이 없는 가구 몇 개가 시야를 채웠다. 끔찍하게도 그녀는 여전히 공작저의 별관 안에 있었다.
절망감에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더 주무실래요?”
머리맡에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울렸다.
애리얼은 눈을 부릅뜨고 몸을 일으켰다.
휘아킨은 의자에 앉아 그녀의 침대 옆을 지키고 있었다. 옷은 간편한 스웨터 차림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여느 때와 같은 상냥한 얼굴을 보자 애리얼은 구역감이 일었다.
“왜 이러는 거야.”
“다 말해요?”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애리얼은 그와 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를 무시한 채 백작저로 돌아가서 스카이라의 선물을 준비하고 대책을 세우고 싶었다.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그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환각술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그녀는 방어술에 내성이 없었고, 그만큼 환각술에 취약했다. 이번에 환각술을 당하면 내년에나 정신을 차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정면승부보다는 차라리 대화를 나누는 척 빈틈을 노리는 게 나았다.
“말해. 왜 그랬는지.”
애리얼이 허락하자, 그는 말을 고르는 듯 눈을 내리깔고서 눈동자를 스륵스륵 굴렸다.
“저는 살면서 별로 즐거운 일이 없었거든요. 높은 계급과 재력을 지니고 태어났는데도 마저증이라는 저주받은 체질 때문에 늘 무시받으며 살았어요. 높은 계급 탓에 오히려 취급이 더 안 좋았죠. 무하 공작가의 외동아들이 마저증이라니, 마력을 못 쓴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 사교계에 가면 사생아들마저 제 처지를 비웃을 정도였어요.”
예전에 들었으면 안타깝게 여겼을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감금에 환각술까지 당한 지금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휘아킨은 무표정한 애리얼을 슬쩍 살피더니 말을 이어 갔다.
“어머니는 제 체질을 창피해하시다가 제 존재까지도 창피하게 여기시게 됐어요. 무하 공작가에 역사적으로 마력을 타고 태어나지 않은 인간은 없었거든요. 공작가에서도 마법 협회에서도 마법사 연합에서도 저는 부정한 존재로 여겨졌어요.”
자신과 무관한 이의 삶을 읊듯이 건조한 말투였다. 그 스스로도 제 과거를 딱히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저를 포기하지 못하셨어요. 어떻게든 마법사로 교육하고 싶어 하셨죠. 근데 무하 공작가의 공자가 마저증이라면 쪽팔리니까, 위장을 하게 했어요. 외관, 지위, 이름, 거기에 성별까지. 아예 저라는 존재를 지우고 싶은 것처럼 철저하게 구셨어요.”
블랑셰 멜로르가 탄생하게 된 경위였다.
“위장에 쓰는 마도구는 꽤 고통스러워서 저는 위장이 싫었어요. 그래도 위장하지 않으면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싫어도 했죠. 억울해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내가 이 꼴로 태어난 탓이니까 다 내 잘못이다.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어머니도 그러시니까, 딱히 반박하지도 못했어요. 공감하지는 않았는데…… 어디 말할 데도 없고, 혼자 삭여야 했죠.”
“…….”
“처음엔 힘들었는데 그래도 익숙해지니까 괜찮더라고요. 감정이 무뎌진다고 해야 하나…….”
그쯤 말하고 휘아킨은 애리얼을 흘긋 살폈다.
애리얼은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는 실망한 듯 한숨을 쉬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내 삶은 이 모양이구나, 하고 적응했을 때쯤 선배님을 만났어요.”
***
“황립 아카데미로 가거라.”
간만에 아들을 부른 공작은 고작 그 말만 통보했다.
휘아킨 역시 대화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라면 가는 거고, 말라면 마는 거였다. 그의 의사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제 앞에 놓인 황립 아카데미와 관련된 서류를 무감한 눈으로 훑었다.
황립 아카데미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모인다는 곳이었다.
지금 다니는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그가 더 높은 곳으로 가길 원했다. 애정도 없으면서 그가 가장 최고의 지식을 익히길 원했다.
‘거기 가면 괴롭힘이 더 심해지려나.’
그런 생각만 잠깐 했다.
괴롭히는 건 기정사실일 테니 조금 덜 심한 곳이기만 하면 좋을 텐데.
지금 다니는 아카데미에는 뺨을 갈겨 대는 자식들이 너무 많았다. 맞으면 위장용 마도구가 자극을 받아서 고통이 심해지니 그만해 줬으면 좋겠는데. 차라리 물을 맞겠다고 한들 듣는 인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거.”
무하 공작이 검은색 상자를 내밀었다.
“새로운 위장 도구다.”
휘아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자를 열었다. 마름모 모양의 이어링이 들어 있었다. 목과 양 손목에 착용해야 하는 지금의 위장 도구보다는 훨씬 간편해 보였다.
“너는 편입생이 될 거다.”
공작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서류에 고정된 그녀의 눈은 단 한 번도 그를 보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휘아킨은 별 감흥 없이 필요한 서류와 위장 도구를 챙겨서 나갔다.
그렇게 편입하고서 일 년간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황립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이전 아카데미생들처럼 그를 괴롭혔다. 그래도 뺨을 치는 대신 물을 쏟고 말로 모욕하는 쪽이라 차라리 나았다.
위장용 마도구가 이전보다 훨씬 편해져서 그걸로 만족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수석을 차지했고, 여전히 멸시와 욕을 먹고 다녔다.
중간에 클라우스 백작이 공작저로 웬 여자애를 데려와서 놀랐었지만, 그게 다였다. 굉장히 예쁘장한 애였으나 기억에 오래 남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 애는 다시 오지 않았고, 그도 그 일을 잊었다.
늘 살던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줄 알았다.
새 학기가 되어 처음으로 룸메이트를 가지기 전까지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