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아킨은 홀로 방을 쓰다가 룸메이트가 온다는 소식에 눈살을 찌푸렸다.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탓에 그와 방을 쓰고 싶어 하는 이가 없어 그는 늘 독실을 썼다. 그도 귀족이고 그를 싫어하는 이들도 다 귀족이니 은연중에 허락되는 어리광이었다.
그런데 그 어리광이 오늘로 거부되었다. 웬 변태 같은 인간이 저와 같은 방을 쓰면서 온종일 괴롭힐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기숙사 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추한 변태일지 상상하며 들어간 그의 눈앞에는 그의 예상을 한참 빗나가는 인물이 서 있었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모인 새하얀 얼굴이 그를 향했다. 흑연을 닮은 검고 연한 눈동자가 신비로운 감상을 자아냈다. 조금이라도 이성을 놓으면 홀려 버릴 것 같았다.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뭔가.
‘너무…… 예쁘게 생겼는데.’
그러면서도 묘하게 본 듯한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안녕하세요?”
그 애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아카데미에 다닌 이래 처음 받는 공손한 인사였다. 심지어 이 애는 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반응에 당황하여 그는 다소 어그러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네, 안녕하세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혼자 써서 좋았는데…….”
대놓고 시비를 거는 듯한 혼잣말도 추가했다.
그러고서는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휘아킨은 그녀의 조심스러움이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적당히 성질 긁는 말을 던졌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겠지. 마저증인 주제에 기분 더럽게 군다면 따귀가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차라리 한 대 시원하게 맞고 독방을 쓰고 싶었다.
“미안해요.”
따귀를 예상한 그의 앞에 일평생 생소하게 여긴 말이 날아왔다.
미안해요. 미안.
무례하게 군 건 그인데 그녀가 사과를 했다.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그보다 한 학년 위였다.
“아, 아니에요! 제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휘아킨은 허둥지둥 바보처럼 더듬거렸다.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사과도 제대로 안 했다.
엉망이었다.
그냥 넘어가고 인사부터 하자. 그는 그런 생각으로 이름을 물었다.
그녀는 제 이름을 애리얼 허클리라고 말했다.
그제야 휘아킨은 그녀를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해 냈다. 아리앨라가 데려온 예쁘장한 여자애였다.
설마하니 룸메이트로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달라질 건 없겠거니 싶었다.
지금은 상냥하지만, 애리얼 허클리도 곧 괴롭힘에 가담하거나 방관자가 될 것이다.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
애리얼 허클리와 같은 방을 쓰게 된 후 휘아킨은 전보다 불편해졌다.
여자로 위장하고는 있으나 그의 속은 청소년기 남자였다. 마도구 덕에 감정이 억제되어서 그녀가 대단히 의식되지는 않았으나, 같은 방을 쓰는 건 역시 껄끄러웠다.
그녀가 여전히 제게 친절한 탓에 막 대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밤이 되면 공작저로 향해서 잠을 자고, 아침에 다시 아카데미로 왔다.
자연히 피로가 누적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상냥했으나 그를 불편해하기도 했다.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짜증이 났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 위선을 떨 건지.
빨리 그녀가 저를 거부하며 내쫓든지, 또는 그녀 스스로가 함께 못 쓰겠다며 뛰쳐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애리얼 허클리와 엮이고 나서 주변 인간들의 괴롭힘이 더 심해진 차였다.
양동이에 든 물을 뿌리는 데 그치던 괴롭힘이 이제는 호수에 그를 처박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그는 진심으로 피곤했고, 짜증이 난 상태였다.
기숙사 방으로 걸어가는 걸음에 피로가 묻어났다.
‘진짜 좀 쉬고 싶은데.’
복도로 가는 길에 괴롭히는 놈들과 방관자들이 죄 몰려 있었다.
생일도 아닌데 생일이라며 아가리를 털어 댔다. 좀 새로운 레퍼토리는 없나.
그는 창의성도 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멸시를 들으며 시큰둥하게 있었다. 뭐라고 모욕하든 그는 무감했다. 구정물을 뿌려도 수치를 몰랐다. 괴롭힘에 너무 무뎌졌다. 새삼 반응할 필요가 있나. 누가 어떤 시선을 뿌려도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분명 그럴 터였는데, 복도에 애리얼 허클리가 나타나자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이런 꼴을 보이기 싫었다. 왜인지 모르게 창피했다.
좀 잘난 모습일 때 나타나면 안 되는 건지…….
휘아킨은 그녀에게 교사 동 1관으로 가서 제 이름이 제일 위에 올라간 성적표나 보라고 외치고 싶었다. 제발 좀 여기 오지 말고.
“선배님.”
그는 그녀를 만류하기 위해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녀가 저를 경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욕이나 멸시를 던지겠지. 어쩌면 동정을 보일지도 모르고.
그의 예상은 그랬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미안해.”
이 복도에서 가장 그에게 잘못한 게 없는 그녀가, 그에게 사과했다.
또.
황당했다.
그 뒤에 이어진 말들은 더욱 황당했다.
“이러려고 아카데미에 다니십니까?”
“저는 블랑셰에게 무도하게 구는 무리를 간과할 생각이 없어요.”
“오늘과 같은 일이 재차 반복된다면, 그때는 경고성 발언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그를 괴롭히는 무리를 추궁하고, 협박하고, 그를 감쌌다.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그를 괴롭히는 이도, 방관자도 되지 않았다.
얼얼한 충격이 그를 강타했다.
난생처음으로 그를 탓하지 않는 이였다. 오히려 그의 편이 되어 그를 괴롭히는 이들에게 화를 냈다.
누군가 저를 향해 화내는 것만 겪었는데. 누군가 저를 위해 화를 내 주다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심장이 희열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간 무감하게 넘겼던 것들이 돌연히 억울함이 되어 쏟아지고, 그녀의 분노로 인해 해소되었다.
짜릿했다.
그 순간의 감정이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그는 또 한 번 괴롭힘을 받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또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모욕을 받고 있으면 그녀가 나타나 주지 않을까.
아마도 그러겠지.
이상하게도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일평생 처음으로 가져 본 제대로 된 대화 상대였고, 친구였으며, 제 아군이었다.
휘아킨은 애리얼 허클리라는 룸메이트를 가지고서 온갖 감정을 누렸다. 무채색이던 일상에 불이 질러진 것 같았다. 붉은 불꽃이 활활 타올라 온 마음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그녀와 함께하는 순간들은 전부 중독적이고, 황홀했다.
그래서 그녀와 계속 함께하고 싶었다.
누구도 이런 감정이 들게 하지 않았는데.
무의식의 아래 숨어 있던 오랜 결핍이 그녀를 만나 미쳐 날뛰었다.
애리얼 허클리는 그에게 구원이었고, 그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
휘아킨은 그렇게 애리얼 허클리를 원하게 되었다.
***
“선배님, 저는 선배님과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아카데미에서처럼요.”
“…….”
“유일한 구원을 놓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휘아킨이 다정하게 웃었다.
“아프게 할 일은 없어요. 원하는 건 대부분 들어드릴 거고요. 선배님이 싫어하는 사람들은 다 막아 드릴게요. 선배님도 그 인간들보다는 저랑 있는 게 더 낫잖아요.”
회유하는 말이 소름 끼쳤다.
애리얼은 그의 애정이 끔찍했다.
그는 저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해 놓고, 정작 자신에게는 절망만 선사했다.
하지만 애리얼은 그에게 제 감정을 토로하며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휘아킨의 하트는 세 개 반이지만 그의 애정은 심하게 비틀려서 다섯 개 반인 렉시우스 못지않았다.
자극해서 될 상대가 아니었다.
애리얼은 당장 탈출할 생각을 버렸다. 천천히 그를 구슬리며 시간을 벌고, 스카이라에게 선물만 전할 수 있으면 된다. 그렇게 타협하고 입을 열었다.
“알았어, 네 곁에 있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휘아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무슨 조건을 걸지도 안다는 듯 눈썹을 치키며 지루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기색에도 애리얼은 주눅 들지 않고 제 조건을 말했다. 원하는 건 대부분 들어준다지 않았는가. 나간다고 말하지만 않으면 다른 건 들어줄 것 같았다.
“곧 황자님의 생신이셔. 그것만 챙기게 해 줘. 전에 선물을 받았는데, 나도 보답하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나니까…….”
“그거 이미 지났어요, 선배님.”
구구절절 길어지던 말을 그가 툭 끊었다.
애리얼은 뭐가 지났다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황자님 생일이요. 벌써 지났다고요.”
그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애리얼은 당황스러웠다. 오늘은 11월 1일인데, 그의 생일까지는 열흘이나 남았는데.
“왜? 아직 십일월 초잖아!”
혼란에 빠진 애리얼이 목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
아니다. 스카이라의 생일이 지났을 리가 없다.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도 달력에 표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매일매일 날짜를 헤아렸다. 그러니 지났을 리가 없다. 주먹 쥔 손이 덜덜 떨렸고, 호흡은 씨근거렸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휘아킨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스르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달력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죠?”
“……내가 매일 표시했어. 오늘은 십일 월 일 일이야.”
“네, 뭐. 달력에 따르면 그렇죠.”
그가 한발 물러나 인정했다.
그의 태도에 애리얼은 희망을 붙잡았다. 휘아킨은 저를 흔들려고 저러는 것뿐이다. 그렇게 여겼다.
“그러니까 아직 시간이 있잖아. 황자 저하의 생신을 챙기게만 해 줘.”
분노도 누그러뜨리며 간절히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조금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애리얼을 보았다.
“선배님, 혹시 제가 시작 날짜를 잘못 알려 줬다는 생각은 안 해요?”
휘아킨이 던진 말에 애리얼은 멍하니 표정이 비어 버렸다. 왜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을까.
히든 캐릭터라고 신경 쓰지 않았던 그의 프로필 창, 가장 아래 줄이 떠오른다.
『*거짓말에 주의』
처음부터 휘아킨이 하는 말을 믿어선 안 됐다.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평반지를 낀 손을 휘둘렀다. 별채를 두르고 있던 미로 결계가 사라지며 창밖의 풍경이 변했다. 온통 새하얀 정원이 보였다. 눈이 오고 있었다.
“사실 처음 선배님께 달력을 준 날에 이미 십일월이었거든요.”
휘아킨이 충격으로 굳은 애리얼에게 친절하게 진실을 알렸다.
“지금은 십이월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