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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21)화 (209/264)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녀의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12월.

스카이라의 생일은 지나 버렸고, 특별 엔딩까지는 고작 한 달이 남았다. 그녀가 이 빌어먹을 별관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에…….

“오늘이 며칠인지 말해.”

애리얼은 주먹을 말아 쥐고서 진실을 요구했다. 싸늘한 눈빛이 휘아킨의 얼굴을 꿰뚫었다.

처음 마주하는 그녀의 차가운 모습에 그는 가늘게 떨었다. 황태자, 황자, 대공자, 솔렘 공자…… 그 누구도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으리라. 휘아킨은 희열로 뺨을 붉히고서 수줍게 대답했다.

“십이 월 십오 일이에요.”

“십이 월 십오 일.”

애리얼은 그가 말한 날짜를 발음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카데미가 휴학기를 맞고도 일주일은 족히 지난 날짜였다. 그런데 휘아킨은 오늘까지도 아카데미에 나가는 척을 했다. 저를 속이기 위해서 몇 주째.

아니, 몇 달째.

마법을 못 쓰는 척 아리앨라까지 대동해 대공저에 나타났던 순간부터. 그때부터 그는 이 짓을 계획한 거였다.

소름 끼치는 집념이었다. 고작 하트 세 개 반짜리의 호감도로 보인 행동이라기엔 너무…….

“선배님, 많이 화났어요?”

휘아킨이 잔뜩 인상을 쓴 그녀를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일부러 성질을 긁으려고 하는 짓인가.

애리얼은 이제 그의 무엇도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새롭게 뱉은 날짜마저도 의심스러웠다.

휘아킨 무하의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

“내가 화난 것 같아서 걱정되면, 오늘이 십이 월 십오 일이라는 걸 증명해 봐.”

“알았어요.”

애리얼의 요구에 휘아킨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뻔뻔한 낯짝에는 선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근데, 제가 뭘 하면 제 말이 진짜라는 걸 믿으실래요?”

“…….”

“지금 선배님은 제가 뭘 해도 안 믿으실 거 같은데.”

“그럼 공작저 본관으로 가. 내가 무하 공작 서하께 직접 날짜를 물을 테니까.”

애리얼이 공작을 언급하자 휘아킨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거면 돼요?”

“그걸로 됐다고 하지 않았어. 일단 가서 물은 다음에 판단할 거야.”

“알았어요.”

애리얼의 단호한 모습에 휘아킨은 한발 물러서듯 수긍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추스르고 머리도 조금 식히고 나와요. 바로 공작님께 데려가 드릴게요.”

조용하게 말을 전한 그는 잠시 애리얼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애리얼은 흐느끼듯 숨을 뱉어 냈다. 사납게 힘을 줬던 표정이 무너지며 나약한 본심이 새어 나왔다. 화가 나고 억울하다가도 이렇게나 쉽게 그를 믿어 버린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시트를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격해진 호흡이 조금씩 수그러들 즈음에 침대에서 나와 매무새를 정리했다. 더 한심스러운 꼴을 당하기 전에 수습해야 한다.

문을 열고 나가자 벽에 기대 있던 휘아킨이 다가왔다.

“울었어요?”

걱정하는 척 묻는 말에 애리얼은 고개를 저으며 앞장섰다.

더블 도어를 열자 한기가 밀려왔다. 애리얼은 개의치 않고 눈이 내리는 밖으로 나섰다. 겉옷을 걸치지 않은 원피스 차림이었던 탓에 몸이 떨렸다.

휘아킨이 애리얼의 어깨에 케이프를 걸쳐 주며 급히 따라붙었다.

“제가 미운 건 알겠는데요. 그래도 몸은 챙기세요.”

조곤조곤 건네는 말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애리얼은 그를 무시하고 걸었다. 다만 케이프는 고맙게 움켜쥐었다. 그의 말대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짓은 미련한 행동이니까. 그녀는 케이프로 몸을 감싸고서 눈 쌓인 정원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본관에 다다르자 기사들이 나서서 문을 열었다. 이미 이야기가 된 듯 보였다.

줄곧 애리얼의 뒤를 따라가던 휘아킨이 앞으로 나왔다.

“공작님께선?”

“집무실 옆의 응접실에서 기다리시겠다고, 공녀님만 올려 보내라 하셨습니다.”

휘아킨은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이 무슨 의도로 저를 배제하려 하는지 쉬이 읽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그녀를 보내도 괜찮을까.

그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애리얼이 곧장 앞으로 나섰다.

“공작 서하가 계신 응접실은 몇 층이지?”

“선배님.”

휘아킨이 만류하듯 불렀으나 애리얼은 무시했다. 기사를 똑바로 응시한 채 재차 응접실의 위치만 물었다.

“몇 층이지?”

“……3층입니다.”

기사가 딱딱하게 답변했다.

애리얼은 원하던 정보를 얻자마자 바로 계단으로 향했다.

휘아킨이 빠르게 쫓아와 그녀를 앞질렀다. 애리얼이 선 계단의 한 칸 위에서 벽을 짚고서 앞을 막았다.

“선배님.”

“공작 서하를 만나러 가야 하니 비켜 주세요, 공자님.”

애리얼은 존댓말로 그를 대했다. 그가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낯을 굳혔다.

“절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마세요.”

“여긴 공작저의 본관이에요.”

“그래서요?”

“공작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야 하는 제 처지를 이해해 주세요.”

그러니 적당히 의심 살 짓은 하지 말고 피차 예의 지키며 굴자고, 애리얼은 넌지시 전했다.

그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저와 거리를 두듯 구는 그녀를 참을 수가 없었다.

“공작가의 공자인 제가 허락할 테니까, 그런 말투는 하지 말아요.”

“…….”

“그리고 공작님을 너무 믿지는 마세요.”

억지로 고집을 부리는 투는 아니었다. 애리얼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길을 터 주었다. 따라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애리얼은 층계를 올라 3층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지키고 있던 하녀가 애리얼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검은색의 더블 도어가 열리고 그 안에 있던 공작이 애리얼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허클리 공녀.”

무하 공작이 소파에 앉아 인사를 건넸다. 마법사를 존중하는 그녀답게 예의를 갖춘 존댓말이었다.

“대면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하 공작 서하.”

애리얼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응접실에는 무하 공작뿐이었다.

애리얼은 먼저 입을 열어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했다. 다짜고짜 오늘이 며칠인지 물어도 되는 것일까.

망설이는 그녀의 앞으로 코발트색의 찻잔이 나타나 놓였다. 주홍색의 홍차가 감미로운 향기를 풍겼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구역감을 느끼고 몸을 물렸다. 휘아킨이 주던 캐모마일이 담긴 찻잔이 떠올라서였다.

“환각술에 당했나요?”

공작이 차분하게 물었다.

애리얼은 찻잔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공작을 보았다. 공작은 철저한 관찰자의 시선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켰다.

공작이 찻잔을 건넨 건 으레 하는 손님맞이용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애리얼이 찻잔에 거부 반응을 내비쳤다. 마법과 마력에 통달하다시피 한 공작은 애리얼의 짧은 거부 반응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날카롭게 포착하여 그녀가 당했을 마법의 종류를 곧장 유추해 냈다.

애리얼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여 환각술에 당했음을 시인했다.

“그렇군요.”

무하 공작은 무심한 표정이었다.

애리얼은 공작의 건조한 반응에 차오르는 불안을 억눌렀다.

무하 공작은 대공비와 다르다. 그녀는 제 아들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자기 아들이 뭘 하는지 관심 자체가 없었을 확률이 커.’

공작은 그저 애리얼이 보인 거부 반응에 흥미를 느끼고 질문을 던진 것뿐이다.

“누가 그랬습니까?”

공작이 물었다.

그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저런 것을 묻는 걸까. 그렇다면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제 아들에게 무심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제 아들이 마저증이기 때문이겠지.

애리얼은 휘아킨의 입으로 들은 이야기를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공작에 관한 일만큼은 사실이라 여겼다. 뛰어난 마법사인 공작은 저보다 한참 아래 계급인 애리얼에게 존댓말을 할 정도로 마법사를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제 핏줄임에도 마법을 쓰지 못하는 휘아킨을 창피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렇다면 아들인 휘아킨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여기서 환각술을 휘아킨에게 당했다고 말하면 공작은 제 아들을 아끼게 될까? 더 나아가 협조하게 될까?

애리얼은 사실을 말하는 건 위험하다고 느꼈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더 묻지 않겠습니다.”

공작은 애리얼의 의사를 존중했다. 그녀는 미련 없이 주제를 돌렸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무슨 용건인가요.”

애리얼은 그녀의 물음에 잠시 침묵했다. 휘아킨에게는 날짜를 물으러 간다고 했지만, 막상 이 순간이 오니 도움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법사에게 우호적인 공작이 제게 우호적일 것 역시 자명했으니까.

“공작 서하, 혹시 순간 이동을 두 번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애리얼이 침착하게 본론을 꺼냈다.

공작은 다소 의아하다는 듯 애리얼을 보았다.

“공녀는 순간 이동을 쓰지 못하나요?”

“네. 아직 순간 이동은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 마력 수준이면 대강은 익힐 수 있었을 텐데요.”

“제가 마력이 불균형해서 특정 마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합니다.”

순간 이동은 마력을 응집하여 방출한 뒤 남김없이 흡수하는 식으로 운용해야 했다. 마력의 흡수를 수행하는 데 큰 장애가 있는 애리얼은 순간 이동을 쓸 수 없었다.

공작에게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애리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작은 뛰어난 마법사를 귀하게 대했고, 애리얼에게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를 걸고 좋게 보았던 애리얼이 사실은 하자가 있다니. 실망한 공작이 태도를 바꿀지도 몰랐다. 냉랭하게 애리얼을 쫓아내 버릴지도 모른다. 공작은 마저증이라는 하자를 지닌 제 아들을 가차 없이 무시하고 학대한 인간이니까.

애리얼은 어느 정도 그녀의 태도가 변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각오와는 상반되게 공작은 별로 실망한 티를 내지 않았다.

“공녀가 가진 마력의 불균형은 아리앨라에게서 대충은 들었습니다. 아직 극복하지 못했나 보군요.”

“…….”

“그건 공녀에게 좋은 선생이 없었다는 뜻이겠죠.”

공작은 꽤 상냥한 투였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운 쪽이었으나 애리얼을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유했다.

이건 좋은 징조였다.

애리얼은 공작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공작이 제 마력 상태를 알고 있는 것도 놀랍지 않았고, 좋은 선생이 없었다는 것도 틀리지는 않았으니까.

“순간 이동, 두 번이라고 했죠?”

“네.”

“공녀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대가도 받지 않겠어요. 무하 공작가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재목들을 아낌없이 지원하니까요.”

공작은 흔쾌히 수락했다. 애리얼이 각오한 것에 비해 심각하게도 손쉬운 수락이었다.

무하 공작이 재능 있는 마법사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리앨라가 마력과 마법에 보이는 집착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서 마저증인 휘아킨에겐 그토록 차가웠을까.

애리얼은 제게 이토록 친절한 공작이 휘아킨에겐 무척이나 비정한 어머니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내 그 끔찍함을 지워 버렸다. 휘아킨을 동정하기엔 그에게 당한 짓이 가볍지 않았고, 무하 공작을 비난하기엔 그녀의 도움을 구걸하는 처지였다.

애리얼은 공작을 감히 판단할 주제가 못 되었다. 공작을 향해 고개만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서하.”

공작은 바닥을 향해 머리를 숙일 기세인 그녀를 향해 작은 한숨을 쉬었다.

“다만 공녀는 아카데미 졸업 후 무하 공작가로 들어오셨으면 합니다. 아카데미는 아마 공녀의 마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겁니다.”

공작은 방대한 마력을 지닌 인재가 이런 상태에 빠진 것이 안타까운 듯했다.

애리얼은 휘아킨이 있을 공작저로 들어오는 것이 극도로 싫었으나 공작의 제안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큰 기회를 얻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개를 들고서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특별 엔딩을 이루고 나면 이 세계에 남아있을 일은 없었으니까.

“아뇨, 공녀와 같은 뛰어난 마법사를 직접 길러 낼 수 있어서 기쁩니다.”

공작이 소파에서 일어나 애리얼에게 손을 뻗었다.

“어디로 먼저 이동하면 좋겠습니까?”

애리얼은 제 앞으로 다가온 그녀의 손을 붙잡기 전에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실례지만, 오늘이 며칠인가요?”

“십이 월 십오 일입니다.”

휘아킨이 알려 주었던 것과 같은 날짜였다.

애리얼의 속이 폭풍이라도 머금은 듯 심란하게 휘몰아쳤다.

데본시아의 생일, 그리고 특별 엔딩이 이루어질 제 생일이 지척이었다. 한 달은커녕 이 주 남짓 남았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올해가 끝맺어지려고 한다.

허무하게 날린 기간이 도대체 며칠인가.

겨우 진정시켰던 호흡이 또다시 불안하게 어긋났다.

애리얼은 휘아킨을 향한 분노로 부들거리면서도 평정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시간이 있다. 기회가 남았다. 이를 꽉 깨물고 화를 삼켰다.

눈앞에 다가온 공작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허클리 백작저로 가 주세요.”

***

잠자코 3층 복도를 지키던 휘아킨은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것이 확연한 그의 시선이 응접실을 향해 돌아갔다. 그곳에서 강대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무하 공작. 어머니의 마력이었다.

그는 급하게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복도를 지키던 하녀와 기사가 그를 만류하려 쫓아왔으나 이미 문은 열린 후였다.

휘아킨은 어디론가 훌쩍 사라질 것 같은 애리얼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복도까지 뻗어 나왔던 무하 공작의 마력이 단번에 한곳으로 모여든다. 순간 이동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마력의 파동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직감한 그가 입을 벌렸다.

“선배님, 제가 못…….”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애리얼이 공작과 함께 모습을 감추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건 너무 처량하니까.

이런 말은 직접 상대의 눈앞에 대고 해 줘야지.

그는 오른손에 낀 평반지를 매만지며 순간 이동을 어디로 어느 타이밍에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일단 공작이 함께이면 귀찮을 테고, 그녀 혼자만 남는 순간이 좋겠지. 그러려면 공작이 공작저에 돌아온 다음이 적기다.

휘아킨은 메마른 표정으로 피식 비소를 흘렸다.

‘선배님, 제가 못 잡을 것 같아요?’

못 이은 말을 속으로 되뇌며 그는 천천히 응접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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