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으로의 이동은 아무리 무하 공작이더라도 허가가 필요했다. 다행히 공작의 지위 덕에 허가는 곧장 떨어졌지만, 이 방문 소식은 필시 데본시아의 귀에 들어갔으리라.
애리얼은 또 다른 감금의 가능성을 경계했다. 공략 대상 중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과 마주해야만 하는 상황이란…….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작 서하.”
다시금 기계적인 대화가 반복되었다.
애리얼은 백작저에 갔을 때와 달리 단단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조용히 공작의 손을 놓고서 카논이 챙겨 준 하얀 선물 상자를 쥐었다.
이왕이면 스카이라만 만나서 선물만 전하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불가피하게 데본시아까지 만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방문 허락을 내린 것이 다름 아닌 데본시아였기 때문에.
“용무가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공녀님.”
두 번의 장거리 순간 이동을 깔끔하게 마친 무하 공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네. 오늘 신세 졌습니다.”
애리얼이 허리를 숙이며 한 발 물러났다. 더는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공작은 예의상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황성 남관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애리얼은 계단 아래에 서서 멀어지는 공작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다가온 시녀가 애리얼을 맞았다. 데본시아의 전속 시녀로, 애리얼도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줘.”
애리얼은 시녀를 앞에 두고서 휴대폰을 꺼냈다. 중앙관으로 들어가서 데본시아와 스카이라를 만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휘아킨 무하’에 대한 개별 접근 알림을 설정하셨습니다.』
빠르게 손을 움직여 필요한 창을 누르고 화면을 껐다.
시녀가 묘한 시선으로 애리얼의 휴대폰을 관찰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휴대폰을 감추지 않았다. 데본시아는 이미 휴대폰에 관해 알고 있으니, 그의 시녀가 휴대폰을 그에게 보고하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안내를 부탁해.”
애리얼은 휴대폰을 겉옷 주머니에 넣고 시녀에게 다가갔다. 시녀는 능숙하게 시선을 갈무리하며 중앙관을 향해 앞장섰다.
중앙관이 가까워지자 애리얼은 손에 쥔 선물 상자를 어디론가 감추고 싶어졌다. 데본시아가 이걸 좋게 볼 것 같지가 않았다.
‘설마 빼앗지는 않겠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중앙관의 정문을 넘어 엄숙한 분위기의 복도로 진입했다.
시녀는 금장식이 붙은 하얀 더블 도어를 똑똑똑 두드렸다.
“황태자 전하, 계십니까?”
“십 분 뒤에 공녀만 들여보내.”
데본시아가 문 너머에서 명했다.
준비라도 하는 건가. 옷이라도 새로 입나.
평소 가운 차림으로도 애리얼을 맞던 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의아한 상황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시녀는 조금의 의문도 가지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문 앞에서 살짝 물러났다. 애리얼도 거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기에, 잠자코 기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십 분은 꽤 긴 시간이었다.
시녀는 겉옷의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정확히 십 분을 헤아리고 더블 도어를 열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공녀님.”
애리얼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방 안으로 향했다.
소파가 하나, 거대한 침대가 하나 있는 널따란 공간이 정적 속에서 그녀를 맞았다. 아카데미에 다니던 때 방문했었던 데본시아의 침실이었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황태자 전하?”
애리얼은 선물 상자를 뒤로 숨기며 조심스럽게 데본시아를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독하게 고요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소파도 침대도 비어 있었다.
십 분 기다린 뒤에 들어오라고 해 놓고서, 당황스럽게도 자리를 비운 건지.
‘대체 어딜 간 거야? 설마 숨어 있는 건……?’
혹시나 하는 당황스러움에 휴대폰을 켜서 그의 위치를 확인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 북관 1층 - 집무실』
다소 생뚱맞은 위치에 그의 초상화가 떠올라 있었다.
애리얼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의아함을 나타냈다.
십 분 전에 중앙관의 침실에서 시녀에게 명을 내렸던 이가 지금은 북관의 집무실에 있다. 순간 이동을 했음이 분명한 위치 변화였다.
잠시 기다리라더니 갑자기 처리할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의문이 생겼으나 어디 물을 곳도 없었다. 애리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뿐.
그나마 누군가 침입할 일이 적다는 건 다행인 부분이었다.
애리얼은 작게 한숨을 쉬곤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렇게 하릴없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
휘아킨 무하가 보인 돌발 행동은 데본시아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마력을 얻자마자 애리얼을 단독으로 감금할 정도로 뒤틀린 애정을 지녔을 줄이야.
‘마냥 얌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극단적이었네.’
데본시아는 의자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고서 눈꺼풀을 슬슬 문질렀다. 최근 잠을 거의 못 자서 피로했다. 일이야 늘 많으니 그건 차치하고, 애리얼이 계속 무하 공작저의 별채에 갇혀 있던 게 컸다. 그것 때문에 악몽까지 꿀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럼에도 공작저로 쳐들어가지 않은 건, 애리얼이 무하 공자에게 가졌을 신뢰감을 완전히 박살 내기 위해서였다. 아리앨라 클라우스 백작을 통해 일일이 상황 보고를 받은 덕에 인내심 있게 기다릴 수 있었다. 애리얼이 탈출할 수 있도록 무하 공작에게 미리 전화를 넣을 수도 있었고.
데본시아는 책상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무하 공작에게는 애리얼의 앞에서 남관으로 들어온 뒤, 북관으로 통하는 이동 통로를 이용하라고 명을 전했다. 동선을 꼬아서 애리얼과 마주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순간 이동을 쓰면 편했겠지만, 황성 내에서는 황족을 제외하고는 마법을 쓰는 것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그 탓에 공작에게는 다소 귀찮은 방식이 강요되었다.
혹시 모를 애리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십 분의 유예를 두고 애리얼을 침실로 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생뚱맞은 명령과 이어진 상황은 이것저것 가늠하는 그녀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공작에 관해선 괜한 의심조차 하지 못했겠지. 당장 십 분 전까지만 해도 침실에 있다가 갑자기 사라진 저에 관한 추측을 해야 하니까.
똑똑똑.
노크 소리에 데본시아는 애리얼을 향하던 사념을 멈추었다.
“황태자 전하, 무하 공작 서하께서 오셨습니다.”
시녀가 말했다.
공작은 정확히 약속한 시각에 그의 집무실로 왔다.
“들여보내.”
허락하자 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낯의 공작이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 음성이며 움직임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제 아들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그리고 또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다 아는데도 냉철하다. 아니, 냉담하다고 하는 게 더 맞을까.
데본시아는 얼굴에 미미한 미소를 띠며 그녀를 맞았다.
“자세한 사정은 클라우스 백작에게서 들었을 테지.”
“예. 제 아들에게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마도구를 하사하셨으나, 제 아들이 명령 불복종에 무고한 이를 감금, 세뇌하는 범죄를 저질렀으니 다시 마도구를 회수하시겠다고. 그 방법이 상당히 강압적일 수 있다고. 제가 클라우스 백작에게서 전해 들은 바는 이렇습니다.”
“정확하네. 그대로 집행하려고 하는데, 어때?”
“이미 공작저에 사람을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보가 빠르네.”
“예, 자택의 일이니까요.”
“그런데 별 조처를 하지 않았던데. 무언중에 동의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그 질문에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을 뿐.
“용건은 끝난 것으로 알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어.”
그가 허락하자 공작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집무실을 나갔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무표정이었다.
그에 데본시아는 조금 감탄했다.
제 아들에 관한 일인데도 저렇게나 냉혈한처럼 굴 수 있다니.
저도 제 가족을 도구처럼 보긴 하지만 그건 제 가족에게 별다른 애정이나 집착이 없기에 가능한 거였다. 그런데 무하 공작은 여전히 제 아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집착하여 희망을 품고 있으면서 저러는 게 신기했다.
데본시아는 픽 조소를 흘리다가 이내 무표정해졌다.
애리얼의 신뢰를 받던 무하 공자를 이용해 그녀의 경계심을 일정 기간 허물어 두려는 계획이 망가졌다. 원래 그의 의도대로였다면 지금쯤 애리얼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상황에 나름대로 안심하고 있었을 텐데. 다시 생각해도 무하 공자의 돌발 행동에는 분노가 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늪에 빠진 그녀가 지푸라기마저 다 타서 달군 쇠라도 잡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되면, 저를 찾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그 정도인가.’
막상 생각하다 보니 데본시아는 헛웃음이 터졌다.
죽기 직전의 상황이 되어서야 생각나는 선택지라니.
비참했지만, 그의 주제 파악은 정확했다.
최후의 최후가 되지 않으면 애리얼은 그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데본시아의 헛웃음은 어느새 소리를 잃고 쓴웃음으로만 남았다. 속은 쓰리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12월 15일.
얼마 뒤면 12월 31일, 그리고 1월 1일이 찾아온다.
선물을 주는 데 혈안이 된 애리얼이라면 한 번은 반드시 자신을 찾을 터.
‘그러니까 그때, 반드시.’
쓴웃음을 짓던 입꼬리가 스르르 하강했다.
마지막 피날레를 앞둔 시점에서 애리얼의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도 최대한 의심을 피하고 최후의 보루인 양 움직여야 했다.
‘즉위까지는 앞으로 한 달 정도…….’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그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데본시아는 감히 황태자의 집무실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인 무례한 인간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 담대한 인간은 얼굴에 튄 핏자국을 닦지도 않고 피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렉스.”
데본시아가 친근하게 그를 불렀다.
렉시우스는 인사도 없이 다가오더니 책상에다가 뭔가를 툭 내려놓았다.
“말했던 거.”
피 묻은 손이 데본시아의 앞에 평반지 두 개를 놓고서 거두어졌다. 은색의 표면에 마르지 않은 핏물이 묻어 있었다.
“죽였어?”
“왜? 죽이는 게 좋았어?”
“아니.”
“근데 죽이고 싶었던 것처럼 묻네.”
데본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제로 렉시우스의 손을 빌려 무하 공자를 죽일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남의 손을 빌렸기에 뒤탈도 적고, 어물쩍 사고로 위장할 수도 있었다. 무하 공작이 제대로 대응한다면 꽤 힘들겠지만, 그녀에게 그 정도 열의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그 김에 클라우스 백작을 제 아래에 넣어 후계자로 삼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어느새 그의 생각은 휘아킨을 처리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데본시아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질투로 불어난 살의를 내리눌렀다.
무하 공자는 애리얼을 꾀어내는 용도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데본시아가 복잡한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는 동안 렉시우스는 바지 주머니에 구깃구깃 접어 넣어 놓은 종이를 꺼내 책상 위로 던졌다. [근원 소멸기의 소유권을 렉시우스 크레시앙에게 양도한다.]라고 쓰인 서류였다.
“도장 찍어.”
렉시우스가 명령하듯이 말했다.
데본시아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쪽 눈썹을 치켰다. 렉시우스의 행동이 조금 불쾌했으나, 정산은 해야지. 받을 거 받았고 줄 거 주면 끝날 만남이었다. 그는 황제의 직인을 들어 구겨진 종이 끝에 찍고는 눈짓했다.
렉시우스는 대답도 없이 서류를 가져가 다시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바로 떠났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데본시아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호출 벨을 눌렀다. 일 분도 지나기 전에 제라온이 와서 응답했다.
똑똑똑.
“들어와.”
노크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그러고는 제라온이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명했다.
“이거 가져가서 보관해.”
제라온은 고개를 숙이려다 멈칫하고서 그의 말에 반응해 시선을 움직였다. 책상 위에 놓인 은색의 평반지가 보였다. 일전에 무하 공자에게 하사했다던 물건이었다.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아찔한 감상을 자아냈다.
“설마 처리하셨습니까?”
제라온의 질문에 데본시아가 하하 웃었다.
“나만 보면 다들 공자를 처리했냐고 묻네.”
그렇게 티가 났나. 하소연하듯 말하자 제라온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야 그러든 말든 데본시아는 순간 이동으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애리얼을 보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크게 멀지도 않은 북관과 중앙관 사이의 거리를 순간 이동 해서 마력을 낭비할 만큼. 그녀와 대화도 나누지 못한 지도 벌써 다섯 달 가까이 되고 있었다. 그 긴 시간이 그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고갈시켰다.
이쯤이면 한 번은 봐야 했다. 그래야 마지막이 왔을 때 일을 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애리얼.”
침실에 발을 디디자마자 그는 헤픈 미소까지 지으며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기다리다가 잠들기라도 한 건가. 그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소파며 침대,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구가 적어 숨을 곳도 여의치 않은데 도대체 어디 있는 건지.
끼익.
오래된 쇠사슬이 낼 것 같은 소음이 그의 귀를 울렸다.
은색과 푸른색의 오드 아이가 날카롭게 그 소음을 좇았다.
방의 가장 오른쪽, 모서리 부근에 있는 창문이 깨져 있었다. 유리창은 조각이 나서 바닥으로 떨어졌고, 창문틀은 갈라져서 나뭇가지인 양 우그러져 일부가 튀어나와 있었다.
온화하던 그의 얼굴이 일순간에 싸늘히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