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본시아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감금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벌어진 애리얼의 변화였다.
휘아킨에 대한 신뢰가 박살 나는 동안 그녀는 극한에 내몰렸다. 벼랑 끝으로 밀린 듯한 경험은 그녀의 수동적인 행동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간 상대의 계급, 성격 등을 고려해 소극적으로 숙이기만 하던 경향이 상당히 옅어졌다. 특별 엔딩의 기회를 코앞에 둔 시점이기에 오히려 담대해질 수 있었다.
그게 황성 중앙관에서 황태자의 침실 창문을 부수는 행동으로까지 이어질 줄은 누구도 몰랐지만.
***
황태자의 침실은 가구가 몇 개 없고 깔끔한 것이 공작저의 별채를 떠올리게 했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애리얼은 불안에 시달렸다.
또 이대로 감금당하는 것은 아닐까.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다가왔다.
대체 뭘 하기에 십 분이나 기다렸다 들어오라고 해 놓고 자기는 또 쏙 사라졌단 말인가.
애리얼은 갑갑함에 휴대폰을 켰고, 여전히 집무실에 있는 데본시아를 바라보다 렉시우스의 초상화가 나타나는 것을 실시간으로 발견했다.
놀란 나머지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도망치듯 문으로 향했다. 냅다 문고리를 돌렸으나 철컥 소리만 울리고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잠겨 있다. 그 사실이 애리얼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창문에 손을 댔으나, 창문 역시 잠긴 상태였다.
불안감이 치솟은 애리얼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저질렀다. 공격술을 사용해서 창문을, 그것도 황태자의 침실에 달린 창문을 부순 것이다.
두려움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어서 마력의 발현이 그리 섬세하지 못했다. 우지직, 챙강! 과격한 소리를 내며 부서진 창문에서 날카로운 잔해가 튀었다. 마력을 방사하고 있던 덕에 애리얼 자신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주변은 엉망이 되었다. 유리창만 깔끔하게 깰 생각이었던 애리얼은 뒤틀려 버린 창틀을 보고 낯을 굳혔다.
저지르고 나니 제가 한 짓이 보였다.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황제가 저를 위험 요소로 판단하고 있다는 건 익히 아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아리앨라가 재판까지 받았었는데. 어쩌자고 이런 짓을 벌였을까. 심지어 황성에서, 황태자의 내밀한 침실에서 벌인 짓이었다.
애리얼은 제 심리 상태가 꽤 구석에 몰려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끙, 앓는 소리를 하며 머리를 싸매다가 고개를 털어 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있나.
오늘은 12월 15일이고, 1월 1일까지는 17일이 남았다.
이렇게 데본시아의 침실에서 세월아 네월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니, 창문이 깨진 김에 스카이라나 찾아야지.
생각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1층이라 창문만 넘으면 바로 정원이었다.
애리얼은 마력을 조금씩 방사하며 창문을 넘어갔다. 날카로운 파편들은 피부에 닿기 전에 마력에 닿아 뭉툭하게 깎였다. 그녀의 신체는 상처 없이 창틀을 통과해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은 사용인 한 명 없이 고요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애리얼은 근처를 살피며 조심스레 휴대폰을 켰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 1층 - 집무실』
다행히 아주 멀지는 않은 곳에 그의 초상화가 보였다.
애리얼은 벽면을 따라 조용히 걸으며 그가 있는 집무실로 접근했다. 중간중간 주변을 살피며 사용인이나 기사가 오는지 확인하고, 종종 낮은 수풀로 웅크려 몸을 숨기기도 했다. 중간에 들키면 다시 황태자의 침실로 돌려보내질 테니까, 조심하는 게 좋았다.
우우우웅-
접근 알림이 울렸다.
애리얼은 기다시피 움직였다. 속도는 느렸지만 들키는 일은 없었다.
스카이라가 있는 집무실의 창문 아래에 도착해 조심스럽게 상체를 세웠다. 창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자 유리창 너머로 집무실의 풍경이 보였다. 스카이라는 창문을 등지고 앉아 서류를 처리 중이었다.
애리얼은 선물을 꼭 쥐고서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렇게 나타나는 건 예의가 아니었지만, 여유가 없는 애리얼에겐 이게 최선이었다.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유리창을 두드렸다.
똑똑.
작은 소리였음에도 스카이라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시선이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정확하게 꽂혔다.
애리얼은 몸을 웅크리고서 유리창을 두드리던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머쓱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가 놀라서 다가왔다. 창문을 당겨 열고는 애리얼을 내려다보며 당황을 드러냈다.
“거기서 뭐 해?”
“그게, 그…… 널 우연히 발견해서…….”
애리얼이 횡설수설 해명을 늘어놓자 그가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응……. 미안, 실례할게.”
애리얼은 엉거주춤 그의 손을 잡고서 창을 넘어갔다. 한 손에는 선물 상자를 든 채였다.
바닥을 디디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애리얼은 눈을 내리깔고서 슬쩍 스카이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게 애리얼을 손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이쪽을 살피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손을 놓고 물러났다.
스카이라는 심란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반가움을 느꼈다가도, 긴 부재에 걱정이 일었고, 저를 거부하고서 무하 공자의 손을 잡던 모습이 떠올라 비참하기도 했다. 매몰차게 거부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절 찾아왔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녀를 향해 설레고 있는 자신의 가슴이 너무나 맹목적이라 울컥 화가 치솟았다.
“왜 온 건데.”
스카이라는 눈썹을 찌푸리고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애리얼은 눈을 가만히 내리깔고서 하얀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이야. 많이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생일.
그녀의 말에 스카이라는 얼이 빠졌다.
“너 지금…… 내 생일을 축하하려고 숨어서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거야?”
황당해하며 묻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눈치 없이 입꼬리가 상승하려고 했다. 스카이라는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선 미간을 구겼다. 매몰차게 돌아설 땐 언제고, 이미 한 달이 넘게 지난 생일을 축하하겠답시고 온 그녀인데. 어이가 없어야 하는데. 그는 머저리처럼 설레기나 하고 있었다.
젠장. 험한 말을 삼키며 이를 꽉 깨물었다. 들뜨는 표정은 인상을 써서 감추고 손을 내렸다. 무섭게 찌푸린 그의 낯에 애리얼은 바짝 긴장해서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 이제야 찾아와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휘아킨에게 감금당했다느니, 그런 하소연은 제쳐 두고 애리얼은 사과만 전했다. 실제로 그의 생일을 제때 챙기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그를 믿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그래서…….
“정말 미안해.”
애리얼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선물 상자를 내민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일전에 대공저에서 그를 매몰차게 밀어냈던 것이 계속 떠올랐다. 그러고는 한 달이나 지난 생일을 축하하겠답시고 등장한 자신이, 그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스카이라는 죄인처럼 조아리는 애리얼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올려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선물 상자를 집어 들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순간에 그의 얼굴로 온갖 감정이 지나갔다.
“선물은 받을게. 그러니까 그만 숙여. 진짜 죄지은 것도 아니고, 사과도 그만해.”
“……응. 고마워!”
애리얼이 그와 시선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에 스카이라는 하마터면 손에 쥔 선물 상자를 우그러트릴 뻔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분노나 비참함은 물에 씻기듯 흔적도 없어졌다. 이토록 한심하게 휘둘린다. 이제 와선 거부할 생각도 들지 않게, 멍청해졌다.
분노는커녕 서운한 것조차 사라졌다. 대신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새어 나왔다.
웃는 그녀가, 그녀가…… 그리웠다.
그는 무의식중에 팔을 뻗어 애리얼의 어깨를 휘감고 품으로 당겼다. 도중부터 제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자각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부드러운 흑발의 감촉이 팔을 간지럽혔다. 제 가슴팍으로 떨어진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애리얼은 당황한 나머지 크게 움찔거렸으나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대공저에서의 일에 죄책감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스카이라는 그녀의 죄책감이 기꺼워졌다. 그거라도 느껴서 저를 밀쳐 내지 못하고 이대로 붙잡혀 주면 얼마나 좋을까.
“보고 싶었어, 애리얼.”
그가 고백했다. 말할 기회조차 없어 감추고 삼키던 그 심정을 토해 냈다.
애리얼은 그의 품 안에서 기도하듯이 양손을 깍지 껴 잡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사실 네 생일에 오지 못하게 그동안 갇혀 있었어. 너무 두렵고, 외로워. 도와줘. 같이 있어 줘. 공작저에서처럼, 아카데미에서처럼 구해 줘…….
나약한 말들이 마구마구 떠올라 입 안을 맴돌았다.
떠날 거면서, 지금껏 그의 감정을 저울처럼 조절하고 거리를 쟀으면서. 이제는 그 감정에 기대기까지 하려고 한다.
여전히 이곳에 남을 생각은 하지 않는 주제에.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선물도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상황을 무마하려고 주제를 돌리는 음성은 볼썽사납게 떨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애써 모르는 체하는 그녀의 말투에 스카이라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그녀는 지금 어떤 표정일까. 무슨 심정으로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는 팔을 풀었다.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고서 반걸음 물러났다.
시선을 내리자 어색하게 웃고 있는 애리얼과 눈이 마주쳤다. 군데군데 경직된 얼굴이 안쓰러웠다.
많이 내몰려 있는 건가. 애써 나약함을 꾹꾹 누르는 것이 보였다.
스카이라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도 그녀를 벼랑 끝까지 몰아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안타깝다면 지금이라도 물러서고, 포기하고, 그녀에게 황자비라는 자리를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그녀에게 숨 쉴 틈이라도 생기겠지. 손을 내밀어도 어쩌면 거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필요한 일이 있으면 황성의 인력을 차출해서 써. 돈도 가져다 쓰고, 언제든지 날 불러도 좋아.”
그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스카이라는 모르는 척 무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황성에선 그 누구도 널 함부로 하지 못할 거야. 설령 그런 이가 있다 해도 내가 처단할게.”
“…….”
“좋은 곳에서 좋은 걸 누리게…….”
“고마워. 마음만으로도 기쁘다!”
애리얼이 활짝 웃으며 밝게 목소리를 높였다. 억지로 쥐어짜 낸 듯한 그 표정이 스카이라의 입을 막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이건 에두른 거절이었다. 부담스럽다는 증거였다.
스카이라는 그런 그녀를 붙들고 묻고 싶었다. 내가 싫으냐고. 황자비 자리가 그렇게 거북하냐고.
‘그런데 왜 날 찾아왔어? 고작 생일 따위를 축하해 주려고 왜 이렇게까지 해?’
희망 고문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희망 고문조차 없으면 정말 죽어 버릴 것 같아서…….
이런 만남마저 사라질까 봐, 두려움이 든 그는 애리얼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시간이 지나면 황자비로 붙잡아 둘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용건은 끝났어?”
“……응.”
애리얼은 미안한지 눈을 내리깔고서 고개를 약간 숙였다.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 창백한 얼굴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오늘은 이만 보내 줘야 하겠지.
“중앙관 정문에 차를 준비해 줄 테니까, 타고 가.”
“응.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애리얼은 끝까지 밝은 척 웃고 있었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묻어 나오는 어색함과 부담을 미처 다 숨기지 못한 채로.
그렇게 그를 참담하게 만들고 떠났다.
스카이라는 그녀를 보내고 제 손에 남은 하얀 선물 상자를 움켜쥐었다.
가슴 속에서 울컥울컥 자꾸만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가두고, 가져.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네 것이 되지 않아. 잃어버리고 말 거야. 아니면 뺏기고 말 거야. 그러니까 그냥 가져. 무슨 수를 써서든.
본능이 이성을 살살 꾀어내는 소리가 사나웠다.
손아귀에 힘이 꽉 들어갔다. 손등에는 시퍼렇게 핏줄이 섰다. 흰 상자가 파각, 소리를 내며 우그러졌다.
손안을 내달리는 부서지는 감각에 잠시 날아갔던 이성이 되돌아왔다.
스카이라는 비틀어져 망가진 상자를 쓸쓸히 내려다보다가 포장을 뜯었다.
그녀가 선물이라고 건넨 상자에는 푸른 사파이어가 들어 있었다. 처음 그녀와 만난 날, 그가 비 오는 정원으로 던져 버렸던 것. 그녀에게 찾아오라고 시켰던 것과 거의 같은, 세공 방식만 조금 다른 사파이어.
첫 만남을 상기시키듯이 그의 눈동자와 닮은 색의 사파이어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