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우우웅-
스카이라의 집무실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몸을 튼 순간 알림음이 울렸다.
애리얼은 움찔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는 데본시아가 다가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정복을 고고하게 차려입은 황태자의 모습으로.
“애리얼.”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애리얼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부터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인사조차 받기 싫은 모양이었다. 애리얼의 팔을 확 잡아끌고서 다짜고짜 순간 이동을 했다.
시야가 단박에 휙 전환되고서, 심하게 부서진 창문이 나타났다.
애리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한 짓을 한번 보라는 듯, 데본시아는 그녀의 뒤쪽에 서서 그녀의 어깨를 꽉 쥐고 있었다.
“아……. 죄송합…….”
“걱정했어, 애리얼. 걱정, 했다고.”
반사적으로 사죄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데본시아는 걱정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했다.
“……죄송합니다.”
애리얼은 제가 저지른 짓을 눈앞에 두고서 사과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사과에는 충동적으로 벌인 일에 대한 책임감과 잘못된 짓을 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와의 언쟁을 피하고픈 회피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후회는 담겨 있지 않았다.
데본시아는 당장이라도 나가 버리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서 숨을 골랐다. 그녀의 어깨에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애리얼이 흠칫거렸음에도 그는 힘을 풀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녀가 스카이라에게 선물을 주러 온 것이 황성 방문의 목적임을 알았다. 그걸 알고서 허락했다. 스카이라를 만나게 해 줄 생각이었다. 너그럽게 이해할 생각이었다. 자비롭게 봐줄 생각이었다.
자신을 만나고 난 뒤에, 그것들을 할 수 있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
“애리얼, 왜 말을 안 들었어. 조금만 더 기다리지……. 그렇게 답답했어?”
“……네.”
애리얼은 솔직하게 시인했다. 답답했고, 문이 열리지 않아 두려웠고, 그래서 창문이라도 부숴서 나갔다고. 짧은 대답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네’라고 답했기에, 데본시아는 조금 이성을 되찾았다.
애리얼은 벌벌 떨지도 않았고, 사과를 반복하는 식으로 대화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데본시아는 차츰 진정되었다. 흐려졌던 침착함이 돌아왔다. 상냥하게, 친절하게, 그녀가 안심할 수 있게 굴기로 했잖아. 스스로를 타이르는 소리가 이제야 들렸다.
“앞으로는, 이런 짓을 벌이면 곧장 나를 찾아와.”
그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는 안 했다. 이런 짓을 벌인 것보다 이런 짓까지 하며 스카이라를 만나러 간 게 잘못이라는 듯.
애리얼은 그의 기형적인 애정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용건은 다 끝내고 왔어?”
부드러워진 말투가 소름 끼쳤다.
애리얼은 차마 목소리로 대답하지는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랬다니, 다행이네.”
친절하게 답하며 그는 느릿하게 애리얼의 어깨에서 하나씩 손가락을 뗐다. 그리하여 모든 손가락이 떨어지고 손바닥만 남아 그녀의 어깨를 살짝 누르고 있을 때.
“근데 애리얼.”
그는 애리얼의 귓가에 입술이 스칠 듯이 상체를 숙이고서 물었다.
“나한테 부탁할 일 없어?”
그 숨결이 닿는 귓가, 목 언저리가 섬찟했다.
그는 그녀가 어떤 처지인지, 어떤 상황에 내몰려서 이곳에 왔는지, 뭘 원하는지 다 아는 것같이 군다. 그는 늘 그랬다. 그래서 섬뜩하고, 두려운 사람이었다.
“황태자 전하…….”
“응?”
그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뭘?”
그가 모르는 척 대꾸했다. 애리얼은 그 반응마저도 음습하다고 느꼈다. 회귀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제 입맛대로 상황을 바꿀 수도 있으면서, 순진함을 가장하는 것이.
오싹하다.
‘제가 무하 공자에게 감금당하는 거 아셨나요?’라고 묻고 싶어졌다.
그러나 애리얼은 참아 냈다. 이제는 그의 내심이나 의도, 계획을 알고 싶지 않다.
돌아가는 것만이 목표니까.
앞으로 이 주 하고도 사흘. 그 기간만 더 참아 내면 된다. 쓸데없이 데본시아를 자극하지 말고 성격을 누르자. 그가 모르는 척하면 저도 모르는 척 굴면 되는 게 아닌가. 굳이 벌집을 건드릴 이유는 없다.
덮어 두고, 영원히 작별하면, 찝찝할지언정 다치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감시만 조금 붙여 주세요.”
“누구에게?”
“저에게요.”
의외의 요구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에 닿아 있던 그의 손이 멀어졌다. 그는 입을 가리고서 상체를 숙인 채 쿡쿡 웃고 있었다.
애리얼은 고개를 돌려서 그를 확인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서 저럴까.
그는 연신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긴 손가락이 살짝 젖어 든 눈가를 훔쳐 냈다. 우아하게 폭소의 잔재를 털어 낸 그가 빙그레 휜 입술을 열었다.
“알았어. 감시 붙일게.”
이미 붙여 놨지만.
그런 소리가 덧붙여진 것만 같았다.
애리얼은 고개만 꾸벅 숙였다.
데본시아에게 부탁할 때, 그녀는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절대 손해 보지 않을 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
휘아킨은 무너진 잔해 사이에서 눈을 떴다. 커헉, 끄윽. 호흡을 할 때마다 거칠거칠한 소리가 났다. 내쉬는 숨결에 뿌연 먼지와 핏방울이 섞여 있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은 무자비했다. 몇 번의 공격술을 주고받는 동안 호각인 듯 보였던 전투는 그가 진심을 보인 순간에 끝이 났다. 항상 누군가에게 맞고 당하기만 하며 살던 휘아킨은 전투 센스가 한참 부족했다. 마법으로는 그와 호각일지 몰라도 무력적으로는 극심한 차이가 있었다.
승패는 싱겁게 결정지어졌고, 휘아킨은 패배자로 부상만 얻었다. 렉시우스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휘아킨에게 올라타고서 손가락을 자를 기세로 반지를 빼앗아 갔다. 그 과정에서 휘아킨은 약지가 부러졌다.
어지간히도 센 악력이었다. 악,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
렉시우스는 지독할 정도로 상대방의 의지를 잘 꺾었다.
“누구 마력을 끌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생충 짓은 여기서 끝내야지. 그래야 숙주도 좋고, 너도 주제를 알아서 좋고.”
아, 그래. 말로 사람을 끝장내는 것도 잘하더라.
휘아킨은 엎어진 채로 픽픽 비소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숨을 쉬는 것도 고통이었다. 사지는 간헐적으로 떨리기만 할 뿐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잃기만 하지는 않았다.
누구 마력을 끌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로 휘아킨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다. 두 개의 평반지를 끼워 쓰며 내내 들던 의문. 왜 데본시아의 마력을 끌어 쓰는데 제 예민한 체질이 반응하지 않을까. 타인의 마력만 닿았다 하면 발작처럼 일어나는 멀미 같은 증세가 왜 데본시아의 마력에는 잠잠할까.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어머니는 그의 마저증을 해소하기 위해 금서에도 손을 댔다. 심지어는 그 내용을 그에게 외우도록 했다.
그리고 그 금서의 내용 중에서는 마력을 융합하는 경우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각각의 마력은 고유한 것이다. 남의 마력을 끌어오면 엄청난 부작용이 일어난다. 그가 특별히 예민한 체질과 더불어 타인의 마력을 끌어다 쓰지 못했던 이유였다.
어머니는 실망하여 금서를 덮었으나, 휘아킨은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읽었다.
만일 그 부작용을 견디고서 마력을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면, 혹은 더 나아가 섞는 데 성공한다면, 이때부터 두 가지 마력은 더 강한 쪽의 성질로 융화된다.
단, 마력을 직접 융화시킨 당사자가 사용할 때만.
융화된 마력이 당사자의 몸을 떠났을 경우, 특히나 마도구를 통한 경우에는 아무리 잘 융화한 마력이라도 체에 걸러지듯이 분리된다. 원래 제 것이 아니었던 마력만 따로 떨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황태자가 준 마력이 순수했다면 렉시우스 크레시앙이 그런 말을 꺼냈을 리 없었다. 그놈이 친우인 황태자의 마력을 구별해 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 마력의 숙주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었다!
피식피식 한숨처럼 터지던 웃음이 어느새 격해졌다. 아하하, 피를 질질 흘리며 웃다가 쇳소리 같은 목소리를 냈다.
“내 마력이었구나.”
허탈하게, 혹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진실을 읊는다.
“데본시아, 그 개새끼가 쓰던 게.”
내 인생이 이렇게 진창이었던 게, 쓰레기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불구로 살았던 게, 전부 그 새끼 때문이었구나.
황태자가 어떻게 제 마력을 가져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져갔다는 것은 확실하다. 황태자의 몸속에 있는 마력의 일부는 온전히 제 것이었다. 그리고 가져가는 방법이 있으면 도로 뺏어 오는 방법도 무조건 존재한다.
그는 무너진 상체를 힘겹게 일으켰다.
휘아킨의 재색 눈동자, 탁하게 죽어 빛이 사라진 그 눈이 허공을 섬뜩하게 응시했다.
빼앗긴 걸 남김없이 되찾을 시간이었다.
***
애리얼은 황성의 감시를 줄줄이 달고 백작저로 돌아왔다. 백작이 놀라서 다급히 뛰어나왔다. 흔치 않은 모습에 애리얼은 덩달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 후 애리얼은 백작의 집무실로 가서 그간 있었던 일을 길게 풀어내야 했다.
긴 이야기가 끝나고, 백작은 어쩐지 서러워 보였다.
침묵이 내려앉은 시간이 불편했다. 백작은 심란한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창밖만 보았다.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애리얼은 함부로 자리를 뜨지도 못했다.
애리얼은 가만히 테이블을 보았다. 하얀 찻잔에 이름 모를 연한 차가 담겨 있었다. 그 색이 캐모마일차와 비슷했다.
한참을 조용히 생각하던 백작이 손을 뻗어 찻잔을 치웠다. 애리얼에게서 캐모마일과 환각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미안하다.”
백작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 만에 꺼낸 말은 사과였다.
“난 그냥 네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두면 될 줄 알았다. 금전적으로만 지원하려 하고, 네 상황을 전혀 몰랐어.”
고해였다.
“힘이 없는 엄마라서…… 미안하다.”
사죄였다.
애리얼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었다.
‘당신은 내 진짜 엄마가 아니고, 나도 당신의 진짜 딸이 아니에요.’
어쩌면 떠나는 그날까지도 평생 뱉을 수 없을 말이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사과하지 마세요.”
데본시아의 앞에서도 떨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그녀의 앞에서 떨려 왔다.
“그래도, 엄마가 미안해.”
백작이 자꾸만 사과를 반복했다.
사과를 듣는 그녀는 죄악감에 휩싸였다.
백작이 제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 저는 백작의 진짜 딸이 아니고, 백작은 저에게 부모의 도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저 사과는 이 몸의 주인이 받아야 했다.
떠나야 할 그녀가 들을 말이 아니었다.
백작의 사과는 그녀의 가슴에 큰 돌덩이를 얹고 갔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부디, 이 세계에서의 기억을 잃어버리길 바랐다.
***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했는데, 선택받지 못했다.
방법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강압적으로 굴면…….’
레이신은 마력석을 손에 쥐고서 마수를 응시했다. 사막의 모래처럼 버석한 눈빛이었다. 마수의 까만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렉시우스처럼 행동하지 않았던 건, 애리얼이 그 행동을 싫어해서였다. 그런 식으로 굴면 그녀가 저를 꺼릴 테니까.
근데 그러지 않아도 꺼렸으니까. 왠지 합리화할 변명이 주어진 것 같았다.
그녀가 싫다고 해도 저의 욕심껏 그녀에게 권력을 쥐여 주고, 힘을 쥐여 주고, 저 자신을 쥐여 주고. 그래도 될 것 같다. 그러고 싶어졌다.
레이신은 마수에게 마력석을 던졌다. 마수가 잘 훈련된 개처럼 제 발치에 던져진 마력석을 먹지 않고 기다렸다.
“먹어.”
그제야 마수가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마력석을 덥석 물었다.
훈련이 잘됐는데, 선물해도 될 것 같은데.
레이신은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훈련이 잘되면 선물할 만한가. 그러고 보니 훈련이 잘된 게 또 하나 있는 거 같은데. 마수에서 시작된 생각이 저 자신에게까지 닿았다.
애리얼의 명령이라면 발을 핥으라는 것도 쉬웠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의자 노릇을 하는 것도 가뿐하게 가능했다. 저 마수보다도 더 잘 복종할 자신이 있었다. 마수보다 강하고, 마수보다 할 수 있는 게 많고, 마수보다 더 순종적일 수 있었다.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만 빼고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목줄을 찬다면 렉시우스처럼 굴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데. 진짜 종이 뭔지 보여 줄 수 있는데.
애리얼에게 순종적인 자신을 강압적으로 안겨 주고 싶어졌다.
구체적으로는 그녀의 생일, 일 월 일 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