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저의 아침은 조용했다.
애리얼은 이른 시각에 기상해 창가에 앉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에 잠겨 희끄무레했다. 그 아래에 펼쳐진 정원에는 하얗게 서리가 껴 있었고, 황성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다섯 정도 보였다. 황성에서 보낸 감시 요원 중 일부였다.
황성은 총 열두 명의 감시 요원을 백작저로 보냈다. 두 명의 시녀와 열 명의 기사로 구성되어, 시녀는 저택 내부를, 기사는 저택 외부를 감시했다.
사실 말이 감시지 백작저를 지키기 위해 호위를 서는 인원이라 봐도 됐다. 그들은 백작저의 동향을 살피기도 했지만, 외부를 더 경계하는 편이었다. 백작저의 방문객을 철저히 검문하고, 새로 보이는 얼굴이 있으면 반드시 심문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되면 가차 없이 백작저에서 내쫓았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백작저는 며칠간 조용했다.
애리얼 역시 상당히 안정된 상태로 지냈다. 다만 찻잔에는 아직도 입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휘아킨에게 당했던 환각술의 여파였다. 지금은 꽤 나아졌지만, 초기에는 찻잔을 보기만 해도 경직되곤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조금 이르지만, 식사를 준비할까요?”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카논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아니, 아직 괜찮아.”
애리얼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가만히 앉아 아침의 고요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이런 분위기를 느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달력에 표시된 오늘 날짜는 12월 24일. 특별 엔딩까지는 8일이 남았다.
다행히 휘아킨이 백작저로 침입해 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공략 대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든 이들의 행적이 잠잠했고, 별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나마 들려오는 소식은 황태자의 탄신 연회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고작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황태자의 생일에 온 제국이 신경을 쏟고 있었다. 곧 황좌의 주인이 될 이의 생일이었기에, 황성의 구성원은 물론이고 각국의 왕과 제국의 귀족들까지 이번 탄신 연회를 벼르고 별렀다.
애리얼이 속한 허클리 백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작저는 황태자의 탄신 연회에 올릴 선물 준비로 분주했다. 영지 특산품을 수확하고 가장 좋은 걸 선별해 리본을 달았다. 저택 금고에 보관된 재물 중에서도 고가의 보석을 따로 골라 관리했다. 모두 허클리 백작가의 이름을 달아 황성으로 보낼 품목이었다.
그에 비하면 애리얼의 준비는 검소했다. 지금껏 다른 공략 대상들에게 그래 왔던 것처럼, 개인적인 선물만 거창하지 않은 거로 건네고 끝낼 생각이었다.
“카논, 준비한 선물을 가져와 줄래? 이쯤에서 점검을 한번 해야 할 것 같네.”
“네, 아가씨.”
벽에 기대어 시간을 죽이던 카논이 드레스 룸에 연결된 금고로 향했다. 작은 창고 정도의 크기인 금고에는 백작이 애리얼에게 개인 재산으로 넣어 준 보석과 금이 쌓여 있었다. 다만 애리얼은 그 재물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매달 지급되는 생활비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카논은 먼지가 쌓일 만큼 방치된 재물을 지나 구석에 놓인 테이블로 향했다. 상비로 가지고 다니는 얇은 장갑을 꺼내 손에 끼고서 테이블에 놓인 황태자의 선물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시들지 않는 백합 생화 꽃다발.
애리얼이 직접 마법을 써서 특별히 제작한 거였다.
카논은 꽃다발을 애리얼에게 가져다주며 물었다.
“아가씨, 조금만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애리얼은 꽃다발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논은 그녀가 꽃다발을 만들기 위한 백합을 찾을 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왜 많은 종류 중에 꽃다발을, 그것도 백합을 선택하셨어요?”
“내가 전에 황태자 전하께 백합을 드린 적이 있거든.”
“백합을요?”
“응. 전하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백합의 꽃말은…….”
카논은 무심코 속엣말을 꺼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애리얼은 카논이 하려던 말을 예상하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제국에서는 꽃을 선물할 땐 그 꽃말까지도 중요시하는 관습이 있기에, 꽃의 종류를 과할 정도로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애리얼은 꽃다발에 걸린 마법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며 백합의 상태를 살폈다.
백합의 꽃말은 순결, 순수한 사랑이었던가. 데본시아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꽃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애리얼의 선물 선정은 실수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게 최선이었다. 적당히 의미 있게 느껴지면서 준비에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 않는 선물. 넘치는 선물을 받을 데본시아의 기억에 남을 수 있을 선물.
“황태자 전하께서도 내가 백합을 어떤 의미로 선정했는지 아실 테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겠죠.”
카논은 애리얼이 품은 불안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애리얼은 조용한 미소로 카논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
12월 31일.
황태자의 탄신일.
제국의 수도는 그의 탄신일을 맞아 모인 왕족과 귀족들로 긴장된 동시에 들뜬 분위기였다. 황성까지 향하는 길목에서는 황실 기사단이 병렬해 귀빈들을 맞았다.
황성에서는 정오부터 연회가 진행되었다.
정원에는 마법으로 피워 낸 갖가지 꽃들이 만발했고, 연회가 열리는 홀에는 포인세티아가 주를 이루어 장식되었다. 복도에는 흰색의 호접란이 백색의 도자기 병에 꽂혀 줄줄이 열을 이루었다. 귀빈이 머무는 응접실에도 각기 다른 꽃들이 놓였다.
어디든 꽃이 가득하고, 꽃향기가 감돌았다.
황태자가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백작과 함께 귀빈으로 황성에 방문한 애리얼이 예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정원을 화사하게 밝히는 빽빽한 꽃들. 그 형형색색의 화려함에 시야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눈이 내리는 십이월의 마지막 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풍경이다. 온 세계의 꽃들을 다 모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독 백합만은 찾을 수 없었다.
애리얼의 눈이 의아함을 담고서 화단을 훑었다.
‘내 선물을 보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
의아함이 불안으로 번진다.
황태자의 탄신일에 올리는 선물은 미리 황성으로 보내서 검사를 거쳐야만 했다. 위험한 게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거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당연히 애리얼의 선물도 포함되었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선물이 백합 꽃다발이라는 걸 알 확률이 높았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백작과 애리얼을 안내하며 앞장서던 시녀가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긴 연회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전용 객실이었다. 청록색 벽지가 돋보이는 응접실에는 연회 홀과 같은 포인세티아가 놓여 있었다.
소파가 놓인 가운데 테이블에 커다란 상자가 올라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검은색 포장지에 하얀 리본이 묶인 상자였다.
‘내가 백합을 담아 보냈던…….’
애리얼의 눈이 놀라서 커다래졌다. 검증이 끝난 물품은 바로 황태자에게 올려질 텐데, 설마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나?
“편히 쉬세요.”
뒤에서 시녀가 인사를 남기고는 문을 닫았다.
애리얼은 계속 테이블에 놓인 선물 상자만 보고 있었다.
백작이 조심스럽게 애리얼의 곁으로 다가왔다.
“애리얼…….”
“이건…… 선물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겠죠?”
애리얼이 테이블로 다가가 선물 상자에 손을 툭 올리며 말했다.
“아마도.”
애리얼의 물음에 긍정하는 백작의 목소리는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했다.
“괜찮아. 별다른 일은 없을 거야. 문제가 컸다면 선물을 아예 황성 밖으로 내보냈겠지.”
백작은 서툴게 애리얼을 달랬다. 말투는 딱딱했고, 등을 토닥여 주지도 않았다. 참으로 건조한 위로였으나, 왜인지 애리얼은 조금 안심되었다.
“네. 별일 없을 거예요.”
백작의 위로를 다짐처럼 긍정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
하늘이 어두워졌다.
정오부터 이어진 연회는 느긋하게 점차 고조되어 여덟 시에 피크를 맞았다.
연회의 주인공인 데본시아는 2층으로 나누어진 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곧 황제가 될 그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그의 앞에 줄을 섰다.
데본시아는 정오부터 그 많은 이들을 하나하나 상대했다. 그가 나른해진 얼굴로 상대를 가만히 주시할 때면 여성들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리기 일쑤였다. 대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다만 시간은 철저하게 엄수하여, 한 사람당 할애하는 시간이 오 분을 넘지 않았다.
애리얼은 홀의 구석 자리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제 차례를 기다렸다.
왕족과 공작가의 인물들은 오전에 대면을 마쳤고, 오후에는 후작가부터 차례로 순서가 돌아왔다. 애리얼의 순서는 계급대로면 앞으로 세 사람 뒤.
애리얼은 백합이 든 상자를 들고서 초조하게 대기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선물을 건넬 기회가 별로 없었다. 새로운 선물을 구할 시간은 더 없다. 황성 쪽에서 그녀의 선물을 문제가 있다고 여기더라도, 그녀는 이 선물을 그에게 건네야 했다.
그나마 이목이 많은 곳이니 그도 일단 선물을 받기는 하겠지.
그렇게 여기며 애리얼은 자꾸만 불안해지는 심정을 다독거렸다.
홀에는 점점 사람이 많아졌다.
애리얼은 아직 데본시아를 제외한 공략 대상은 보지 못했다. 접근 알림도 울리지 않았고, 황성을 돌아다니는 초상화도 스카이라뿐이었다.
그녀가 오기 전에 이미 데본시아에게 다녀간 것일까.
복잡한 의문이 맴도는 사이 어느새 차례가 다가왔다. 황태자의 흰 옷자락이 보이자 애리얼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
“생신,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강녕하시길 바랍…….”
“그만.”
데본시아가 애리얼의 말을 끊었다. 그것도 황태자를 대할 때 필수적으로 꺼내야 하는 인사말의 도중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오늘 그와 대화를 나눈 그 어떤 방문객도 이런 취급을 받지 않았는데.
애리얼은 큰 실수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몸을 굳혔다. 데본시아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고개 숙인 그녀의 시야에는 흰 정장을 입은 가슴팍만 보였다. 이윽고 그 좁은 시야로 금색의 커프스 버튼을 단 하얀 소매가 움직여 들어왔다. 소매의 끝에 드러난 손목과 손등, 길쭉한 손가락이 애리얼에게로 다가왔다. 그녀가 든 까만 상자를 톡 건드린다.
“여기서 받기에는 부피가 너무 큰 것 같은데.”
그가 조곤조곤 타이르는 말투로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데본시아를 에워싸고 있던 시선이 모조리 애리얼에게 꽂혔다. 선물 상자를 훑는 시선이 따가웠다.
그의 앞에 선물을 가져온 이는 그녀뿐만이 아니었으나, 이렇게 대놓고 거절당한 이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황성에 들어온 것은 모두 검사가 끝난 것이기에, 그 크기가 어떻든지 간에 모두 시녀를 통해 받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시녀를 부르지도 않고 애리얼의 선물에 퇴짜를 놓고 있었다.
애리얼은 무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
“아니야.”
데본시아가 또다시 애리얼의 말을 끊어 버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고개 숙인 그녀에게로 상체를 기울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연회가 끝나고, 나중에 따로.”
그녀에게만 전하는 밀어였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데본시아는 상체를 바로 했다.
애리얼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사과를 전한 그녀가 선물 상자를 안은 채 물러갔다.
드문드문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대놓고 거절을 당하다니, 창피해서 어떻게 하나 몰라. 조롱하는 음성이 그녀의 뒷모습에 따라붙었다.
가볍게 입을 놀려 대는 인간들의 태도에 데본시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애리얼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모르는 것들이 알량하게 아가리를 놀려 대고 있었다. 데본시아의 차가운 시선이 그들의 면면을 훑었다. 모조리 변두리 귀족들, 오늘로 처음 수도에 와 보는 얼뜨기뿐이었다.
“미카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보좌관을 호출했다. 빠르게 알아듣고 다가온 제라온이 그와 일 미터 거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리튼 백작부터 오른쪽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그리고 열두 번째부터 쭉 열세 명 더해서 총 열아홉 명.”
“어떻게 할까요.”
“글쎄. ……저들을 여기에서 내쫓고, 선물을 그들의 영지로 되돌려 보내고, 홀에서 황태자를 간접적으로 능멸하는 언사를 내뱉어 내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고 친히 전갈을 보내 줄까.”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적절한 징벌이었다. 감히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황태자의 손님을 향해 조롱을 내뱉었으니, 그에 따른 벌을 받아야 했다.
제라온은 그가 말한 이들의 얼굴을 외우며 눈을 굴렸다. 무엇부터 하면 좋을지 착착 일의 순서를 계획하는 중간이었다. 황태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제라온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저들의 지위를 모조리 박탈해.”
“…….”
“중앙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해 둬야지. 혹시나 또 마주치면 애리얼이 불쾌해하지 않겠어?”
제라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반박해야 하는데, 그런 극단적인 처사는 귀족들의 반발을 살 것이라고 전해야 하는데, 누군가가 입을 꿰매 놓은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황태자가 너무 위압적인 분위기를 뿜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러실까.
황태자는 손익 계산이 철저했고, 절대 손해를 보지 않았다.
그건 허클리 백작 공녀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그랬다.
황태자는 그 백작 공녀를 특별하게 여기면서도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공녀가 조롱을 받아 화가 났다지만, 탄신 연회에 방문한 귀족에게 이 정도의 처분을 내리는 건 그답지 않았다.
어차피 변두리 귀족, 그들이 가진 보잘것없는 영지와 지위 따위를 박탈하는 건 어렵지 않다. 죄목이 모자라면 뒤를 캐서 새로 추가하면 그만이었다. 황태자가 가장 먼저 언급한 리튼 백작은 전쟁으로 어수선한 남부 지역에서 불법 도박장을 운영한 혐의를 이미 받고 있었다. 중앙에 들어오지 못하고 변두리를 오래 전전한 귀족들은 평민을 수탈하는 식으로 부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 건으로 줄줄이 엮으면 정당하게 비칠 것이다.
그래도 지위를 박탈하는 건 귀족들의 원망과 우려를 사겠지만…….
“미카엘.”
황태자가 그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대답을 재촉하는 서늘한 음성이었다. 제라온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 전하. 말씀하신 열아홉 명의 지위를 모두 박탈하고 영지를 회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