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27)화 (215/264)

밤 열 시.

애리얼은 황태자의 집무실 앞에서 선물 상자를 들고 기다렸다.

아홉 시 사십 분쯤에 황태자의 전속 시녀가 황태자의 전언을 알리고 갔다. 열 시까지 집무실로 와 줬으면 한다는 전언이었다. 애리얼은 홀에서 그가 은밀히 말했던 ‘연회가 끝나고, 나중에 따로.’가 지금이라는 걸 알았다.

우우우웅-

휴대폰이 울렸다.

복도 맞은편에서 데본시아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애리얼은 선물 상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데본시아의 생일.

그 뒤에 찾아오는 자신의 생일.

특별 엔딩.

그 마지막으로 향하는 관문.

내일이면 전부 끝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급격하게 긴장감이 차올라서 애리얼은 토할 것만 같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자 고개를 숙이며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열어 줄래?”

그는 선물 상자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말했다.

“열고, 꺼내서 직접 내 손에 쥐여 줘. 그때처럼.”

그때처럼.

아마 여름 정원에서 자신이 그에게 백합을 꺾어 건넨 때를 말하는 거겠지.

애리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러다 그의 호감도가 더 오르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감히 거부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북함은 묻어 두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한다. 지금 일이 틀어지면 안 되니까. 겨우 오늘까지 도달했으니까.

애리얼은 내밀었던 상자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당겨 왔다. 자꾸만 손이 떨렸다. 서툴게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흰 종이에 감싸 푸른색 비단 리본으로 묶은 백합 꽃다발을 꺼냈다. 무릎을 굽혀서 상자는 바닥에 놓아두고 양손으로 꽃다발을 쥐고 일어나 그에게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애리얼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봐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선 상태였다.

유지 마법으로 보호된 백합은 생기 넘치는 꽃잎을 예쁘게 펼치고서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데본시아는 제 앞으로 다가온 백합을 받지 않고 가만히 보다가 그 꽃잎만 톡 건드렸다.

“알고 있어, 애리얼? 제국에서는 관습적으로 꽃말을 중시해.”

기분이 나쁘다는 뜻일까.

“……네. 알고 있습니다.”

애리얼의 목소리가 그녀의 손처럼 가늘게 떨려 왔다. 평정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백합의 꽃말을 알아?”

“순결, 순수한 사랑입니다.”

“너는 날 그렇게 봐?”

애리얼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표정이 잘 관리되지 않았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본시아의 말투나 목소리는 특별히 차갑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내포한 뉘앙스는 꽤 선득한 것이었다. 순결, 순수. 그런 게 정말 제게 어울리냐고, 그는 추궁하는 듯했다.

“저, 저는…… 전하의 선물을 고민하다가 여름 정원에서의 일이 떠올랐어요. 그때 만났던 전하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서…… 그래서 백합을 드리고 싶었어요.”

애리얼은 최대한 횡설수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기도, 중간에 끊기기도 했으나 끝까지 이어졌다.

데본시아는 잠자코 그녀의 해명을 듣다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백합 꽃다발을 쥔 애리얼의 손등을 스치고 올라가 그 윗부분을 쥐었다.

애리얼은 곧장 손에서 힘을 풀었다. 손안에서 꽃다발이 빠져나갔다.

“고마워.”

그가 꽃다발을 들고서 생긋 웃었다.

애리얼도 그에 화답하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데본시아는 그녀에게 가만히 눈을 맞추다가 꽃다발의 백합을 한 송이 뽑아 들며 말했다.

“생일이니까, 하나만 더 부탁해도 돼?”

애리얼은 잠시 멈칫거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부드럽게 미소가 핀 그의 안면은 여느 때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조금 주저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괜찮아요. 네.”

“그러면 손 좀 내밀어 줄래?”

“어, 어느 쪽이요?”

“그냥 아무 손이나.”

무슨 속셈일까. 애리얼은 의아해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데본시아는 뽑아 쥐고 있던 백합 한 송이를 그녀의 오른손에 올려 주고는 상체를 숙였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애리얼은 움찔거리며 살짝 몸을 뺐다.

그는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전처럼 꽂아 줘.”

“전이라면…….”

“여름 정원에서처럼.”

데본시아는 어리광을 부리듯 두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애리얼을 재촉했다. 그때의 추억을 상기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백합을 선물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야.’

애리얼은 백합 줄기를 들어 그의 귓등에 살며시 끼워 넣었다. 어렵지도 않은 요구였고,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때처럼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금발이 스쳤다.

데본시아가 그때처럼 수줍게 웃었다. 뺨에 떠오른 홍조와 반달로 접힌 눈.

“어때? 어울려?”

바짝 긴장한 애리얼은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그는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우며 몸을 물렸다. 백합을 꽂고서, 왼손으로는 꽃다발을 안고서.

“오늘 와 줘서 기뻤어.”

그의 목소리는 취하기라도 한 듯 조금 들떠 있었다. 집무실 문고리를 쥐며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말이었다.

그는 이 시간까지도 일하는 걸까. 그것도 자신의 생일날.

애리얼은 그의 삶이 삭막하게 느껴졌다. 동정할 상대가 아닌데 동정심이 일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내일 봐, 애리얼.”

데본시아는 웃으며 애리얼에게 인사를 남겼다. 애리얼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사이 그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애리얼은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러갔다.

그동안 데본시아는 문에 기대어 멀어지는 애리얼의 인기척을 숨죽이고 들었다. 그 미약한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백합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백합의 향기가 어지러이 진동했다.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고양감에 몸이 떨렸다.

내일이면 끝난다.

“애리얼.”

그녀를 가질 수 있다.

데본시아는 오래도록 백합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

1월 1일.

신년과 함께 황태자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제국 수도에 고기와 밀, 과일, 설탕이 하사되었다. 수도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열리는 백작저의 연회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않았다.

애리얼 역시 제 생일 연회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연회가 아니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특별 엔딩에 관하여

*당신의 생일(1월/1일)에 일어납니다.』

어젯밤, 데본시아를 만나고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백작저로 돌아왔다. 무척 피곤했으나, 애리얼은 그다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일어났다. 긴장감에 눈이 감기지 않았다.

긴장 상태로 의자에 앉아 카논이 해 주는 단장을 가만히 받았다. 옅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 늘어트렸다. 레이스로 된 리본을 매고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아가씨, 표정이 너무 굳어 계시는데…….”

“아, 그…… 자꾸 긴장돼서.”

“하긴 워낙 쟁쟁한 분들께만 초대장을 보냈으니, 그러실 만도 하죠.”

카논이 공감을 보내며 적당히 화장을 마무리했다.

애리얼의 얼굴은 늘 그렇듯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이 얼굴도 마지막이구나.’

거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게마저 생각되는 외모였다.

‘오늘 눈에 담는 모든 것이, 이 세계에서의 마지막이야.’

그렇게 여기자 홀가분하기보다는 아쉬웠다. 카논을 볼 때는 눈물마저 핑 돌 정도였다.

그래서 애리얼은 괜스레 더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이 연달아 울렸다.

연회의 시작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더 남았는데, 벌써 귀빈이 도착했다.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애리얼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바짝 긴장해 곤두선 신경을 조금 가라앉히고는 차분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찍 와 줬다면 오히려 고맙다.

피곤한 연회까지 갈 필요도 없이 끝내면 되니까.

애리얼은 테이블의 휴대폰을 챙겨 들고서 담담하게 방을 나섰다.

***

백작저의 1층, 가장 큰 응접실에서는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카이라, 렉시우스, 레이신.

레이신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렉시우스와 스카이라가 연달아 도착했다.

애리얼이 들어서자 일면식도 없는 듯 무관심하던 셋의 낯빛이 바뀌었다. 화사한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진득한 애정이 고여 음울하게마저 느껴지는 얼굴이 애리얼을 향했다. 생일을 축하하러 온 게 아니라 장례식에 온 것 같았다. 그래도 눈빛만큼은 맹렬했다.

“신년 행사를 제치고 별 볼 일 없는 축하연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리얼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셋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가 닫혔다. 예쁘다. 그렇게 전하려고 했으나, 셋 모두 서로의 말이 겹칠 것을 눈치채고 칭찬을 삼켰다.

애리얼의 시선이 흘금 그들을 살피고 바닥으로 향했다.

셋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애리얼을 바라보다가 다른 곳을 보다가 하며 느릿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시선은 집요하게 피했다. 이 자리에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철저하게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했다.

첫 순번보다는 마지막 순번이 되고 싶은 그들은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수를 빼앗기는 것도 달갑지는 않은 모양인지, 이렇게나 일찍 와서 한 응접실을 공유한다.

응접실을 가득 채우는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질식할 것같이 무겁다.

폭풍 전야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애리얼은 이 기 싸움과 같은 현장에 끼어 있을 기력이 없었다. 더 있는다고 그들이 선물을 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스카이라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상대에게 가장 엉망으로 생일을 챙겨 줬고, 그런 그에게 제대로 사과할 기회도 없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마지막이어야 하니까…….

“그럼 저는 준비할 것이 있어서, 연회 때 뵙겠습니다.”

애리얼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셋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따라오는 사람은 없구나.’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며 애리얼은 복도를 걸어 나갔다.

달칵, 탁. 뒤에서 응접실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애리얼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척 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그녀의 걸음에 맞추어 발소리가 따라왔다. 그녀를 부르지도, 앞지르지도 않고 그렇게, 천천히 뒤를 쫓는 소음이 미약하게 이어졌다.

애리얼은 저택의 후문에 다다라서야 몸을 홱 돌렸다.

따라오던 레이신이 멈칫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정복을 단정히 입은 그의 모습이 어색하게 보였다. 아마 그에게 옷을 이렇게 갖추는 일은 손에 꼽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오늘을 특별하게 여긴 거겠지.

이렇게 신경 써 준 것이 고맙기도 하면서 부담스러웠다.

“공자 서하,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생일 축하해.”

“……감사합니다.”

뜻밖의 축하에 애리얼의 대답은 조금 느렸다.

“선물을 주고 싶었어. 이왕이면 마지막에.”

그가 겉옷의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며 말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근데, 먼저 줘도 상관없을 거 같아서. 오히려 그게 제일 괜찮은 것도 같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주는 게 나한테도 더 좋고.”

하나둘, 꺼내 펼친 종이를 겹쳐서 애리얼에게 다가왔다.

“선물이야.”

레이신은 서류 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재산 목록]

서류의 첫 장에 적힌 글자는 애리얼을 까무러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인간이 도대체 뭘 선물로 주는 건가. 애리얼은 선뜻 받아 들지 못하고 물었다.

“이게…… 뭔가요?”

“나한테 귀속된 재산이야. 지금은 영지 일부랑 마수, 재물이랑 돈 조금이 다지만 공작이 되고 나면 솔렘의 전부를 가질 테니까, 선수금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줘.”

그 말을 듣는 애리얼은 기절할 것 같았다.

이 인간은 지금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솔렘에서 알면 까무러칠 일이었다. 미래의 공작이 앞으로 제가 가질 것들을 전부 애리얼에게 주겠다고, 장부를 넘기고 있으니 말이다.

애리얼은 곤란해하며 그의 얼굴과 서류를 번갈아 보았다.

레이신의 얼굴은 무척 진지했다. 그래서 도리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제 마음의 크기를 표현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이걸 빌미로 저에게 족쇄를 걸려는 건지.

어쨌든 진심인 건 확실했다.

애리얼은 심각한 얼굴로 서류를 받아 들었다.

거절할 수는 없었다. 받아야만 한다. 특별 엔딩을 보려면 어쩔 수 없다.

“감사합니다, 서하.”

서류를 꽉 쥐고서 허리를 푹 숙였다. 그래서 레이신이 어떤 얼굴인지는 보지 못했다. 어쩌면 일부러 피하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응.”

감정을 알 수 없는 그의 무심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흩어졌다.

『▽특별 엔딩에 관하여

*공략 대상 전원(히든 캐릭터 제외)에게서 직접 생일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레이신 디 솔렘에게 귀속된 모든 재산

1/4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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