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과 연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 연회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백작의 딸인 애리얼이었으나, 애리얼은 주인공이 되기 싫어서 연회 홀 한구석에 빠져 있었다.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백작 주위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가끔 애리얼에게 축하를 건네는 게 다였다. 애리얼의 생일보다는 신년에 대한 축하가 더 많았다.
백작은 이런 분위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미간을 구기는 일이 잦았다. 안 그래도 딸아이의 생일이 신년과 맞물려 주목을 받지 못하는데, 이곳에 초대받아 온 손님들까지 이러니…….
‘나한텐 솔직히 이게 더 편한데.’
애리얼은 백작에게서 멀찍하게 떨어져 상황을 관망했다. 그녀 자신조차 제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 오늘은 특별 엔딩이 일어나는 날이었고, 선물을 받아 진짜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두 시.
애리얼은 백작에게 부탁해 일부러 이른 시각에 연회를 열었다. 연회 시각이 늦으면 제때 선물을 받지 못할까 봐 손을 쓴 것이다.
‘지금까지 받은 선물은 한 개.’
레이신은 어딜 갔는지 선물을 건네자마자 모습을 감추었다. 계속 홀에 있던 탓에 휴대폰을 확인하지 못해서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어차피 레이신에게서는 선물을 받았다. 아마 큰일은 없으리라.
‘이제 남은 선물은 세 개.’
애리얼은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데본시아는 아직도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신년제가 한창이라지만 엄연히 휴일인 날이었다. 그에 걸맞게 마지막으로 본 데본시아의 위치는 황성이었다. 신년을 맞는 당일에는 대부분의 행정관이 출근하지 않으니, 그 역시 쉬는 중일 것이다. 신년제가 열리는 수도로 나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안 와? 내일 보자고까지 했으면서…….’
초조함이 불안으로 번져 데본시아를 향한 원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는 눈에 힘이 들어갔다. 덩달아 눈썹이 찌푸려졌다.
“누구 기다린다고 자꾸 시계를 봐?”
애리얼은 고개를 돌렸다. 힘주느라 가늘어졌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렉시우스가 상체를 기울이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나머지 그의 가슴팍을 확 밀어냈다. 까만 넥타이가 그녀의 손에 눌려 구겨졌다. 그럼에도 렉시우스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밀려났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한 것을 그가 붙잡았다.
어깨를 잡아 준 그가 피식 웃으며 몸을 물렸다.
“기다린 게 나는 아닌가 보네. 이렇게 보자마자 밀치는 거 보면.”
“놀라서 그랬어…….”
“두 번 놀라면 꺼지라고 그러겠다.”
그가 빈정거렸다. 토라진 모양새가 아이 같았다.
애리얼은 그를 살피다가 그의 목에 걸린 은색 초커를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연회 홀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백작과 그녀의 지인들을 보며 말만으로 그를 달랬다.
“미안해. 정말 그냥 놀라서 그런 거야.”
“나도 알아.”
“…….”
“근데 내가 아니라 다른 놈이어도 그랬을까.”
렉시우스의 섬뜩하게 빠른 눈치가 애리얼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녀가 애써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그를 향한 거부감, 그리고 차별. 그는 계속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애리얼이 자신과 있는 걸 무척 불편해하는 것을. 자신을 볼 때는 미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표정이라는 것을. 그러나 다른 누군가를 볼 때는 흔적도 없는 것 같던 그 미련이 드러난다는 것을…….
“그 생각 때문에, 돌 것 같아.”
그가 조용히 진심을 토로했다.
애리얼은 감히 그를 살필 수 없었다. 렉시우스라면 제가 아무리 무표정을 가장해도 그 안에 숨은 진심을 정확하게 찾아 파악할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애리얼은 그가 불편했으니까. 미련은 그가 아닌 다른 이에게 두었으니까.
하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일까.
“나에게는 전부 똑같아.”
애리얼의 음성은 올곧았다. 태도는 차분하고 초연하고, 그리고 결연했다.
전부 버릴 거니까.
그러니까 누구에게 미련을 더 두든 결국은…….
“다 같아.”
고개를 돌리며 통보했다.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어깨를 잡아 제게로 당겨 왔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그와 눈을 맞추었다. 금색 눈이 첨예하게 빛나며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딱딱하던 그의 얼굴이 쓰라리게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비소를 지었다. 그녀가 진심인 걸 그 빠른 눈썰미로 알아보았는지.
“선물 줄까?”
그가 물었다.
애리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애리얼을 꽉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로, 으스러뜨릴 듯이 강한 힘으로 그녀를 옭아맸다.
갑작스레 폐부가 눌린 애리얼이 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뭐든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난 다 줄 수 있거든.”
“선배…….”
“근데 넌 아무것도 안 말할 거잖아.”
“선…….”
“너 정말 선물을 원하는 게 맞아? 나한테 뭐라도 원하는 게 있긴 해?”
그가 억눌린 음성을 줄줄 토해 냈다.
“난 이미 모든 걸 너한테 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넌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은 것 같아.”
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반항할 수도 없었다. 그의 힘에, 감정에 짓눌려 뭉개질 것 같았다.
“그래서 뭘 줘야 할지 모르겠어…….”
그의 깊은 고뇌가 애리얼에게 전해졌다.
몇 날 며칠, 그녀가 저를 돌아볼 선물을 고민했다.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뭘 줘도 돌아보지 않을 것을 알았다. 눈치가 빨라서, 답을 너무 빨리 깨달았다.
“그러니, 그냥 내 감정이라도 받아, 애리얼.”
그녀를 만나고서 오늘까지, 켜켜이 응축된 감정이 열기를 타고 그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짙은 숨결이 그녀의 귀로 파고들었다.
“사랑해.”
허억, 윽. 애리얼은 헐떡거렸다. 숨이 막혀서 호흡이 힘겨웠다. 질식할 것 같은 고백이었다. 붙들린 채 억지로 그의 고백을 들었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애리얼이 소리조차 못 내고 몸을 굳히자 그가 겨우 힘을 풀었다. 올가미 같던 팔이 멀어졌다.
이제야 짓눌려 있던 폐부가 편하게 공기를 들이켰다.
“하아……. 선배…….”
가까스로 풀려난 애리얼의 시야로 홀에 있던 사람들의 놀란 면면들이 들어왔다. 백작까지도 놀라서 애리얼을 주목했다.
생일날, 연회 홀에서 손님들을 앞에 두고 렉시우스에게 안겼다.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도망치고 싶은 그녀와 달리 렉시우스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녀와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히고서.
“주인님.”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의 은색 초커가 은밀하게 빛났다.
주변의 시선이 잔뜩 모여들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황자비로 지정된 이인데…… 정말 정부를 들인 건가, 저 나이에. 그런 종류의 웅성거림.
백작이 사납게 인상을 쓰며 그들을 제지했으나 이미 애리얼이 듣고 난 후였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진저리 나게 얽히는 이 복잡한 관계가 끔찍했다.
그런데도 렉시우스는 저를 애리얼의 정부 취급 하는 수군거림을 대놓고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뭐라도 될 수 있으면 그만인 사람처럼. 처절한 눈빛을 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크기가 그 표정에 드러났다.
애리얼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곳의 모든 게 견디기 힘들어서 드레스 자락을 쥐고 달리듯이 홀을 빠져나갔다.
빨리,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복도를 마구 달려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정원, 아니, 후원. 후문을 통과해 눈이 내리는 바깥으로 뛰어들었다.
푹푹, 구두가 빠졌다. 고작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쌓인 눈이 드레스에 잔뜩 엉겨 붙었다. 까만 머리칼에도 눈이 달라붙었다.
누구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 그제야 애리얼은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특별 엔딩에 관하여
*공략 대상 전원(히든 캐릭터 제외)에게서 직접 생일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레이신 디 솔렘에게 귀속된 모든 재산
-렉시우스 크레시앙의 고백
2/4 달성』
‘이런 것도 선물로 치는구나.’
애리얼은 헛웃음을 쳤다. 진심이 담겨 있기만 하면 뭐든 된다는 건가.
그 숨 막힐 것 같던 고백이 온전히 진심이라고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춥고, 두렵고, 온몸이 조이는 듯하다.
사박사박.
숨죽인 그녀의 뒤로 눈 밟는 소리가 났다.
뒤늦게 따라온 이가 겉옷을 벗었다.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덮어 주며 다가와 섰다.
“괜찮아?”
그가 물었다. 애리얼은 그의 푸른 눈을 마주 보기 위해 표정을 가다듬었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은 티 나지 않게 드레스에 낸 주머니로 숨기고 그가 걸쳐 준 코트 옷깃을 여몄다. 조용히 호흡을 두어 번 한 뒤에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스카이라.”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는 일은 없었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여느 때의 자신을 연기하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스카이라의 표정은 꽤 엉망이었다. 걱정으로 일그러진 표정은 생일을 축하하러 온 이의 것이라곤 볼 수 없었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은 마치 심해와 같았다.
그의 어깨로 눈이 쌓였다. 빳빳하게 다린 정장이 조금씩 젖어 갔다.
“날이 추워. 안으로 들어가자.”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조용한 응접실로 들어갔다.
애리얼은 코트를 벗어 눈을 털어 주고는 그에게 건넸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코트를 응시하다가 마지못해 받아 들더니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코트를 빠져나온 그의 손에는 붉은색의 벨벳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애리얼은 그게 뭔지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다.
반지 케이스.
스카이라는 그걸 쥐고서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할 말이 있어, 애리얼 허클리.”
그녀가 가장 겁내는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서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붉은 상자가 열리고, 하얀 쿠션 사이에 끼워진 은빛 고리가 보였다. 백금으로 된 반지, 그 중앙에 동그랗게 세공해서 박아 놓은 검은색의 보석이 조명 빛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때로는 흑연처럼 연한 빛깔을 발하기도 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보석. 그는 오래도록 준비해 온 반지를 앞으로 내밀며 애리얼을 올려다보았다.
“나하고 약혼해 줘.”
끝끝내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애리얼은 낭패라는 심정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열의라곤 하나도 없는 눈이 허망하게 반지를 응시했다.
황자비로 억지로 지정하던 때에 비해서 수위는 낮아졌으나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를 맺어 달라는 것.
『*그 어떤 공략 대상과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은 상태여야 합니다.』
애리얼은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혀를 깨물며 참았다.
받는 순간에 특별 엔딩이 어그러지고 말 텐데,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