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이게 선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고백에 이어 청혼.
전부 억지로 강요하는 것 같은 선물이었다. 생일을 축하하는 게 아니라 그 생일을 빌미로 요구를 하러 온 것 같다. 그렇게 할 정도로 이들이 애정에 굶주린 건가.
이제 와서는 이들이 밉다기보다는 그냥 이렇게 된 원인이 원망스러웠다.
호감도를 올려야만 탈출할 수 있는 이 게임이 원망스럽다.
“죄송합니다.”
애리얼은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다른 선물을 주세요. 이건 제게 선물이 아니에요.”
더불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것을 담담히 요구했다. 그에게서 선물을 받아야만 했으니까. 청혼이 아닌 다른 선물을, 아무거라도 받아야만 했으니까.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는 잠깐 상처받은 표정을 했으나 금세 지워 버렸다. 가라앉은 무표정에는 익숙함이 묻어났다. 거절보다는 고통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리라.
“알았어.”
그는 담백하게 대답하며 정장의 겉옷 안주머니에 손가락을 넣었다. 금색의 문양이 언뜻 보이는 종이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집혀 나왔다. 그는 작게 접힌 그 종이를 펴서 애리얼에게 보여 주었다.
[애리얼 허클리를 제국의 황자비로 명한다.]
그 서류에는 놀랍게도 직인이 찍혀 있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직인이 이미 찍혔다고 들었는데, 사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황자비로 지정했다는 것도 그냥 말만이었을 뿐인가……. 애리얼은 당황한 눈길로 서류를 바라보았다.
스카이라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그녀가 보는 앞에서 찢었다. 애리얼에게 절망을 선사했던 그 문장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그의 손에 점점 조각이 났다. 원래의 문장이 뭐였는지 모를 정도로 잘게 나뉘었다.
그는 조각난 종이를 구겨서 쥐고는 마력으로 불을 피웠다. 퍼즐 조각처럼 찢어진 종잇조각들이 파랗게 타들어 가 이윽고 새까만 재 가루가 되었다.
“이게 네가 가장 원하는 선물일 것 같네.”
스카이라는 재가 된 서류의 가루를 털어 내고는 코트를 집었다.
“생일 축하해, 애리얼.”
무표정한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서 축하를 전했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스카…….”
애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그를 붙잡으려고 멋대로 뻗어지던 손도 거두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을 떨궜다. 둘 모두에게 참혹한 생일 선물이었다.
애리얼은 애써 잊으려 애쓰며 휴대폰을 켰다.
『▽특별 엔딩에 관하여
*공략 대상 전원(히든 캐릭터 제외)에게서 직접 생일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레이신 디 솔렘에게 귀속된 모든 재산
-렉시우스 크레시앙의 고백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과의 결혼 계약서 파기
3/4 달성』
이제 한 명 남았다.
우울했던 감정을 밀어내며 급격하게 긴장감이 차올랐다.
애리얼은 손을 움직여 데본시아의 상태 창을 켰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그의 위치는 여전히 황성이었다.
애리얼은 근처 테이블에 놓인 탁상시계를 흘금거렸다. 아직 오후 세 시도 되지 않았다.
오늘이 가기 전까지는 와 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안 되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애리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까지 찾아가서 받는 선물이 과연 진심이 담긴 선물일 수 있을까.
극심한 불안감이 훅 끼쳐 들었다.
데본시아는 회귀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섬뜩한 추측이 일어난다.
혹시 그는 특별 엔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지 않을까.
예전에 자신이 실패했던 때의 기억을 그는 가지고 있을 테니까…….
‘아니, 아니야…….’
애리얼은 파리해진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에는 조건이 달랐을 것이다. 특별 엔딩은 이번 회차에만 적용되는 조건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렉시우스가 그런 소리를 했을 리 없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렉스, 렉스 하면서 거리낌도 없이 나한테…….”
저번 회차에서도 특별 엔딩이 목표였다면, 그를 렉스라고 부르지는 않았겠지.
이전 회차에서는 조건이 달랐을 게 분명했다.
애리얼은 불안하게 몰려드는 추측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응접실을 나섰다.
“애리얼!”
“어머니?”
홀에 있어야 할 백작이 그녀를 부르며 다가왔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은 누가 봐도 딸을 아끼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괜찮니, 애리얼?”
“네, 괜찮아요. 그냥 조금 놀라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그랬구나. 미안하다……. 내가 잘 막았어야 되는데.”
“괜찮아요.”
“아니야, 내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인데…….”
백작이 떨리는 손으로 애리얼의 뺨을 감싸 쥐었다.
냉담하던 백작은 조금씩 천천히 변해서, 오늘, 그녀를 너무나 아끼는 어머니가 되어 그녀를 위로했다.
애리얼은 아릿하게 치미는 쓰디쓴 감정을 삼키며 표정을 죽였다. 차마 웃을 수는 없어서 무미건조하게 눈을 내리깔고 백작의 시선을 피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 조건 없이 그녀를 지원하고 그녀를 믿어 주던 때부터…… 백작은 직접적인 표현만 없었을 뿐, 그녀를 줄곧 아껴 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오늘로 마지막이다. 오늘이 지나면 백작은 다시 자신의 진짜 딸을 되찾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잘해 주세요. 감정이 옅더라도, 방에서 나오지 않더라도, 그 애가 진짜니까. 이번에는 스스로 방을 나오도록,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 살아갈 수 있도록…… 잘해 주세요. 진짜 애리얼 허클리에게.’
애리얼은 제 뺨을 어루만지는 백작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아 내렸다.
“전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기댈 곳 하나 없던 그녀에게, 카논과 함께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백작의 방식대로, 그녀에게 맞추어 주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백작도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백작의 미소였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해가 졌다. 바깥은 이제 어두웠다. 정원에 쌓인 눈이 하얗게 빛났다.
연회에는 와인이 올라왔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차분하기만 하던 연회에 조금 활기가 돌았다.
오후 일곱 시.
애리얼은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백작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홀에 있다가 다시 복도나 테라스로 나가서 휴대폰을 보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레이신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고, 스카이라도 마찬가지로 떠났다. 렉시우스는 가끔 홀을 들락거리긴 했으나 애리얼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따금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다가 몸을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아직 선물을 받지 못한 유일한 공략 대상, 데본시아의 위치는 여전히 황성이었다.
백작저에서 황성까지는 두 시간이 넘게 걸린다. 황성에 가려면 지금 출발해야 했다. 그러면 아홉 시에는 도착해서 황태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늦으면 방문 자체를 거절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야 한다. 연회가 파장이 되든 말든, 특별 엔딩을 보려면 어쩔 수 없다.
백작저에는 차가 한 대 있었다. 백작에게 부탁하면 아마 탈 수 있을 것이다.
애리얼은 결심하고서 곧장 백작에게 향했다.
와인 잔을 들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백작이 애리얼을 보고서 말을 멈추었다.
애리얼은 백작의 지인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백작을 마주 보았다.
“어머니, 차를 준비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황성으로 가고 싶습니다.”
“애리얼…….”
백작은 곤란한 눈치였다.
애리얼은 물러나지 않고 허리까지 숙이며 정중히 부탁했다.
“급히 황성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부디 부탁드립니다.”
백작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녀는 어두워진 창밖을 빠르게 훑고는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둘러서 있던 백작의 지인들은 고개를 까딱이며 물러났다.
“이리 오렴, 애리얼.”
백작이 그녀를 테라스로 불러냈다.
애리얼은 곧장 백작의 뒤를 따라갔다.
테라스에는 얕게 눈이 쌓여 있었다.
백작이 난간을 덮은 하얀 눈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리둥절해하는 애리얼을 마주 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애리얼, 눈이 많이 왔단다. 신년이라 도로를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지금쯤이면 길에는 차가 다닐 수 없을 만큼 눈이 쌓였을 거야.”
“하지만 이 테라스만 해도 눈이 별로 쌓여 있지 않은데……. 아…….”
애리얼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다가 탄식하며 입을 가렸다. 저택에서는 사용인들이 계속 눈을 치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테라스에는 일정량 이상으로 눈이 쌓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애리얼은 눈이 적게 온다고 여기고 차를 탈 생각을 했다. 도로가 눈에 막힌 줄도 모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성에 무슨 일이 있는 거니? 꼭 지금 가야만 해?”
백작이 걱정스레 물었다. 애리얼은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를 꼭 만나야 해요.”
“황태자 전하는 오늘 신년제 때문에 바쁘실 텐데, 내일 만나면 안 되니?”
“네. 꼭 오늘 만나야 해요. 오늘이 아니면…….”
애리얼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불안하게 떨었다.
오늘이 아니어도 내년이라는 마지막 기회가 있지만…… 내년 일 월 일 일까지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렉시우스의 하트는 다섯 개 반이다. 데본시아와 스카이라는 다섯 개다. 애리얼은 내년까지 오버히트가 되지 않도록 거리를 조절하며 버틸 자신이 없었다.
반드시 오늘 끝내야만 한다.
하지만 차는 쓸 수 없다. 그러니 남은 수단은 하나뿐이다.
‘순간 이동.’
하지만 스스로 할 수는 없으니 도움을 받아야 했다. 황성의 주변까지 순간 이동 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마법사에게.
“애리얼?”
“차는 괜찮아요, 어머니.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시간이 없다. 애리얼은 걱정스레 저를 부르는 백작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홀로 들어왔다.
순간 이동. 그것도 장거리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하다.
스카이라, 렉시우스, 레이신…….
애리얼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들에게 부탁하겠는가. 그나마 레이신이 제일 나았으나, 그는 선물을 건넨 뒤 홀연히 사라진 상태였다.
스카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혼 계약서를 갈가리 조각낸 후 백작저를 떠났다. 애초에 그에겐 부탁하기도 싫었다. 황태자를 만나야 하니 황성에 가 달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아무리 떠나는 마당이라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렉시우스인데, 이쪽도 녹록지 않았다. 그가 과연 황성으로 이동해 줄까.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애리얼은 애타는 마음으로 그를 찾아 휴대폰을 켰다. 주변의 시선은 이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
▷현재 위치: 제국 수도(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애리얼은 화면을 보고서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백작저에 있던 그의 초상화가 사라져 있었다.
그마저 없으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
지이이잉-
절망에 구렁텅이로 떨어지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백작저의 조감도에 갑작스럽게 휘아킨의 초상화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