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30)화 (218/264)

순간 이동을 했음이 틀림없는 등장이었다.

애리얼은 휘아킨이 나타난 위치를 향해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저택의 출입문이었다. 1층의 왼쪽 끝에 있는 홀에서 나와 복도를 직진했다. 얼마 안 가서 하녀에게 우산을 맡기는 휘아킨이 보였다.

애리얼은 그가 보이자 걸음 속도를 줄였다.

군청색 케이프 코트의 단추를 풀던 그가 애리얼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선배님.”

“순간 이동 한 거지?”

“…….”

“직접 했어? 아니면 아리앨라가?”

“선배님, 좀 진정…….”

그가 말하는 도중에 출입문이 열리며 아리앨라가 등장했다. 웃는 얼굴로 로브에 묻은 눈을 탁탁 털다가 애리얼을 보고서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애리얼, 생일 축하해요!”

“클라우스 백작님.”

아리앨라의 밝은 인사 뒤에 휘아킨의 차가운 음성이 이어졌다.

아리앨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다가 둘의 얼굴을 슥 살피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저는 먼저 가서 백작님께 인사드리고 올게요.”

“아리앨라! 잠깐만…….”

애리얼이 아리앨라를 붙잡으려 하는데 휘아킨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저하고 얘기 좀 해요.”

“난……!”

“금방 다시 클라우스 백작님과 얘기 나누게 해 드릴 테니까, 잠시만 시간을 내 주세요.”

그제야 애리얼은 차분함을 되찾았다. 렉시우스까지 사라진 탓에 너무 격앙되어 있었다. 아직 오후 일곱 시니, 여유가 있을 텐데. 이성을 잃고 지나치게 급해져 있었던 것을 인지하고서 조심스레 한 걸음 물러났다.

“알았어.”

“고마워요. 먼저 가 보세요, 클라우스 백작님.”

휘아킨이 말하자, 아리앨라는 애리얼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홀을 향해 직진했다.

둘만 남았다.

긴장과 불안이 치솟는다. 옆에서 우산을 받아 들던 하녀는 일찌감치 자리를 피한 상태였다.

애리얼은 그가 다시 제게 환각술을 걸까 봐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그도 그걸 아는지 몸을 물렸다.

“이 정도면 될까요?”

휘아킨이 다섯 발 정도 뒷걸음질을 치고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이보다 더 먼 거리에서도 네 환각술 한 방에 당했는데.”

그러자 그가 양손을 쫙 펴고서 가슴께로 들어 보였다. 오른손 약지와 검지에 끼워져 있던 평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열 개의 손가락이 전부 비어 있었다.

“마법은 못 쓰니까, 안심하세요.”

“숨겨 왔을지 어떻게 알아.”

“뺏겨서 없어요. 선배님의 종자가 친히 와서 가지고 갔어요.”

선배님의 종자. 렉시우스를 말하는 것이다.

렉시우스 정도면 아무리 휘아킨이 마법을 쓰고 날뛰어도 이길 수는 없었을 터였다. 반지를 빼앗긴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더군다나 그는 대공저에서 휘아킨이 저를 데려가는 것도 봤었다. 렉시우스의 능력이라면 공작저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거고, 휘아킨이 쓰는 마도구를 알아보는 것도 금방이었겠지.

동기는 충분하고, 능력도 확실했다. 다만 시기가 이상할 뿐.

그런 식으로 쳐들어와서 휘아킨을 무력화할 거라면 좀 더 일찍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늦게 왔을까.

렉시우스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생각이 길어지려고 했다. 지난 2년간 생긴 버릇이었다.

애리얼은 사념을 끊어 내듯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전부 끝나는 마당에 렉시우스가 뭘 했든 뭐가 중요하단 건가. 휘아킨이 의심스럽지만 검증을 하자면 시간이 걸린다.

“원한다면 제 사지를 묶어 놓고 말해도 돼요.”

“됐어.”

그럴 시간까지는 없다.

“할 말은?”

“여기서 말해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는데.”

“상관없어.”

“제 말은, 선배님이 곤란해질 거라는 뜻이에요. 전 상관없어요. 홀에 가서 소리칠 수도 있어요.”

“……응접실에서 얘기해.”

애리얼은 근처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곧장 뒤따라왔다.

애리얼은 문이 닫히기도 전에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해요.”

휘아킨이 문을 찰칵, 닫고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애리얼은 침착하게 감정을 눌렀다. 그와 실랑이를 해 봤자 시간만 길어질 뿐이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 차분하게 눈을 내리깔고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입을 열었다.

“생일 축하해요, 선배님.”

“…….”

“선물도 준비했어요. 당연히 환각술 같은 건 안 걸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려던 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하지만 선배님의 생일인데…….”

“나도 안 줬잖아. 괜찮아. 안 줘도 돼.”

“선배…….”

“그리고 네가 주는 거, 별로 안 가지고 싶어.”

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윽고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서 안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냈다. 그 손에는 새하얀 머리핀이 쥐어져 있었다. 벚꽃을 닮은 꽃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가지 끝에 진주알이 열매처럼 잔잔히 박혀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착용할 법한 머리핀이었다.

신경 써서 고른 게 분명했다.

휘아킨은 떨리는 손으로 애리얼에게 머리핀을 내밀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가두고, 세뇌해서…….”

“…….”

“근데 저는요, 선배님이 너무 가지고 싶었어요.”

“…….”

“저, 선배님을 좋아해요. 너무 좋아해요. 선배가 없으면 살기 싫을 정도로 좋아해요.”

“…….”

“좋아해요, 애리얼.”

애리얼은 가만히 들었다. 그의 사죄도, 고백도. 떨리다가도 점차 차분해지고, 음습해지는 그 목소리를. 끝내는 애달파서 끙끙거리듯 고백을 전하는 그 음성을, 전부 들었다.

제 생일을 챙겨 주려고 온 그의 모든 감정을, 들었다.

마지막이니까.

가만히 듣고, 제 생각을 전했다.

“좋아하면, 감금하면 안 되는 거야. 세뇌도 하면 안 되는 거야.”

불우했던 그의 과거는 면죄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어리고, 자신은 떠날 테니까, 굳이 매몰차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충고라도 주고 싶었다.

“그런 짓으로 망가지기 시작하면, 더는 그 사람이 아니야.”

그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를 꽉 깨물고, 그러다가 낯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저는,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애리얼.”

그의 잿빛 눈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당신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요. 망가진 당신이라도 가지고 싶어요.”

정제되지 않은 집착과 애정이 그의 두 눈을 더욱 탁한 색으로 물들였다.

“……저는 미친 건가요?”

그가 물었다.

애리얼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람은 다…… 조금씩은 미쳤어. 나도 완전히 정상은 아니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인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다만, 절제하면서 살 줄 알아야 해. 필요하다면 치료도 받고.”

“그러면 제 맛 간 머리를 고칠 수 있다는 뜻인가요?”

“…….”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선배님. 이게 치료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 순간에도 선배가 가지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

“괜찮아. 참을 수 있을 거야.”

애리얼은 그가 내민 하얀 머리핀을 받아 쥐며 말했다.

“넌 괜찮을 거야.”

그의 손 떨림이 멈추었다.

우우우웅-

휴대폰이 울렸다.

“난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이렇게 챙겨 줘서 고마워.”

애리얼은 그가 건넨 하얀 머리핀을 손에 쥐고서 희미하게 웃었다.

휘아킨은 뺨을 붉혔다.

***

휘아킨은 애리얼을 보내고서 홀로 응접실에 남았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발작과도 닮은 감각이었다. 이런 감정은 병이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휘아킨은 제가 치료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를 도와줄 사람은 그녀뿐인데, 하필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을 만큼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안 될 것이다. 그녀가 치료를 완수하기도 전에 그녀를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그녀는 제가 망가진 그녀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아니다.

아아, 선배님. 당신은 제가 뭘 생각하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망가진 당신도, 넘치게 사랑할 수 있어요.

당신이기만 하면, 나는 사랑할 수 있어요.

그는 홍조로 물들어 절절 끓는 뺨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뺨이 식혀지긴커녕 손등이 뜨거워졌다.

무뎌진 감각을 까맣게 태우는 감정이 너무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우면서도 희열을 느낀다.

고통마저 소중했다.

***

신년이 밝은 날.

황제가 서거했다.

황성은 제국의 고위 귀족들을 긴급 소집으로 불러들였다.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은 대공가의 장남인 렉시우스 크레시앙이었다. 그는 정오에 전한 소집 명령에 오후 여덟 시가 넘어서야 응했다.

느지막이 도착한 그는 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랐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벌써 일곱 시간도 전에 오신 데다 조회장에서만 두 시간을 대기하셨습니다.”

“알았어, 그만해. 이렇게 왔잖아.”

렉시우스는 메튼의 말을 적당히 한 귀로 흘리며 느릿하게 북관으로 들어섰다.

사실 그가 없더라도 일에 별 차질은 없을 텐데, 왜 황성에서 기어코 저를 부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회장에서 서거에 애도를 표할 것도 아니고. 해 봐야 죽은 황제의 장례 절차나 즉위 시기 같은 걸 의논하려고 부르는 거 아닌가. 그런 거면 딱히 그의 의견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애리얼의 종으로서 엄연히 미래를 버린 자신이 왜 그딴 걸 함께 논의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능숙하게 짜증을 갈무리한 그는 무표정으로 조회장에 다가섰다.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고위 귀족들이 빼곡하게 자리한 조회장. 그 끝자리, 황제가 앉아야 할 상석에 재수 없는 얼굴이 보였다. 데본시아, 그가 팔걸이에 팔을 세우고 관자놀이를 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싱긋 미소를 짓는 얼굴에 렉시우스는 불길한 직감을 느꼈다.

아무리 대리여도 절대 선을 넘지 않고 자리를 지키던 놈이, 황제가 죽자마자 선을 넘었다. 버젓이 황좌에 앉은 것이다. 그러고서 처음 저지른 일이 효율도 개뿔 나지 않는 소집 명령이다. 비효율적인 거라면 죽어도 거부하던 자식이, 고작 저 하나 안 왔다고 대기를 두 시간이나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의도적인 시간 끌기였다.

자신이 늦게 올수록 데본시아의 의도대로 되는 거였다.

그걸 조회장에 들어서고 나서야 알았다.

렉시우스의 얼굴이 낭패감에 물들었다.

그 구겨진 낯을 보며, 데본시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다. 참으로 비통한 기분이지만, 논의할 건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모두 착석하라.”

“존명.”

모인 귀족들이 새로운 제국의 황제를 향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렉시우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 안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당했다.’

뒤늦은 자각과 함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