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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32)화 (220/264)

절망적으로 실패했다. 내년을 노리는 것도 불가능한 결말. 차악도 쥐지 못하고 최악으로 떨어졌다.

향이 짙은 백합이 산들거린다. 그녀에게 주어진 지옥이었다.

하얀 지옥이었다.

애리얼은 제게 주어진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했다.

쓰러진 그녀를 데본시아가 소중하게 안아 들고서 중정의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위한 하얀 황후궁이었다.

***

조회장에서의 의미 없는 회의가 끝난 후, 렉시우스는 데본시아의 뒤를 밟으려다가 발길을 돌렸다. 지금 데본시아를 따라가는 건 위험했다. 데본시아는 이 일을 오래 계획했다.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을 터.

적의 홈그라운드에 친히 들어가 줄 필요는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인해 둘 사안이 있다.

“카스트로, 너는 대공비 전하를 모시고 먼저 남관으로 가 있어라.”

“그럼 공자 서하께서는…….”

“할 일이 있다.”

렉시우스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의 말투는 딱딱했고, 표정은 건조했다. 감히 알려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메튼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대공비가 대기 중인 응접실로 향했다.

렉시우스는 메튼이 응접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고, 날씨도 좋지 않았다. 황태자는 호출에 응해 장장 열 시간 가까이 대기한 귀족들에게 남관을 객실을 내주었다. 황자를 제외하고, 오늘 모인 귀족들은 모두 남관에 머물렀다.

그렇기에, 북관에 있는 그를 제지할 인물은 없다.

북관 복도를 활보해 나가기 전, 렉시우스는 잠시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일 년 반 전, 데본시아의 세뇌 마법에 당했던 치욕스러웠던 그날의 잔여 기억을 더듬었다. 드물게 이성을 잃고 그를 공격할 정도로 데본시아를 예민하게 만들었던 그 공간. 사방이 신성 술식으로 도배가 된 방. 그곳을 찾아야 한다.

렉시우스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나갔다. 어쩌면 데본시아의 약점이 될 그 공간은 분명 황성의 지하에 있었다. 그날, 지워지지 않고 남은 유일하게 확실한 정보였다.

황성은 북관과 동관에만 지하가 있었다. 하지만 렉시우스는 북관과 동관으로만 수색 범위를 한정하지 않았다. 데본시아라면 아예 다른 곳에 지하를 파 두고 공간을 마련했을 가능성도 충분했으니까. 우선은 지하가 있는 북관과 동관을 수색한 후에 다른 공간도 파 볼 생각이었다.

“……대공자님?”

내려놓은 지 벌써 석 달이 된 지위로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렉시우스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날카롭게 시선을 준 끝에 애리얼과 닮은 머리칼이 보였다. 구불구불한 흑발. 마력의 과부하로 코피가 번진 창백한 얼굴이 낯익었다. 그 뒤에 선 무표정한 남자도, 역시나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무하 공자, 클라우스 백작.”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리앨라가 기쁘게 대답했다. 코피가 묻은 얼굴로 밝게 웃는 꼴이 기괴한 감상을 자아냈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저런 꼴인지 우스웠다.

렉시우스는 몸을 돌려 둘에게 다가갔다.

밝은 미소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백작의 뒤로 싸늘한 분위기의 공자가 보였다. 손에는 은색 피스톨을 쥐고서 백작의 허리를 겨누고 있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무하 공자는 애리얼에게 사심이 아주 크니, 오늘 그녀의 생일을 빌미로 백작저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애리얼은 공자보다는 데본시아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가 아는 바로, 애리얼은 무하 공자의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무하 공자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의미다.

애리얼은 유일하게 백작저에 나타나지 않은 데본시아와 만나기 위해 황성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의 축하를 받든 선물을 받든, 어떻게든 그가 필요했을 테니까.

그리하여 백작저에서 애리얼이 사라졌고, 공자는 애리얼을 찾아 나선 것이다.

마력이 없는 무하 공자가 자력으로 추적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 클라우스 백작을 이용해서 추적을 시도한 거겠지. 애리얼이 황성에 있으리라 추측해서 이곳으로 온 것일 테고. 허가야 뭐, 무하 공작이 이미 호출된 상황이라 거기에 편승했을 게 뻔하고. 거기까지는 알겠다.

한데 공자가 백작의 허리에 피스톨을 겨눈 경위는 알 수 없었다.

백작은 공자의 전속 마법사가 아니던가. 굳이 피스톨까지 겨누며 협박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었을 텐데.

“호출되지도 않은 인원이, 그것도 제 종자까지 협박하면서, 여기엔 무슨 일로?”

렉시우스는 무하 공자를 향해 대놓고 의문을 드러냈다.

“종자가 황성이랑 내통이라도 했나?”

두 번째 질문에 휘아킨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치켜졌다. 아리앨라는 휘아킨의 눈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답을 시인한 거나 다름없는 표정 변화였다.

일전에 클라우스 백작이 황성에 자주 드나든다던 메튼의 보고를 듣고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하 공작가와 척을 지지는 않으리라 예상했는데.

“꼴을 보아 하니 거둬 준 공작가의 신임까지 저버린 모양이지?”

“그러니까 이러고 있죠.”

휘아킨은 숨길 생각도 없는지 곧장 긍정했다. 자꾸만 질문을 던지며 까다롭게 구는 렉시우스의 존재가 성가셨다. 무표정에 가깝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 적나라한 감정 표현에 렉시우스가 코웃음을 쳤다.

“고작 피스톨 가지고는 백작을 협박하기 어려울 텐데.”

“글쎄, 마력이 다 떨어진 상태라 총알에 맞으면 죽을 텐데요.”

휘아킨이 시큰둥하게 아리앨라가 마력 고갈 상태임을 밝혔다.

역시 그녀의 얼굴에 묻은 코피는 과부하의 흔적이었나.

“백작은 뛰어난 마법사야. 백작저에서 황성까지 장거리 순간 이동을 했다 치더라도, 고작 그걸로 그 지경까지 갈 리가 없어.”

“제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세 번의 순간 이동을 마친 상태였거든요. 그러니까 총 네 번. 백작저에서 황성까지니까 거리도 길었고……. 아무리 뛰어나 봐야, 장거리 이동 네 번이면 고갈이 나죠.”

휘아킨이 정보를 줄줄 흘리며 사실을 알렸다. 너무 순순하게 다 말하는 게 어딘지 꺼림칙했으나, 렉시우스는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보진 않았다. 그러니 질문을 더 해서 정보를 더 캐내는 게 좋을까.

머릿속으로 질문을 고른 렉시우스가 입을 열려는 찰나, 휘아킨이 선수를 쳤다.

“여기까지 오는데 두 번이나 토했다고요. 짜증 나게 굴지 마세요.”

“왜 토해? 멀미라도 해? 아니면…….”

렉시우스가 묘한 소리를 하는 휘아킨을 떠보려 했으나, 이 상황에 질려 버린 휘아킨이 먼저 발을 움직였다.

렉시우스 크레시앙은 집요했다. 대충 대답해 주면 적당히 떠날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이 인간은 제 정보는 하나도 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정보만 캤고, 도발적인 태도로 상대의 평정을 무너뜨리는 데 능했다. 그리고…….

“너, 마력이 없는 게 아니지?”

눈치가 매우 빠르다.

휘아킨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렉시우스를 지나친 그는 구태여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표정을 감추려는 의도였다.

“왜 그렇게 추측했죠?”

“네가 토했다고 했잖아. 순간 이동 자체로 멀미를 했을 리는 없고, 아마 타인의 마력에 민감해서 그런 거겠지. 종종 그런 인간들이 있으니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야. 근데…… 마도구를 써서 나랑 싸울 때의 넌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어. 분명 다른 숙주의 마력을 끌어와서 쓴 걸 텐데, 토하기는커녕 신음도 안 흘렸고.”

“그래서요?”

“마력은 유전성이 강한데, 무하 공작가의 직계가 마저증이라는 건 솔직히 유례가 없는 일이야. 더군다나 마저증이라는 인간이 마력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너무 잘 다루고. 뭔가 석연치 않지. 그래서 내가 한 추측은 이거야. 넌 마저증이 아니라 마력을 빼앗겼던 거고, 그때는 빼앗겼던 마력을 다시 끌어와 쓴 거지. 그래서 네 예민한 체질이 건드려지지 않았던 거야.”

렉시우스가 설명을 끝내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아리앨라는 눈을 내리깐 채 상황에서 빠져 있었다.

휘아킨은 미동도 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렉시우스는 그 뒷모습을 보며 추측에 마침표를 찍는 질문을 했다.

“그때 그 마도구는 데본시아가 준 거지?”

사실상 데본시아가 네 마력을 뺏은 거냐고 묻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에 휘아킨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조용한 긍정이었다.

큰 정보를 얻은 렉시우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순간, 휘아킨이 돌아섰다. 그 역시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피스톨의 총구는 여전히 아리앨라를 향한 채 렉시우스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우리, 손잡을래요?”

“왜?”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렉시우스는 한숨을 쉬듯 짧게 웃었다. 그러고는 수락의 뜻을 비쳤다.

“그래, 좋아.”

마주 본 둘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공동의 적을 제거하기 위한 일시적인 동맹이었다.

***

“안녕.”

“아……, 안녕하세……. 아니,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하는 게, 지능이 모자란 애가 애쓰고 애쓴 거 같네.”

“……죄송합니다.”

“괜찮아. 선천적인 결핍에 죄를 물을 정도로 나는 잔인하지 않아.”

그의 모욕은 상상을 초월했다.

버틸 수 있을까.

애리얼은 탈출 조건을 떠올리며 막막함에 휩싸였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탈출이 불가합니다. 조건을 충족해 주세요.

*조건 - 데본시아 해피 엔딩(미달성)』

***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폰이 연신 진동했다.

비상 사이렌이 울리는 것같이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경고』

『※경고』

눈앞에서 시스템 창이 연신 점멸했다.

어지러웠다.

『※경고』

『데본시아의 호감도 수치가 오버히트(overheat: 과열) 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데본시아. 그 이름을 보자 과호흡 증후군이 온 것처럼 숨 쉬기가 불편했다.

증오가 마구 솟구쳤다.

또, 너 때문에!

데본시아!

입을 벌리고 마구 소리쳤으나,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꺽꺽, 숨이 막혔다.

두렵고, 외롭고, 절망스럽다.

데본시아.

전부 그 때문에. 전부 너 때문에!

“……데본…… 시아.”

“응. 나 여기 있어.”

다정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애리얼의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맺혔다. 꿈속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았던 데본시아의 낯. 은색과 청색의 오드 아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그를 밀쳐 내고서 다급히 몸을 물렸다. 침대의 헤드 프레임이 그녀의 등을 막았다. 더는 물러나지 못하게 된 그녀는 시트를 그러잡고서 파들파들 떨었다.

데본시아는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애리얼을 보다가 한숨을 쉬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장례식에라도 가는지 검은 정장 차림의 그는 본의 아니게 묵직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애리얼은 입술을 꾹 다물고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퍽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짓다가 그녀를 부드럽게 달랬다.

“먼저 불러 놓고서 그런 반응을 보이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응?”

“…….”

“애리얼, 내가 무서워?”

애리얼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헤드 프레임에 상체를 바짝 기대고 말을 돌렸다.

“……오늘이 며칠이죠?”

“그게 궁금해?”

그녀의 질문에 데본시아는 상처받은 데 이어 실망한 얼굴을 했다.

애리얼은 흘금 그를 살폈다. 저렇게 표정이 많은 인간이었나. 언제나 웃음기를 유지하며 진짜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이였는데…….

그의 변화는 애리얼의 경계심과 두려움을 더욱 키웠다.

“며칠인지 말…….”

질문을 재차 반복하던 애리얼은 순간 제 몸에 닿는 옷의 감촉에 위화감을 느꼈다. 헐렁하고, 부드럽고, 지나치게 편하다. 그녀는 곧장 시선을 내려 제 몸에 걸쳐진 것을 확인했다. 크림색의 잠옷용 원피스가 보였다. 검은색의 파티 드레스가 아니다.

누군가 그녀의 옷을 갈아입혔다. 휴대폰도 그 옷 속에 있었을 텐데.

당황해 떨리는 눈이 데본시아를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까까지만 해도 표정이 좋지 않던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법으로 갈아입혔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은 마법을 썼다는 거였다. 어쨌거나 그의 손을 타긴 했다는 거다.

애리얼은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제 옷은요?”

“그게 중요하니?”

“……아뇨, 됐습니다. 오늘이 며칠인지나 말해 주세요.”

“일 월 사 일이야.”

역시나. 일 월 일 일이 지났다. 그녀는 실패했다. 절망적으로 흘러가 버린 시간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흘이나 기절했다는 사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차라리 일어나지 못했다면 좋았을까.

공허하게 비워진 까만 눈동자가 데본시아를 향했다.

“애리얼.”

그가 겉옷의 안주머니에서 하얀 케이스를 꺼내 내밀었다.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진 이제야.

“늦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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