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은 개뿔. 일부러 이런 거면서.
애리얼은 데본시아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며 눈을 부릅떴다. 제 앞으로 다가온 그의 손을 세게 쳐 냈다. 그토록 원했지만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하얀 케이스가 휙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꺼운 러그가 깔린 바닥이 케이스를 부드럽게 받아 냈다. 툭, 소리가 작게 울렸다.
아예 박살이 나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것 하나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 와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애리얼이 분노로 가득한 음성을 토해 냈다.
데본시아는 씩씩대며 저를 노려보는 애리얼을 가만히 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얀 러그 중간에 떨어진 케이스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그는 표정도 없이 직접 허리를 숙여 케이스를 주워 들고는 다시 애리얼에게로 향했다.
“신기하네.”
“…….”
“일 월 일 일까지만 해도 그렇게 간절하게 날 찾더니.”
“그날까지는 당신이 필요했으니까.”
“그럼, 이제는 필요 없어?”
애리얼은 대답하지 않고 매정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태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고개를 숙여 왔으나, 이제는 아무 소용 없었다. 그는 거듭된 실패의 온상일 뿐이었다.
“애리얼.”
그는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벽이라도 세워진 양 그녀는 현실을, 그를, 외면했다.
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필요 없겠지. 날짜도 지났으니까.”
익숙한 일이었다. 수없이 회귀를 거듭하면서 몇 번이고 경험했다.
“난 왜 다 알면서 늘 너한테 묻는 걸까. 네가 다른 답을 줄 리도 없는데.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돼.”
애리얼은 말이 없었다.
데본시아만 홀로 말을 이어 갔다. 조용히 차갑게, 무미건조하게 본심을 토로했다.
“난 시한부나 다름없는 네 관심에 목이 말라서 그날만 기다렸어. 어차피 일 월 일 일이 지나면 죽어 버릴 관심인데, 그 시간이 지나면 네가 날 싫어하다 못해 증오할 걸 아는데, 그날이라도 널 독차지해야지.”
“…….”
“기분 좋았어. 네가 그토록 간절하게 내 옷자락을 붙드는 게…… 머리가 이상해질 만큼 좋더라.”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애리얼은 얼굴을 찡그렸다.
데본시아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를 외면한 그녀의 턱을 쥐고서 제 쪽으로 돌려놓았다. 저항마저 시원찮은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텅 빈 듯한 연흑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이라도 맞출 듯이 얼굴이 가까워졌다. 애리얼이 기겁하여 고개를 비틀었으나, 그는 그녀의 턱을 놓아주지 않았다.
맞닿을 듯 가까워진 입술 위로 얕은 숨결이 스쳤다.
짜악!
애리얼이 손을 들어 데본시아의 뺨을 쳤다. 강렬한 마찰음과 함께 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당황과 분노의 감정에서 기인한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얼마나 세게 손을 휘둘렀는지, 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데본시아는 맞은 뺨을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눈동자만 굴려 애리얼을 확인했다. 그녀는 손을 떨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번 회귀에서의 첫 만남 때도 데본시아는 뺨을 맞았던가.
애리얼은 황성 정원에 숨어서 그가 뺨을 맞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그때는 이름 모를 공녀가, 지금은 그녀 자신이, 그의 뺨을 쳤다. 그는 맞을 만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두 번이나 맞았지. 고개를 떨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난 당신이 싫어.”
“나도 알아.”
데본시아가 고개를 바로 하며 무심히 대꾸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는…….”
그는 뭐라고 덧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얀 케이스를 쥔 손에 핏줄이 섰다. 애리얼에게 더 거절당할 생각은 없었는지 선물을 다시 내밀지 않고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물러나서 애리얼을 내려다보다가 여상한 일을 알리듯 말했다.
“넌, 내 황후가 될 거야.”
애리얼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내 무표정하던 그가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가장 처음에 바랐던 대로…….”
“바란 적 없어!”
애리얼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거의 비명을 지르는 수준이었다.
데본시아는 잠깐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다시 웃으며 물러났다.
“그래. 그럼 내가 처음부터 바랐던 거로 치자.”
체념하듯 말하고는 애리얼을 남겨 둔 채 방을 떠났다.
문이 탁 닫혔다.
애리얼은 그제야 휴대폰에 대해 떠올렸다. 특별 엔딩에는 실패했어도, 애리얼에게는 그게 필요했다. 혹시나 새로운 이정표를 줄지도 모른다.
“데, 데본시아!”
뒤늦게 그를 부르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사흘 만의 기상이라 그런지 몸이 휘청거렸다. 힘이 없던 다리가 무너지며 상체가 고꾸라졌다. 애리얼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두꺼운 러그 덕에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대신 서러움이 몰려왔다.
애리얼은 러그 위에 옹송그리고서 몰려오는 울음을 참았다.
아직 포기하기 싫었다.
“황후 같은 거…… 하기 싫어…….”
울먹이는 듯한 억눌린 음성이 입술 새를 비집고 나왔다.
현실을 회피하듯 눈을 감자 오래전의 기억이 몰려왔다.
***
수없는 회귀를 반복하기 전, 가장 오래된 최초의 과거. 이 세계에서의 첫 시작.
그녀의 목표는 데본시아의 공략이었다.
그를 공략해서 하트를 세 개 이상 채우고 그의 단독 해피 엔딩을 볼 것. 그게 휴대폰이 가장 처음에 제시한 탈출의 조건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기억이 없었다.
그때도 기억나는 것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무척 소중하다는 감정뿐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성공할 것이다. 성공해서 전부 기억해 내고, 진짜 집으로 돌아가리라.
의지를 불태우며 데본시아를 처음 만난 날, 그녀는 휴대폰이 건 조건의 난도가 얼마나 끔찍한지 체감했다.
데본시아는 제국의 황태자로, 고작 백작가 공녀인 애리얼은 어지간해선 그를 만날 수도 없었다. 첫 일 년 동안은 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그녀가 만난 고위 계급이라곤 데본시아의 동생인 스카이라가 다였고, 그와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렇게 이 년째. 애리얼은 마력 검사를 제대로 받지 않은 탓에 황성으로 불려 갔다. 그리고 거기서 드디어 데본시아를 만나게 되었다. 심지어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일 년 만에 온 기회였다. 애리얼은 잔뜩 긴장해 허둥거리며 겨우 예를 갖췄다.
그에 돌아온 그의 반응은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인사하는 게, 지능이 모자란 애가 애쓰고 애쓴 거 같네.”
태생적으로 입력된 것 같은 자연스러운 무시와 모욕이었다.
애리얼은 감히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았다. 억지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상상 이상이었다.
“괜찮아. 선천적인 결핍에 죄를 물을 정도로 나는 잔인하지 않아.”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데본시아는 말 한마디로 사람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끝도 없이 조각냈다.
이런 인간과 해피 엔딩을 봐야 한다니…….
절망적이었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행히 첫 만남 이후 그를 다시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리얼의 마력은 신성 마법 등급으로 데본시아와 같았다. 제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제국 역사를 통틀어 따져도 희귀할 정도로 높은 등급이었다. 몹시 뛰어난 인재임을 인정받은 애리얼은 재차 황성으로 불려 갔고, 황립 아카데미에도 입학했다. 같은 등급인 데본시아와도 자주 대면했다.
문제는 대개 치욕스러운 상황에서의 대면이라는 점이었다. 아카데미의 공개 수업에서든, 공식적인 행사장에서든, 애리얼은 같은 신성 마법사 사이에서도 격차가 얼마나 나는지에 대한 비교용으로서 그와 나란히 세워졌다. 마력 등급만 같을 뿐 아무런 마법 교육을 받지 못했던 애리얼은 매번 귀족들의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
그럼에도 꾹 참아 냈다.
어차피 이 세계를 떠나면 다시는 볼 일 없을 인간들이었다.
이런 기회라도 잡아서 데본시아를 만나는 게 더 중요했다.
애리얼은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그를 쫓아다니며 말을 걸었다. 데본시아는 그때마다 웃는 얼굴로 살벌한 모욕을 날려 댔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꿋꿋했다.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다. 몇 번이고 되뇌며 목적을 위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데본시아의 호감도는 오를 기미가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을 지내고 난 후, 데본시아의 졸업식 날이었다.
애리얼은 그의 졸업식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다가 또 공개적인 모욕을 당했다. 그렇게 비교를 당하고도 자존심도 없냐며, 매서키스트(masochist)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기분이 나쁘긴 했으나, 익숙해진 탓일까.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냥 실없이 웃으며 작약으로 만든 꽃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데본시아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넌 화낼 줄 몰라?”
“화낼 줄은 알죠.”
“근데 왜 화를 안 내. 혹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거야?”
“……아뇨, 알아요.”
어떻게 그 모욕들을 모를 수가 있을까. 단지 공략을 위해서 참은 것뿐.
“졸업 축하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애리얼은 끝까지 웃으며 그를 대했다.
그러자 오히려 그가 웃음을 거뒀다. 늘 무시하듯 은근한 조소를 머금던 입이 일자로 굳었다.
혹시 실수라도 한 걸까. 데본시아의 표정 변화에 애리얼이 긴장한 순간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서 작약 꽃다발을 가져갔다.
텅 비어 있던 그의 호감도 창에 처음으로 하트가 차올랐다.
일방적이던 관계가 변한 것은 그날부터였다.
졸업식 이후 황태자인 데본시아와의 접점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그 전보다 더 자주 데본시아와 만났다. 데본시아가 직접 그녀를 황성으로 호출한 덕이었다.
그가 애리얼을 부르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정말 시답잖은 심부름을 시키거나, 심심하면 말장난 상대로 부르는 게 다였다. 대부분 그는 친절하지 않았고, 모욕적인 언사도 여전했다. 아예 그녀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 같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그가 부를 때마다 재깍재깍 그에게 달려갔다. 언제 어디서든 그가 부르면 갔다. 시험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양 순종했다.
그런 관계가 석 달 가까이 이어지자, 애리얼과 관련하여 소문이 돌았다.
허클리 백작가의 여식이 황태자에게 미쳐 있다. 황태자에게 푹 빠져서 간이고 쓸개고 전부 내주려 한다. 그런 이야기가 황성은 물론 사교계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애리얼은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틀린 말까지는 아니었다. 기억을 찾아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를 어떻게든 공략해서 해피 엔딩을 봐야 했으니까. 그가 어디로 부르든 갔고, 뭐든 할 수 있는 만큼 헌신했다.
그러다 보니 지저분한 루머까지 나돌았으나, 애리얼은 개의치 않았다.
데본시아와의 해피 엔딩만 보면, 그러면 다 끝난다. 이 세계의 사정이야 알 게 뭐냐.
“넌 자존심도 없어?”
여느 때처럼 데본시아의 부름에 개처럼 뛰어가 쓸데없는 심부름이나 하고 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날아든 뾰족한 말이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 세계에 오고서 며칠 안 됐을 때 만났던 스카이라. 그가 그녀의 앞을 막았다.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여태껏 데본시아한테 목매던 인간 중에 네가 제일 멍청해.”
“…….”
“제일 저급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찍소리 하나 못 내고 순종하는 꼴이라니.”
“…….”
“그렇게나 황태자가 좋아 죽겠어?”
“아뇨. 그렇진 않은데요.”
갑자기 왜 시비를 거나. 귀찮아진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본심을 드러내며 대꾸하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오늘따라 피곤했던 탓일까. 쓸데없는 말을 흘려 버리고 말았다.
스카이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근데 왜 황태자를 그렇게 따라다녀?”
“…….”
“다른 목적이 있어?”
“…….”
“그놈 꾀어서 뭐라도 해 보려는 거라면 포기해. 넘어올 놈이 아니니까.”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죠.”
“……왜? 뭐가 목적인데?”
“그건 말 못 하는데요…….”
그녀의 대답이 웃겼던지 스카이라가 픽 웃었다. 헛웃음도 비웃음도 아닌 것이 묘했다.
“황태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 진짜인가 보네.”
“……황태자 전하껜 비밀로 해 주세요.”
“알았어. 대신 그놈 뒤통수치는 거 성공하면 꼭 알려 줘. 내가 그 면상을 꼭 봐야겠거든.”
스카이라는 그 말을 남기고선 자리를 떠났다.
그 후로 애리얼은 스카이라와 종종 마주쳤고,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받기도 했다. 가끔은 그가 하는 데본시아의 흉을 잠자코 듣기도 했다.
스카이라는 데본시아를 몹시 증오하고 있었다.
애리얼도 데본시아의 모욕에 이골이 난 상태였기에, 스카이라의 증오에 자주 공감했다. 데본시아는 어디로 보나 호감을 주기에는 그른 성격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나누는 건 황성에서 그녀와 스카이라뿐이었다.
데본시아는 신성 마법사에 황태자이고,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추었다. 나긋한 목소리와 언변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홀렸다. 좋은 설정만 뽑아 과다 투여 한 것 같은 인간이었다. 성격이 파탄 나긴 했으나 그 파탄 난 성격을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성격마저 선망하는 이들이 넘쳤다.
“겉껍데기만 화려하지. 그 개자식은.”
스카이라는 데본시아를 향한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 애리얼은 그의 말에 때때로 통쾌함을 느꼈다.
제가 당한 모욕에 공감하는 게 스카이라뿐이어서였을까.
시간이 갈수록 애리얼은 스카이라와 자주 마주쳤고, 데본시아에게 당한 게 컸던 날이면 스카이라가 그립기까지 했다. 그가 하는 데본시아의 욕을 듣고 싶었다. 그러면 갑갑함과 억울함으로 짓눌리던 마음에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요즘 스카이라랑 종종 말을 섞고 다닌다던데.”
최근에 만남이 잦았던 탓일까. 데본시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애리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에게 감히 반항할 수 없었고, 엔딩을 위해서도 이게 맞았다.
“네가 황자랑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귀족들이 날 뭐라고 보겠니.”
“죄송합니다.”
애리얼은 그 이후로 스카이라를 피해 다녔다. 알게 모르게 그에게 너무 의지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데본시아와의 해피 엔딩을 위해서라도 그와는 멀어지는 게 맞았다.
어차피 이 세계를 떠나면 다시는 못 볼 사람이니까.
늘 그 생각을 되뇌며 견뎠는데……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애리얼은 처음으로 이 세계와의 이별에 슬픔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 남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서 데본시아의 기분에 살살 맞추며, 엔딩을 위해 참고 기다렸다.
“내가 싫은 건 아니지? ……황태자 때문인 거지?”
눈이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스카이라는 이번에도 먼저 피하려던 애리얼을 기어코 쫓아와 앞길을 가로막고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애리얼은 난감함에 그의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끄덕여서 진심을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저어서 그를 완전히 떨쳐 내야 할까.
애리얼은 긴 고민 끝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하와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어요.”
짧은 사과를 남긴 채 애리얼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날 스카이라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둘은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눈길을 던지던 스카이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냉담하게 그녀를 무시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래야 한다…….
애리얼은 차오르는 씁쓸함을 삼킨 채 데본시아에게로 향했다.
데본시아는 시녀와 보좌관까지도 내보내고서 늘 홀로 애리얼을 만났다. 그런데 오늘은 그의 곁에 낯선 이가 함께하고 있었다. 적발을 지닌 양아치 같은 외견의 남자. 렉시우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렉시우스는 방금 전장에서 돌아오기라도 한 듯 미세하게 피비린내가 풍기는 제복을 입고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애리얼을 응시했다.
“뭘 그렇게 끼고 사나 했더니, 이런 걸 숨겨 놨었어?”
“숨긴 적 없는데.”
“얠 대체 어디서 찾은 거야? 완전히 내 취향…….”
“내 거야. 건드리지 마.”
데본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화사하게 미소를 띤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얼음장이었다.
애리얼도 렉시우스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데본시아의 말을 곱씹었다. 이 인간이 어떤 대상에게 이런 식으로 소유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오만하고 고고한 화법의 소유자인 황태자가 아끼는 장난감을 쥐고 고집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말하다니.
데본시아의 호감도가 하트 세 개를 찍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