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해피 엔딩의 길이 열리는 건가?’
애리얼은 생각했다.
실제로 데본시아는 꽤 상냥해졌다. 처음 소유욕을 드러낸 날 이래로 그는 애리얼에게 잡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모욕적인 언사는 여전했으나 그 수위가 많이 낮아졌다. 멍청하다느니, 눈치가 없다느니, 은근히 돌려 욕하는 정도로 그치게 된 것이다.
대신 그는 집요하리만치 애리얼을 빤히 응시하거나, 이따금 그녀의 볼이나 손을 콕콕 찔러 대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그 나름의 호감 표현일까.
귀찮긴 하지만 모욕을 입에 달고 살며 괴롭히던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애리얼은 그의 변화를 기껍게 여기며 가벼운 장난에는 미소로 응답해 주곤 했다. 그러면 데본시아는 체하기라도 한 듯 묘하게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넌 내가 좋아?”
“……네, 좋아해요.”
애리얼은 데본시아와 해피 엔딩을 봐야 했다. 싫다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데본시아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거짓말도 못하네.”
“…….”
“내가 좋지도 않으면서, 왜 나한테 못 들러붙어서 안달인지.”
“……전하께 들러붙으려는 건 아닌데요.”
애리얼이 작게 항변했다.
미약한 반박이 우스웠는지 데본시아가 조소 같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런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애리얼은 데본시아의 약혼이 파기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그의 약혼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몹시 당황스러워졌다.
데본시아의 하트가 네 개로 오른 날이었다.
애리얼이 황태자비가 된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애리얼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약혼식에 섰다.
홀에는 축하객들이 빼곡했다.
차콜색 더블 슈트를 입은 데본시아가 그녀에게 칼라 꽃다발을 건넸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나의 비.”
그는 눈을 휘며 특별한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 이제껏 들어 본 그의 목소리 중에 가장 부드러웠다.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해피 엔딩의 직전이다. 손을 뻗어 꽃다발을 받아 들자 갈채가 쏟아졌다. 축복의 의미로 하얀 꽃잎이 뿌려졌다.
해피 엔딩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휴대폰이 여느 때와 다르게 종이 울리는 소리를 냈다.
***
그 뒤로는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
분명 엔딩을 봤는데, 왜 그녀는 이곳에 있을까. 왜 회귀를 한 걸까.
데본시아가 막은 걸까.
러그에 널브러져 있던 애리얼은 비척비척 일어났다.
데본시아는 그녀를 여기에 두고 며칠째 찾아오지 않았다. 저번의 거절에 심통이라도 난 것인가.
애리얼은 기억을 되짚다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잠만 자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녀의 기억은 아직 온전하지 못했다. 가장 첫 번째 기억은 선명했으나 회귀한 두 번째부터는 흐릿했고, 첫 번째 기억의 엔딩과 두 번째 기억의 사이에는 아예 기억이 없었다. 회귀와 함께 깡그리 다 지워진 듯했다.
절망 끝에 차분해진 애리얼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번 회차의 그녀는 실패했으나, 첫 번째의 그녀는 성공했다. 그러나 회귀하는 바람에 성공은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성공해 봐야 회귀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번에도 성공했다면…… 데본시아가 강제로 회귀시켰을까?’
애리얼은 미간을 모으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닐 것 같았다.
데본시아의 목적은 저를 이곳에 잡아 두는 것. 더 나아가 제게 사랑을 받는 것.
그런데 지금의 저는 데본시아를 좋아하기는커녕 싫어했다. 첫 번째 공략 때보다 심각했다.
차라리 시간을 돌려서 새로 관계를 쌓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데본시아도 알 터다. 새로 판을 짜는 게 나을 거라는 걸.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굴었다.
왜일까.
애리얼은 이번 회차에서 데본시아가 유난히 자주 아팠던 것을 떠올렸다. 신성 마법사이기에 적당한 치료술만 써도 아플 일이 거의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지나친 회귀로 부작용이라도 얻었나? ……아파서 더는 회귀하기가 어려운가?’
그렇다면…….
애리얼은 잘근잘근 씹던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 이상의 회귀는 없다.
***
열흘이 흘렀다.
황제의 국장이 끝나고, 애도 기간까지 모두 지나갔다.
내일이면 즉위식이었다. 황성은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데본시아는 예쁘게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선황께서 서거하신 그때도 눈이 왔었지?”
“예, 그랬습니다.”
“너무 좋은 날에 갔네. 그다지 좋은 인간은 아니었는데.”
“전하, 그런 말씀은…….”
옆을 지키던 제라온이 그를 만류하려다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그를 제지할 이는 이제 없었다.
그의 위에 유일하게 군림하던 이는 죽어 없었다. 이제는 그가 제국의 정점이었다.
“즉위식에 허클리 공녀를 부르실 예정입니까?”
“글쎄……. 부르고 싶지만,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마력을 쓰지 못하게 보호구를 착용시켜 시녀들을 붙여 두면 어떻겠습니까.”
“공녀가 날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겠는걸?”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데본시아는 낮게 소리 내 웃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봐.”
“예.”
제라온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빠르게 물러갔다.
데본시아는 느릿한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서두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번 뛰기 시작하면 애리얼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걸 알았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 겉옷을 벗어 소파로 던졌다. 넥타이를 끄르고 셔츠의 단추를 풀며 침의가 걸린 욕실로 향했다. 옷을 마저 벗어 내는 동안 간헐적으로 손이 떨렸다. 이 순간에도 애리얼에게 달려가고픈 욕망이 그를 다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인내가 너무 길었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제가 되고, 그녀가 포기하도록 만든 뒤에, 그녀를 달래서 제게 안착하도록 해야 했다.
“아, 이런…….”
더운물을 틀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흘렸다.
이렇게 기다리고도 아직도 더 인내해야 한다는 게, 미칠 지경이었다.
애리얼이 그 궁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속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는 더운물을 찬물로 바꿔 틀었다. 옷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쏟아지는 냉수 아래에 머리를 처박았다. 고갈된 인내심을 채우려는 몸부림이었다.
***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각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달칵거리며 열렸다.
애리얼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가늘게 눈을 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상냥한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더 자.”
애리얼은 그 손을 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어두워서 상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불, 켜 줘요.”
“다시 존댓말로 돌아간 거야?”
데본시아가 장난스럽게 소곤거렸다. 어두운 가운데 퍼지는 그의 나긋한 음성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열흘 만의 만남이었다.
애리얼은 그를 무시하며 침대 밖으로 다리를 뺐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갑작스럽게 밝아진 주변에 눈이 부셨다.
애리얼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차차 빛에 적응한 시야가 데본시아를 찾아냈다.
가운 차림으로 침대맡에 서 있던 그가 근처 소파로 물러나 앉았다.
“진짜 안 받아 주네.”
“…….”
“내가 그렇게 미워?”
애리얼은 다리를 접어 다시 이불 아래로 감추며 입을 열었다.
“제 마도구, 돌려주세요.”
“어떤 거? 브레이슬릿?”
“또 맞고 싶으세요?”
일전에 그의 뺨을 쳤던 일을 떠올리며 차갑게 쏘아붙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그걸 싫어할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말을 말아야지.
애리얼은 제가 하는 위협이 그에게 별 효력이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데본시아는 그녀의 찡그린 얼굴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집요한 시선으로 감상했다. 열흘 전만 해도 절망감으로 곧 죽어 버릴 것처럼 창백한 안색이었는데, 그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다만, 그녀를 움직이게 한 그 의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 죽어도 제 곁을 벗어나 돌아가기 위해 태우는 의지는 기껍지 않았다.
“아직도 포기 안 했어?”
그가 묻자 애리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컥 치솟은 화를 다스리는 얼굴이었다.
그러길 몇 분.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린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제 마도구를 돌려주세요.”
“싫어.”
그가 즉답했다. 그러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걸 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냥은 못 줘.”
그럴 줄 알았다. 어차피 예상하기도 했고. 애리얼은 익숙하게 짜증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뭘 요구할 생각인데요?”
“내일이 내 즉위식이거든.”
“……즉위식이라고요?”
“황제가 죽었고, 장례도 치렀으니까.”
애리얼은 당황해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입술 새가 벌어졌다. 열흘이나 저를 가둬두고는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장례가 끝났다니, 내일이 즉위라니…….
“별일 아니야.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가 달래는 투로 다정히 속살거렸다.
오히려 그럴수록 애리얼은 두려움이 일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는가. 바로 내일, 저를 가둔 이가 황제로 즉위한다는데. 그가 이 제국의 정점으로 군림한다는데!
시트를 꽉 움켜쥐고 그를 경계했다.
그는 날카로워진 애리얼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겁에 질린 주제에, 그걸 꾹꾹 숨기며 침착한 척 구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즉위식에 와 줘, 애리얼. 와서 축하해 줘.”
그 말의 본질은 거래였으나 그는 순수한 축하를 부탁하는 양 굴었다.
애리얼은 쓴 약이라도 씹은 듯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렇게 싫은가.
데본시아는 조금 씁쓸해졌다.
하기야 그게 뭐든 제 요구를 그녀가 반길 리는 없겠지마는, 즉위식에 참석해 축하해 달라는 비교적 단순한 것에마저 저렇게 싫은 티를 낼 줄이야.
‘다른 걸 말하면 더 싫어할 거면서.’
갑작스럽게 묘한 오기가 생긴 데본시아는 다른 선택지를 주는 척 입을 열었다.
“그게 싫으면…….”
“싫으면요?”
“나를 이름으로 부르고, 반말을 해 줘.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계속 말을 걸어 줘. 친근하게 안아 주고, 연인처럼 입 맞춰 줘.”
그가 말을 이어 갈수록 애리얼의 낯이 굳어 갔다.
봐, 다른 걸 말하면 이렇게나 기겁할 거면서. 그는 아려 오는 속을 미소로 덮어 감췄다. 애리얼이 질색할 소리를 해서 구태여 상처를 받은 뒤 소파에서 일어나는 저 자신이 미련하게 느껴졌다.
“그럼 즉위식에서 보자.”
그가 애리얼의 선택을 단정하며 말했다. 그녀가 저와 연인 행세를 하느니 즉위식을 선택하리라는 걸 예상하는 건 너무도 쉬웠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씁쓸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녀가 저를 상처 내는 것마저 소중했다. 저를 밀어내고, 때리고, 거절하고, 증오를 드러내는 그런 것들이…… 때로는 아깝기까지 했다.
그것마저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었기에.
***
천장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거미줄과 같은 그 창문을 통과한 햇살이 형형색색으로 산산이 부서져 쏟아졌다.
데본시아가 그 아래로 걸어갔다.
새하얀 정복. 푸른색의 얇은 비단 케이프 위로 두꺼운 모피 케이프를 겹쳐 입었다. 새파란 현장(懸章)을 두르고 각종 휘장을 촘촘하게 매단 가슴팍의 정중앙에 금독수리를 매달았다.
순금 황제 관을 쓰고서 높은 자리로 올라섰다. 금빛 황좌의 앞에서 그가 몸을 돌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로라 같은 빛줄기를 받은 그의 금발이 오묘한 빛깔로 반짝였다. 자비롭게 나른히 입꼬리를 올린다. 은색과 푸른색의 오드 아이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마 그는 제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황제일 것이다.
이십 개의 계단 아래 그를 우러러보며 선 귀족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스카이라, 렉시우스, 레이신, 휘아킨까지 빠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제국의 새 정점이 탄생하는 날이었다.
두꺼운 책을 펼치고서 계단에 선 재상이 무어라 선언하기 시작했다. 잘 들리지 않았다.
애리얼은 알현실 바깥에 서서 투명한 창문 너머로 즉위식을 바라보았다. 그를 축하하기 위해 붉은 장미 꽃다발을 쥐고서 흰 드레스에 푸른 끈을 맸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데본시아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애리얼을 포착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은은하게 머금은 미소가 짙어졌다.
그가 입술을 움직여 뭔가를 말했다. 그 후 알현실을 울리며 귀족들이 일제히 답했다.
“존명.”
닫혔던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데본시아가 계단을 내려왔다. 무릎을 꿇은 귀족들이 양옆으로 정렬한 가운데, 붉은 카펫이 깔린 길을 걸어갔다.
시녀들이 애리얼을 카펫으로 안내했다. 애리얼은 초연한 자태로 카펫을 밟았다. 그와 마주치는 지점에 서서 기다렸다. 알현실의 문을 넘어 다가온 그가 애리얼의 앞에 섰다.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애리얼은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쥐고선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허락된 예는 이게 다였다. 무릎을 꿇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특별했다.
애리얼은 그 특별함이 싫었다.
짧은 인사를 끝내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꽃다발을 내밀었다.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데본시아의 손이 다가왔다.
“눈을 보고 말하는 게 좋겠구나.”
그의 손이 꽃다발을 지나쳐 애리얼의 턱 끝에 닿았다. 검지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애리얼은 그가 하는 대로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찬란한 금빛 관을 쓴 그가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가 그린 듯이 고아하게 웃는다.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부드러운 금발 아래로 특유한 눈동자를 빛내며.
“짐이 가장 귀애하는 이가 와 주어 기쁘구나.”
오만하게 그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며 장미 꽃다발을 가져갔다. 온통 희고 푸르게 치장한 그에게 장미로 홍일점이 찍혔다.
엄숙한 공기가 흘렀다.
애리얼은 즉위식이 주는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그를 응시했다.
아무도 둘 사이에 끼지 못한다.
데본시아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