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라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즉위식에 그녀가 있었다. 장미꽃을 들고서 러너 카펫의 끝에 서서 데본시아를 맞았다. 그녀의 얼굴은 시체처럼 안색이 나빴다. 억지로 끌려 나온 게 분명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반역자가 되고 싶은 심정이 일었다.
분노가 미친 손등에 험악하게 핏줄이 섰다. 손 아래 있던 서류 뭉치가 볼썽사납게 잔뜩 구겨졌다.
그의 집무실은 고요했고, 중앙관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황성의 인원은 대부분 새 황제의 눈치를 보고 엎드렸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데본시아가 황제가 됨에 따라 그는 황위 계승 서열 1순위로 올라갔다. 제국 내에서의 계급도 황제의 다음으로 높았으며, 크레시앙 대공과 어깨를 견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선황이 살아 있을 적보다 더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오늘은 그가 황자비라 공표하려던 여인까지 빼앗긴 처지였으니, 이보다 비참할 수 있을까.
선황을 죽인 것은 데본시아였고, 데본시아는 그걸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귀족들은 모르겠으나 스카이라 본인을 포함하여 렉시우스, 레이신, 황성에서 지내는 몇몇 고위직은 데본시아가 벌인 반역을 금세 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증거를 모아 황제를 시해한 죄를 밝힐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들, 절대 권력자인 데본시아에게서 귀족들이 돌아설 것인가. 이미 그는 많은 이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었다. 제국 유일의 신성 마법사인 그와 적대하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선황의 시해 죄를 밝혀도 모르는 척 뭉개고 가려는 세력이 필시 더 많으리라.
이가 갈렸다.
데본시아를 향한 혐오감이 차오르다 무력한 자신을 향한 분노로 돌변했다.
애리얼만 아니었으면 그놈이 선황을 죽였든 뭘 했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아니지 않은가. 데본시아가 황제가 된 것은, 죽을 일이 없던 선황제를 병들게 해 때를 맞춰 죽인 것은…… 전부 애리얼을 가지려는 포석이었다.
그렇게 일이 벌어지는 동안 저는 뭘 하고 있었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답보 상태로 업무나 보는 제 주제가 너무 한심했다. 심지어 애리얼은 그의 도움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잦은 상처로 헐어 버린 속이 금세 고통을 상기해 냈다.
머리칼을 마구 헝클다 손바닥에 이마를 묻은 그가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스카이라는 욕설을 뱉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속앓이에 시달린 얼굴이 초췌했다.
“지금은 물러가. 뭐든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야.”
그렇게 말했음에도 뻔뻔한 방문자는 그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짙은 핏빛의 머리칼과 그에 어울리는 폭력적으로 화려한 면상이 보였다. 작년, 애리얼에게 귀속되려고 제 미래를 모조리 걷어찬 광견.
목에 걸린 은색 초커 위에서 애리얼의 이름이 빛났다.
스카이라가 팍 인상을 썼다.
“이야기하기 싫다고 했잖아.”
“그럼 듣기만 하든가.”
렉시우스는 문을 닫고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오더니 협상이라도 하듯 책상을 가운데 두고 스카이라와 마주 앉았다.
잔뜩 구겨진 서류 뭉치를 흘긋 바라본 렉시우스가 책상에 널브러진 만년필을 쥐고서 물었다.
“나한테 좋은 정보가 있는데…… 어때? 같이 놀래?”
스카이라는 침묵했다.
렉시우스는 그 얼굴을 빤히 보다가 대충 아무 서류나 가져와 빈 뒷면에 정보를 휘갈겨 썼다.
“정보는 줄게. 보고 생각해 봐.”
금세 몇 문단을 써 내려간 렉시우스가 스카이라의 앞으로 서류를 밀어 줬다.
[황성 지하 어딘가에 데본시아가 신성 술식을 써 놓은 방이 있어. 아마도 애리얼과 관련되었을 확률이 커. 저번에 여길 발견했을 때, 데브가 완전히 발작하듯이 반응했거든.
난 그걸 근원 소멸기로 파괴할 거야. 넌 내가 어디로 들어가든 허락하고 사용인들의 눈과 귀만 막아 주면 돼.
무하 공자와 클라우스 백작도 이 일에 끼어 있어. 단, 클라우스 백작은 데본시아 쪽의 이중 첩자니까 신뢰하지 마.]
무관심하던 스카이라의 눈동자가 조건 반사처럼 글을 읽어 내려갔다. 신경질적으로 구겨져 있던 미간은 첫 문장을 눈에 담던 순간부터 서서히 펴졌다. 이윽고 얼마 안 되는 정보를 다 읽어 낸 그가 놀라움에 커진 눈으로 렉시우스를 보았다.
렉시우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전하, 어떠십니까? 좋은 제안이죠?”
확실히 좋은 제안이었다.
찾을 수만 있다면, 데본시아를 무너트릴 수도 있을 제안. 애리얼을 도울 수도 있을 제안.
“근데…… 이러면 네가 죽지 않아?”
스카이라가 조용히 물었다. 딱히 렉시우스를 걱정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상황을 사전에 파악해 두려고 하는 거였다.
“글쎄, 안 죽을 거 같은데.”
렉시우스는 남의 얘기를 하듯 태연했다.
하긴 르젠의 결계를 깨부수고도 살았던 인간이었지.
스카이라는 그의 자신감에 납득하고는 정보를 적은 서류를 마력으로 태웠다. 푸른 마력에 서류는 삽시간에 재가 되었다. 완전한 증거 인멸이었다.
렉시우스가 씩 웃었다.
“나흘 뒤의 연회에서 봐.”
기약이었다.
그날 황성을 이 잡듯이 뒤질 것이다.
스카이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데본시아는 즉위식이 끝난 후 내빈을 돌려보낸 뒤에 중정의 궁을 찾았다. 무거운 망토를 벗고 현장과 휘장을 모두 벗어 내고서 깔끔하게 정복만 갖춘 상태로 문을 열었다. 즉위식의 고압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는 차림이었다. 손에는 억지로 받아 낸 장미 꽃다발과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그를 기다리다가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데본시아가 제게 달려오는 그녀를 보고서 양팔을 벌렸다. 그 모습에 애리얼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모르는 척 안겨 주지.”
그가 아쉽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애리얼은 차분하게 선을 그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 거, 주세요.”
“그래. 받아.”
데본시아는 근처 테이블에 꽃다발만 내려다 놓고 제 앞으로 다가온 그녀의 손을 잡았다. 휴대폰이 들려 있지 않은 맨손끼리 맞물렸다. 기대하지 않은 맨살갗의 감촉에 애리얼이 당황한 사이 그가 몸을 기울였다. 무너지다시피 애리얼을 끌어안고서 그녀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 무게에 휘청거리는 그녀를 꽉 당겨 감싸며 한층 낮아진 목소리를 냈다.
“자, 네 거.”
그렇게 말했더니 애리얼이 소스라치며 그를 밀어냈다.
“당신이 왜 제 거예요!”
“그럼 오늘부터라도 네가 가질래?”
“아니요! 이거 놔요!”
맹렬한 거절의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실패를 경험한 애리얼은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는 바르작대는 그녀의 저항이 사랑스러워 짓뭉갤 듯한 완력으로 껴안다가 져 주듯 팔심을 풀었다.
애리얼이 곧장 물러나더니 그를 잔뜩 경계하며 말했다.
“계속 얌전히 당신 말을 들었던 건, 당신이 제 물건을 돌려준다고 약속해서예요.”
“알아. 줄 거야. 너무 화내지 마.”
그는 장난스레 웃는 얼굴로 오른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애리얼이 빨리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그는 못 본 체 휴대폰의 까만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창은 마치 거울처럼 그의 얼굴을 반사했다.
“네겐 이 안이 보이겠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애리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반응이 너무 적나라해서 데본시아는 웃음을 흘렸다. 담담한 척 구는 그녀가 귀여웠다.
그는 제 앞으로 다가온 그녀의 손 위로 약속했던 물건을 얹어 주며 말했다.
“자, 휴대폰.”
그 한마디에 억지로 유지했던 애리얼의 담담함이 단박에 깨져 나갔다.
어떻게 그가 그 명칭을…….
흠칫 소스라친 그녀는 손안으로 들어온 휴대폰을 쥐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하얀 러그 위로 하얀 휴대폰이 툭 떨어졌다.
애리얼은 다급히 휴대폰을 주워 들고서 그를 잔뜩 경계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테이블에 발이 걸려 휘청였다. 다급히 근처 의자를 잡으며 넘어지는 불상사를 막았다.
데본시아는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듯 입술을 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애리얼은 저 자신이 광대라도 된 것 같아 불쾌했다. 그의 손안에서 놀아나는 꼴이었다. 얼마나 우스울까. 분해서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두 눈에는 그를 향한 적개심을 채워 불태웠다.
그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한 데본시아가 쓰게 웃었다.
“날 너무 싫어하진 마. 보기 싫어도 계속 봐야 할 사인데.”
“…….”
“당신이라는 호칭도 너무 차갑다. 데본시아, 아니면 데브라고 불러 줘.”
“폐하.”
“데본시아, 라고 해 줘야지.”
“싫습니다, 폐하.”
냉담한 선 긋기에 그의 웃는 얼굴이 잠시 흔들렸다.
“자꾸 고집부려 봐야 너만 힘들 텐데.”
순순하게 굴라는 협박을 돌려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애리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순순히 따르라는 의미신가요? 그러면 여기서 내보내 주나요? 저를 집으로 보내 줄 건가요?”
“이제 여기가 네 집이잖아, 애리얼.”
“아니요. 이게 감옥이지…… 어떻게 집이에요!”
“조금 더 지나면 집으로 생각하게 될 거야.”
그가 상냥하게 웃었다. 그 말투며 분위기에 강요가 배어 있었다. 적당히 저항하고 순응하라는 의미인가.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애리얼은 몸을 휙 돌려서 그를 외면했다.
데본시아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보도록 다그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녀에겐 오늘이 실패하고 눈을 뜬 지 고작 열흘 된 날이었다. 절망에서 빠져나오기도 힘들었을 터. 천천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더 줘야 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도망칠 수 없게 된 그녀를 품에 안고 함께 침대에 들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 내며 몸을 돌렸다.
“식사 잘하고, 잘 자고 있어. 또 올게.”
일부러 걸음을 느리게 하며 천천히 문을 돌려 열었다. 애리얼은 말이 없었다. 그가 문을 닫고 떠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도중에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렸으나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철저한 외면을 받고서 그는 궁을 떠났다. 비식 웃음이 샜다.
저를 외면하는 애리얼이 미우면서도 안타까웠다.
아직 제게 당한 일의 반도 모르면서 이렇게 저를 싫어해서야.
조용히 웃으며 중정을 지나다 화단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걸려드는 백합을 꺾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나팔처럼 꺾어진 순백의 잎이 보였다. 밀려드는 향취가 강했다.
“나를 닮았다고…….”
순수, 순결. 이 꽃이 지닌 꽃말의 그 무엇 하나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우스웠다.
***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비정상적인 애정 구간입니다. 당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즉시 대상에게서 멀어지십시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 - 중정』
휴대폰을 쥔 애리얼의 손이 공포로 부들부들 떨렸다.
화면의 문구는 그녀에게 도망가라고 직접적인 경고를 보냈다.
이젠 정말로 도망칠 시간이었다.
그가 만든 이 지옥의 굴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