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꽉 감으며 숨을 길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며 다시 눈을 떴다.
[!도움말]
오버히트가 된 데본시아의 호감도 창 위에 구원과도 같은 글씨가 반짝였다.
닷새 만에 받은 휴대폰에 누적된 새로운 알림.
결연한 눈빛으로 느낌표가 떠오른 작은 창을 눌렀다.
어떻게든 새 방법을 모색해서 집으로 갈 것이다.
절대 데본시아를 승리자로 만들어 주고 끝나지는 않으리라.
『▽특별 엔딩에 관하여
*실패 시 진엔딩(True Ending)이 열립니다.』
『▽기본 도움말
*진엔딩(True Ending)은 다른 엔딩에의 진입 여부와 상관없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잠금이 해제되었다.
특별 엔딩에 실패하여 차라리 회귀의 방법을 모색하던 그녀에게 떨어진 강렬한 빛줄기였다. 곧게 뻗어진 검지가 ‘진엔딩’을 지그시 눌렀다. 익숙하게 추가 설명 창이 떠올랐다.
『진엔딩(True Ending)
*당신이 원하는 진실에 도달합니다.
*원하는 때에 진입------』
설명 창의 세 번째 줄이 이상하게 깨져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애리얼은 초조한 얼굴로 오류가 난 세 번째 줄을 터치했다.
『※현재 외부 압력에 의해 진엔딩으로의 접근이 막혀 있습니다. 빠른 조치를 바랍니다.』
오버히트 경고 창만큼이나 눈앞이 아찔해지게 만드는 설명이었다.
애리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연신 문장을 읽어 내렸다.
“외부 압력…….”
휴대폰에 가해진 어떤 외부적 힘이 진엔딩을 막고 있다는 뜻인가. 그러면 그 힘은 누구의 힘인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애리얼은 곧장 데본시아를 떠올렸다. 그녀가 기절한 이래로 휴대폰은 줄곧 그의 손에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이 물건을 ‘휴대폰’이라고 정확하게 칭하기까지 했다. 이것에 대해 잘 알고 엔딩을 막아 버릴 정도로 외압을 행사할 수 있는 인간은 그밖에 없다.
“아아아악!”
애리얼은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가 만든 지옥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
두 번째 회귀에서였다.
데본시아는 호수의 별장으로 애리얼을 불렀다. 그냥 변덕이었다.
애리얼은 황태자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어 곧장 별장으로 왔다.
“공녀가 도착했습니다.”
제라온이 보고를 올렸다.
“공녀를 올려 보낼까요?”
“아니.”
그는 기껏 불러 놓은 애리얼을 만나지 않았다.
고작 ‘공녀가 도착했습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빌어먹게도 설레는 가슴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유례가 없는 황태자의 변덕에 제라온만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제 감정의 자각이 부족했다. 이미 회귀라는 신성 극계 마법을 펼쳐 금기를 깨트린 주제에, 우습게도 그랬다.
온 신경은 그녀가 와 있을 아래층에 쏟으면서 무표정하게 호수만 살폈다.
그러고서 뒤로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을 생각이나 했다.
참으로 같잖은 꼴이었다.
그렇게 이틀을 버틴 아침이었다.
그녀가 창문 앞에 앉아 아침을 먹는다는 보고가 떠올랐다.
데본시아는 갑작스럽게 그녀가 바라볼 창문 너머로 찾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늘 보던 풍경에 제가 나타나면 그녀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침으로 먹던 것을 내려놓고 저에게 올까. 그런 시답잖은 호기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후원의 잔디밭으로 들어섰다. 풀물이 드는 걸 싫어해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던 장소였다.
이슬이 내린 풀잎이 스치며 로브 가운의 끝자락을 적셨다. 불쾌함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별장의 후원은 쓸데없이 복잡했다. 미로의 벽처럼 세워진 조경수 탓에 걸음이 빙빙 돌았다.
왜 이따위 짓을 하고 있나.
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을 느끼면서도 그는 계속 걸었다.
대략 십여 분을 헤매고서 제 꼴에 비웃음이 날 때쯤 그는 애리얼이 보이는 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
헛웃음이 터졌다.
그토록 찾았던 그녀는 창 앞에 앉아 조각조각 낸 브리오슈를 새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있음에도 그깟 새에 정신이 팔려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알 수 없는 이유로 심통이 난 그는 튀어 나가듯 창문으로 향했다. 신경질적으로 팔을 뻗어 브리오슈를 쪼개는 하얀 손을 콱 움켜쥐었다.
빵 조각을 쪼던 새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화, 황태자 전하……?”
애리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본시아는 무표정한 얼굴에 간신히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황성에서 친히 챙겨 준 식사를 하찮은 미물 따위와 나누면 안 되잖니.”
질투를 오만하게 포장하여 내뱉었다.
애리얼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죄송합니다.”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상승했다.
저를 살피는 그녀의 눈길에 저열한 만족감을 느꼈다. 고작 새 따위를 질투하여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고서 그렇게.
“나올래? 아니면 내가 들어갈까.”
“……들어오세요.”
애리얼이 데본시아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슬그머니 몸을 뺐다.
한껏 올라갔던 데본시아의 입꼬리가 경직되었다. 그녀가 구태여 제게서 멀어지는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열이 받았다. 심통을 부리듯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당겼다.
“나와.”
애리얼의 몸이 창문 쪽으로 당겨졌다. 그녀는 그의 손에 끌려 나와 마지못해 창틀을 넘었다.
“길을 잃었어. 안내해 줘.”
“……하지만 제가 이곳에 익숙지 않아서,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불러오면…….”
“안내해 줄래?”
“하지만…….”
“아무 데나 알아서 안내해 줘. 길을 잘못 들어도 너그러이 넘겨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데본시아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애리얼은 익숙하다는 듯 순응했다.
데본시아는 그녀의 체념 같은 반응이 조금 거슬렸으나, 더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애리얼은 데본시아에게 손을 잡힌 채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걸음에 데본시아가 천천히 발을 맞췄다.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사락사락, 풀잎을 스치는 소리와 새의 지저귐만 들렸다.
후원은 복잡했다. 조경수가 빽빽이 심긴 길은 미로와도 같아서 애리얼은 금세 길을 잃었다. 당혹스러워하며 눈치를 보는 그녀를 데본시아는 나무라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고서 그녀의 판단을 기다렸다.
매우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대로 길을 잃어서 몇 시간이고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걸음은 분주했다. 출구를 찾는 거겠지.
아니꼬운 마음에 별장 쪽으로 향하려는 그녀를 홱 끌어당겨 측백나무 사이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묘한 오솔길이 나 있었다. 순전히 우연으로 발견한 길이었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손을 꽉 잡고 홀린 듯이 무작정 그 길을 걸어갔다.
“화, 황태자 전하!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애리얼이 당황하여 그를 불렀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의 끝 부근에 다다르자 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이 끝에 화원이 있음을 그는 직감했다. 천천히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애리얼이 화원을 가장 먼저 눈에 담을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애리얼이 앞에 선 순간, 좁았던 오솔길이 끝나고 시야가 확 트이며 색색의 꽃들이 한가득 나타났다.
수국, 라임라이트, 플록스, 델피니움, 물매화, 리아트리스, 그리고 백합.
우아한 색채를 뽐내는 여름의 정원이었다.
“와…….”
애리얼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경직되었던 얼굴도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감격에 물들어 해사하게 풀렸다.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의 반응이었다.
“마음에 들어?”
“네, 너무 예뻐요. 어떻게 이런 데가……. 낙원 같아요.”
애리얼은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서 정원으로 들어섰다. 이곳저곳 고개를 기울이며 구경하는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그 모습에 데본시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애리얼이 풍경에서 눈을 떼고 그를 돌아보았다.
“이 꽃, 어쩐지 전하와 닮은 거 같아요.”
그녀가 백합을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그에게 시달리던 것도 잊고서 그저 기쁜 듯이, 웃었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그는 그 미소에 멍하니 혼을 빼앗겼다. 주변이 인식되지 않았다. 오롯하게 그녀만 보였다. 가슴이 소란스럽게 쿵쿵 뛰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늘 여유롭게 가장하던 미소 띤 표정도, 철저하던 행동도, 고장이라도 난 듯 조절이 안 됐다. 달아오른 낯을 하고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을 제 얼굴을 떠올리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창피했다.
도저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을 수가 없어서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때서야 그녀가 가리킨 백합이 눈에 들어왔다. 그 꽃말이 삽시에 머리를 가득 채웠다. 순결, 순수한 사랑. 사랑…….
‘내가 쟤를 좋아하는구나.’
자각하고 말았다.
***
데본시아가 가늘게 눈을 떴다. 가슴이 불편하게 뛰고 있었다.
멀지 않은 테이블에 장식해 둔 백합 꽃다발의 향기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그때를 재차 경험하는 양 감정이 울렁거렸다.
팔걸이에 기대 젖혔던 고개를 들고서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서 수면 부족을 채우려 했건만,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저 꿈에 불과한 광경이었음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탓에.
‘……오랜만에 꾸네.’
그는 피로에 젖은 눈가를 문지르며 방금의 꿈을 되짚었다.
저를 닮았다며 백합을 가리키고 웃던 애리얼.
지울 수 없는 자각의 순간.
되새길수록 높고 빨라지는 고동 소리가 귀를 쿵쿵 울렸다. 정제되지 않은 원초적 감정의 불편함에 그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억지로 유지하던 인내심을 갈가리 찢을 듯한 격정이 요동쳤다.
한동안은 애리얼을 마주하지 않아야 할 것 같았다.
똑똑똑.
느닷없는 노크 소리에 데본시아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앞으로 두 시간은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 일렀을 텐데,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명을 어기는가.
“무슨 일이야.”
반쯤 잠긴 목소리가 싸늘하게 용건을 물었다.
“폐하, 허클리 공녀님께서…….”
거기까지만 듣고 데본시아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시에나는 구겨진 셔츠 차림에 헝클어진 금발을 정리하지도 않은 황제와 마주했다. 황태자 시절부터 일절 보이지 않던 쫓기듯 다급한 표정을 지은 그가 시야 가득 담겼다.
시에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내밀한 본심을 처음 마주한 기분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휴식 중에 죄송합니다.”
“결계에는 이상 없고, 마력 파장도 못 느꼈고, 위치도 변한 게 없는데, 무슨 일이야.”
“공녀님께서 손으로 궁의 기물을 부수려 하시다가 상처를 입으셔서…….”
데본시아는 시에나의 보고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서 바로 순간 이동을 감행했다. 백합의 향이 물씬 풍기는 중정의 하얀 문, 금빛 문고리가 곧장 나타났다. 신경질적으로 보일 만큼 다급히 뻗어진 손이 문을 뜯어내듯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