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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37)화 (225/264)

드러난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곳곳에 널린 구겨진 드레스, 러그 위로 쏟아부은 보석과 진주알, 망가진 액세서리 더미, 봉째 뜯겨 추락한 커튼, 죄다 넘어진 테이블과 의자, 쿠션이 터진 소파, 찢어진 침대 매트리스.

그나마 무거운 것들은 위치가 조금 틀어진 데 그쳤다.

마치 아이 혼자서 어지를 수 있는 한계까지 어지른 듯한 모양새였다.

데본시아는 이 난장판 속에서 풍기는 희미한 피 냄새를 맡고 와락 인상을 구겼다. 욕실 쪽이었다. 미세하게 열린 욕실 문 너머에서 물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피해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으로 피 냄새가 짙게 났다.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조용히 심호흡하며 문을 똑똑 두어 번 두드렸다.

“애리얼?”

대답이 없었다.

설마…….

불안감을 느낀 그는 손끝으로 욕실 문을 슬쩍 밀어 열었다.

세면대 수전에 손을 대고 있던 애리얼이 고개를 돌렸다. 놀란 얼굴도 아니었다. 마치 그가 올 걸 예상했다는 듯이 태연하다.

데본시아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지나쳐 곧장 손으로 향했다. 졸졸 흐르는 물줄기에 번진 피가 그녀의 하얀 손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손바닥을 다친 모양이지. 미간을 찡그리다 못해 이까지 악문 그가 애리얼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왔다. 세면대 옆에 놓인 수건을 가져와 물과 피로 흥건한 그녀의 손바닥을 닦아 냈다. 길게 베인 상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뭐 하다 이랬어.”

“밖에 보셨잖아요.”

애리얼이 난장판이 된 침실을 흘긋 곁눈질했다.

데본시아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상처를 수건으로 눌러 지혈했다.

“왜 그랬니?”

“나갈 수가 없는데, 마력을 쓸 수도 없어서요. 스트레스를 분출한 것뿐이에요. 손은 그 과정에서 다친 거고요.”

“……날카로운 걸 치워야겠네.”

“결론이 그거예요? 내보내 줄 생각은 없고요?”

애리얼이 차갑게 묻자 그는 하하,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애처럼 어지른 이유가 그거야?”

“…….”

“손에 상처까지 내서 내 관심도 끌고?”

빈정거리는 기색을 느낀 애리얼이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제가 한 행동을 자꾸 아이의 투정처럼 묘사하시네요.”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폐하께선 고작 아이의 투정에 그런 흐트러진 꼴로 부리나케 오신 겁니까?”

“투정 부리는 게 너라면, 당연히.”

헝클어진 머리칼, 구겨진 셔츠 깃을 정리할 생각도 없이 그는 웃었다. 제가 마치 그녀의 부모나 오라비라도 되는 양 자상했다.

애리얼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지혈하느라 여태 자신의 손바닥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쏘아붙였다.

“낫게 하고 싶으면 치료술을 쓰면 되지 왜 일일이 지혈하고 있어요.”

“여기서는 마력을 못 쓰거든. 너도 시도해 봐서 알잖아.”

“그게 폐하께도 해당하는 거였어요?”

“같은 신성 마법사를 제한하려면 나에게도 제약을 많이 걸어야 하거든.”

데본시아가 별 경계심도 없이 사실을 말해 줬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다지 믿은 적도 없건만 늘 뒤통수를 맞아, 그라는 존재 자체를 불신했다.

다만, 마력을 못 쓴다는 건 진실인 모양이었다. 아니었다면 그가 수건으로 제 상처를 누르고 있지는 않았겠지. 심지어 그는 지금 세면대 아래에서 구급상자를 꺼내고 있었다. 하얀 상자를 열고 소독약과 거즈를 차례로 꺼냈다.

“손 좀 줄래.”

그가 말했다.

애리얼은 순순하게 다친 손을 내밀었다. 치료를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데본시아의 말마따나 그의 관심이나 끌어 보려고 했던 일이고, 그가 이렇게 왔으니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그는 심각한 눈빛으로 그녀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용 호출 벨을 꺼내 눌렀다.

금세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애리얼이 다쳤어. 엘릭서를 가져와.”

“예.”

대답과 동시에 뭔가 둔탁하고 무거운 잠금 쇠를 푸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달칵, 달칵, 턱.

준비가 끝난 듯 시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놓고 물러가.”

데본시아가 명령하자 문밖의 인기척이 즉시 물러났다.

시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손을 놓고 천천히 문으로 향했다.

애리얼은 예민하게 그를 살폈다.

데본시아가 황제가 된 이래로, 이곳의 문은 내부에서는 열리지 않았다. 식사나 물품은 벽면에 있는 자그마한 식기용 승강기를 통해 받았다. 내부에서 나가려면 열쇠가 필요했다.

그가 목에 건 느슨한 줄을 당겨 셔츠 사이로 열쇠를 꺼냈다. 백금으로 된 하얀 열쇠가 문고리에 꽂혔다. 달칵, 문의 잠금이 풀리며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그는 문 앞에 놓인 걸 집어 든 뒤 문을 닫았다.

애리얼은 그 일련의 과정을 눈에 담았다. 열쇠는 데본시아의 목에 걸려 있다.

“뭘 그렇게 봐?”

그가 갑자기 물었다. 애리얼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는 대신 대놓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폐하께서도 열쇠로 문을 여시네요.”

“문은 다 열쇠로 열지.”

그가 능청을 떨며 애리얼의 다친 손을 끌어갔다. 반대쪽 손에는 손가락 정도 길이의 병을 들고 있었다.

저게 아까 가져오라던 그 엘릭서라는 건가. 애리얼의 시선이 그가 든 투명한 병으로 향했다. 마름모 모양의 유리 안에 연녹색 물약이 찰랑거렸다.

그는 엘릭서의 크리스털 마개를 이로 물어 빼고는 애리얼의 상처에 연녹색 액체를 부었다. 벌어진 단면에 액체가 스며들며 깊게 파였던 상처가 순식간에 메워졌다.

고통은 없었다.

애리얼은 신기해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게 뭐예요? 마도구?”

“그런 거지.”

“마력은 못 쓰는데 마도구는 쓸 수 있는 거예요?”

“응.”

그가 온전해진 애리얼의 손바닥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하자 미련을 두지 않고 그녀의 손을 놓았다.

“앞으로는 나도 여기서 지내야겠다.”

데본시아의 입에서 홀연히 튀어나온 말에 애리얼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진심이세요?”

“또 다칠까 봐 걱정되거든. 나라도 감시해야지. 안 그래?”

“시녀를 시켜도 될 텐데요. 어차피 마력을 쓸 수 있는 장소도 아니니까 제가 저항할 수 없는 건 아실 거 아니에요.”

“처음에 네 옷을 갈아입히는 것도 내가 했어.”

그 한마디로 그는 진득하게 고인 질투심을 드러냈다.

애리얼이 당혹스러워하며 물러났다. 입을 꾹 다물고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날리자 그가 도발하듯 말한다.

“네가 자초한 거야.”

알고 있다.

의도한 짓이었다.

애리얼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며 그를 마주 응시했다.

이제 열쇠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

데본시아는 어질러진 것들을 손수 치우고 업무용 도구와 서류들을 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정리했다. 평생 해 보지 않았을 일일 텐데, 그는 하녀들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청소와 정리를 마쳤다.

말끔히 치워진 방의 풍경에 애리얼은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족이 이런 일을 직접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가 갓 즉위한 황제라는 걸 생각하면 새삼 소름이 돋았다.

지금도 그랬다. 그는 애리얼이 식사를 마친 트레이를 직접 치운 뒤 소파에서 서류를 보았다.

“왜 전부 직접 하세요?”

“직접 하면 안 돼?”

“제국의 황제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가서요.”

서류를 넘기던 그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데본시아가 고개를 들어 애리얼을 보았다.

“질투 나서.”

그가 방긋 웃으며 답했다.

놀랄 만큼 유치한 대답이었다.

한데 그의 지위나 능력을 생각하자면, 질투라는 대답은 유치한 만큼 더 오싹하게 다가온다. 뭐든 가질 수 있고 뭐든 강제할 수 있는 이가 고작 질투가 난다는 이유 하나로 하녀에게나 시킬 일을 손수 하다니. 이 얼마나 음습한 독점욕인가.

애리얼은 소름이 끼쳐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질색하는 애리얼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서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내일, 내 즉위 축하 연회가 열려.”

“…….”

“내일은…… 부디 가만히 있어 줘. 연회 중에는 곧장 오기가 힘들거든.”

그는 즉위식 때와 달리 그녀에게 와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인질로 잡을 물품이 없는 탓일까.

애리얼은 그의 이기적인 태도에 짜증이 났다.

“어차피 갈 곳도 없이 갇힌 게 제 처지인데요. 날카로운 것도 다 치우셨으면서, 혹시 제가 죽기라도 할까 봐 겁나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인데, 최선의 엔딩에 실패한 탓일까. 빈정대는 말을 날리자 그의 눈빛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어떤 단어에 방아쇠라도 당겨진 듯 표정까지 경직되었다. 테이블에 서류를 탁 던지는 손길에서 분노가 묻어났다.

“난 지금 아주 많이 참고 있는 거야.”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평정을 찾고서 여느 때와 같이 웃었다.

“그러니까 실수하지 마, 애리얼.”

한층 낮아졌던 음성도 어느새 평소처럼 상냥하게 돌아와 있었다.

애리얼은 그의 변화를 굳은 얼굴로 마주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뭘 겪었기에 저런 반응을 보일까.

‘내가 죽기라도 했었나…….’

침대에 웅크리고서 회귀 전의 일들을 가늠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차단당해서 우울의 극치를 달리다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라도 했었던 건가.

‘데본시아는 내가 죽는 걸 겁내는 건가?’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걸 이용해서 그를 흔들 수 있지 않을까.

위험한 상상을 한다. 하지만 아픈 건 싫었다. 고작 그를 흔드는 일에 제 목숨까지 걸고 싶지는 않았다.

***

렉시우스, 스카이라, 휘아킨.

결계가 쳐진 대공저의 응접실에 셋이 모여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데본시아의 약점이 될지도 모를 장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황성의 구조를 가장 잘 아는 스카이라가 먼저 입을 열어 장소를 특정했다.

“중앙관에 있는 성소에 밀실이 있어. 원래는 제를 올리는 용도의 공간인데, 황성의 정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된 곳이야.”

“거기라고?”

“조건을 만족하는 데는 거기밖에 없어.”

황성의 지하. 크기는 오 제곱미터 정도. 검은색 문에 흰 벽. 거기에 신성 술식에 든 마력을 감당할 수 있을 내구도.

“네 생각은 어때?”

스카이라와 대화를 나누던 렉시우스가 휘아킨을 보고 의견을 물었다. 가만히 빠져 있기만 하던 휘아킨이 소파 등받이에 모로 기울였던 고개를 들었다.

“저도 동의해요. 신성 극계 술식을 발현하려면 고결하고 상징적인 장소여야 할 테니까요.”

그의 발언에 렉시우스는 생각이 많아진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신성 술식은 아무 데나 써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술식의 정교함과 그걸 발현할 마력도 중요하지만 술식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했다.

얼마 전 이중 첩자로 덜미가 잡힌 아리앨라 클라우스를 심문하여 얻은 정보였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조건을 만족하는 장소는 스카이라의 말마따나 한 곳뿐이었다.

황성에 제 사람을 심어 두고 오래 감시하고 알아본 렉시우스의 생각도 둘과 같았다. 다만 그곳으로 접근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내일의 연회가 매우 소란스럽길 빌어야겠네.”

조용히 바람을 내비친 렉시우스가 내일을 가늠해 보듯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눈깨비가 그친 하늘이 여전히 희뿌옜다.

거친 바람이 창문을 긁었다.

내일은 눈보라가 칠 것이다.

***

애리얼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 데본시아는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일의 날씨는 좋지 못할 것이다. 한기가 느껴지는 대기 속에서 얼음의 냄새가 났다. 내일, 눈보라가 온다.

그럼에도 연회가 취소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새 황제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연회는 모든 귀족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일의 하늘은 무조건 쾌청해야 한다.

그게 문제였다.

날씨를 바꾸는 건 신성 2계에 해당하는 마법으로 마력의 소모가 컸다.

내일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연회라는 소란스러운 틈을 노릴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문지기가 필요하다.

며칠 전부터 줄곧 하던 생각이었다.

복도를 지나 집무실로 들어갔다. 시녀와 기사를 전부 물린 조용한 집무실에 초대한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의 문지기였다.

“레이.”

기다란 금발을 땋아 늘어트린 뒷모습은 미동도 없었다.

데본시아는 의자에 앉은 그의 뒤통수를 가만히 보며 닫은 문에 기대었다. 접선을 한 건 사흘 전이었다. 그에게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전했다. 회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애리얼과 관련된 내막까지 전부 알렸다. 그 뒤에 제안했다.

내일 애리얼이 탈출을 감행할지도 모르니, 중정 궁의 문 앞을 지키고 있어 달라고.

“여기까지 왔다는 건 동의했다는 걸로 알아도 될까?”

데본시아가 물었다.

레이신은 오래 대답이 없었다. 긴 시간 침묵이 흐르고 난 뒤 그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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