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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38)화 (226/264)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는 날, 아침이 밝았다.

데본시아는 피로로 짓무른 눈가를 문지르며 중정에 있는 궁의 문을 열었다.

드레스 룸에 들어가 있던 애리얼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내밀었다.

“왜 오셨어요?”

목소리는 평소 같았으나 말하는 내용이 냉담했다.

그는 쓰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연회 전에 네가 보고 싶어서.”

“……몇 시부터 시작하나요?”

“곧.”

“빨리 가 보셔야 하겠네요.”

“응. 그러니까 잠시만 나와 줄래?”

그는 함부로 다가서지 않고 문 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애리얼은 약간 주저하는 듯하다가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 하늘하늘한 연보라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여름에나 어울릴 부드럽고 가벼운 레이스 자락이 그녀의 걸음마다 나풀거렸다.

미소를 짓던 데본시아의 입꼬리가 경직되었다. 불편한 것을 마주한 것처럼 뻣뻣해진 그가 눈가를 붉혔다.

애리얼은 미처 채우지 못한 은색 네크리스를 쥐고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거, 혼자서는 못 걸겠어요…….”

무언가를 바라듯 말끝을 흐리자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웬일로 제가 채워 넣어 준 물건들에 손을 댔나 했더니.

데본시아는 뒷덜미를 주무르는 척 열쇠와 연결된 목걸이 줄을 매만졌다. 여기에 손을 대려고 그러는 거겠지. 발칙하지 않은가. 제가 네크리스를 채워 주는 사이 줄을 잘라 내려고 하는 거다. 그렇다는 건 뭔가 날 선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거였다.

“내가 해 줄게. 이리 와.”

그는 애리얼의 의도를 다 알면서도 순순히, 아주 안달을 내며 넘어갔다.

애리얼이 다가오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손에 들린 네크리스를 빼앗듯이 쥐고 상체를 숙였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져 서로의 뺨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애리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물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담대하게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데본시아가 신음하듯이 웃었다.

양손으로 펼쳐 쥔 네크리스를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에 대고 감았다. 이음새는 갈고리 모양으로 채우기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걸 못 하겠다고 도움을 구하다니, 이 얼마나 얄팍하고 수준 낮은 유혹인가. 애리얼은 미소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다. 웃지도 않고 난처해하는 표정. 그딴 유혹임에도 그는 정신을 못 차렸다.

‘자, 이제 어떻게 열쇠를 가져갈 거야?’

기회를 주듯 그는 최대한 천천히 네크리스의 이음새를 연결했다.

애리얼의 손이 느릿하게 그의 어깨로 올라왔다. 그녀는 오른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날카로운 건 죄 치웠는데, 가지고 놀라고 액세서리를 몇 종류 남겨 둔 게 문제였다.

데본시아는 모른 체하며 물었다.

“연회에 가고 싶었어?”

“그냥 기분만 내는 거예요.”

“가고 싶지는 않아?”

“사람 많은 데를 좋아하지는 않아서요.”

애리얼의 손이 그의 어깨를 쓸어 올리며 조금씩 상승하다 뒷덜미에 닿았다. 살짝살짝 손끝을 움직이며 열쇠가 매달린 줄을 찾는다.

그곳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데본시아는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잊었다. 아차, 하는 순간 네크리스가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기다란 장신구가 툭, 소음을 내며 러그로 떨어졌다.

애리얼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 떨어트렸네.”

데본시아는 능청을 떨며 몸을 숙였다. 그의 뒷덜미를 더듬던 애리얼의 손이 재빠르게 거두어졌다.

네크리스를 주운 데본시아는 멋쩍은 척 미소를 지었다.

애리얼은 네크리스를 떨군 그의 실수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마주 웃어주는 표정이 꽤 어색했다.

데본시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재차 그녀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서로의 몸이 가깝게 맞닿으며 시선이 어긋나자 애리얼의 손이 다시 그의 뒷덜미를 향했다.

하지만 그는 두 번이나 시간을 끌어줄 생각이 없었다. 데본시아는 처음과 달리 적당한 속도로 네크리스의 이음새를 채웠다.

찰칵, 소리와 함께 애리얼의 시도는 끝이 났다. 좀 빨리하지. 이렇게 기회를 줘도 늦었으니 어쩌겠나.

네크리스를 완벽하게 채운 데본시아가 상체를 물리려 한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애리얼이 속삭이며 그를 당겼다. 그의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돌려 그의 뺨을 찾았다. 어느새 홍조가 오른 그의 볼에 미끄러트리듯 입술을 붙였다. 동시에 뒷덜미를 더듬던 손이 열쇠의 줄을 찾아 쥐었다. 그가 인지하지 못하도록 그의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입술을 댄 그의 뺨이 실시간으로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는 미동도 없이 굳어 있다가 천천히 몸을 떼려고 했다.

“애리얼…….”

그가 타이르듯 말을 꺼내며 애리얼의 어깨를 쥐었다.

애리얼은 다급해졌다. 이제 조금이면 되는데. 그가 고개를 비틀어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려고 했다. 시선이 먼저 스쳤다. 곧이어 그의 두 눈동자가 보인 찰나, 애리얼은 고개를 기울이며 얼굴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고 말캉하며 뜨거운 감촉이 드는 곳에 닿았다. 아까 닿았던 뺨보다 세 배는 더 뜨거운 것 같았다. 그녀의 어깨를 쥔 데본시아의 손이 벌벌 떨리다가 힘을 꽉 주었다.

어깨가 으스러질 것 같았으나, 애리얼은 무시했다.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끝을 날카롭게 간 펜던트의 조각이 헐거운 줄을 싹둑 잘라 냈다.

“……애리얼.”

그가 입술을 움직여 더운 숨을 뱉었다. 그의 억눌린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스몄다.

그제야 애리얼은 제 입술이 포개진 곳이 그의 입술 위라는 걸 알았다.

몸이 굳었다.

그래도 차라리 잘된 거 아닐까.

애리얼은 모르는 척 입술을 포갠 채로 얼른 손을 놀렸다. 그가 심취한 사이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그냥 입술을 맞대기만 한 채로 허접한 유혹을 펼치며, 그의 목에 걸린 것을 빠르게 잡아 뺐다. 끈의 끝에 단단히 고정된 열쇠가 그의 셔츠 칼라 사이로 쑥 올라왔다. 그걸 재빠르게 손에 쥐고서 소매로 숨겼다. 성공했다.

이제 물러나려는데, 어깨를 쥐고 있던 그의 손이 어느새 목을 타고 올라와 뺨을 감쌌다. 그가 놓아주지 않는다.

“애리얼.”

데본시아의 입술 사이서 끓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나 싶더니,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곧이어 입술을 물 듯이 맞붙였다. 애리얼이 한 것 같은 허접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뭉근한 감촉이 열기를 담고 살갗을 데웠다. 부드럽게 맞물리는 감각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도 그가 떨어지질 않아서 무서웠다. 그의 아랫입술을 깨문 이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입술이 찢어져 피를 주룩 흘렸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역했다.

물었던 입술을 놓으며 있는 힘껏 그의 어깨를 밀쳤다.

그제야 데본시아가 떨어졌다. 쿵, 문에 등을 부딪치더니 비틀거리며 얼굴을 들었다. 한껏 심취한 표정이 애리얼을 향했다. 데본시아는 발갛게 얼굴을 물들이고서 밭은 숨을 내쉬었다.

“미안……. 내가…… 너무 급했어.”

먼저 입술을 맞댄 것은 애리얼이었는데, 그가 사과를 전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애리얼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문질렀다. 심장이 펄떡거리며 뛰었다. 와중에도 소매에 숨긴 열쇠를 들키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데본시아는 문에 기대어 찢어진 입술을 엄지로 훔쳤다. 손가락에 묻어난 피를 바라보는 두 눈이 멍하니 풀려 있었다. 입맞춤의 여운을 느끼듯 몽롱한 표정이었다.

“하…….”

그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어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피 묻은 엄지를 손바닥에 대고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서서히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고개를 들어 애리얼을 보았다.

그녀는 겁에 질려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당돌하게 입을 맞출 때는 언제고, 그에 호응해 줬더니 질겁하며 도망친다. 이거 뭐, 단물만 빨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똑똑똑.

긴장감이 팽팽해진 타이밍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연회의 시작 시각이 가까워져 시녀가 그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

“폐하, 귀빈께서 모두 모이셨습니다.”

“알았어. 지금 갈 테니까, 문 열어 놔.”

그의 명령과 함께 달칵, 소리가 울리며 문이 살짝 열렸다.

데본시아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문틈에 손을 끼워 넣고서 애리얼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 침대 주변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애리얼의 소매에 숨은 열쇠를 못 본 체해 주며 그녀에게 물려 찢어진 입술을 열었다.

“실수하지 마. 애리얼, 제발.”

두려움에 떠는 것은 그녀인데 그가 애원하듯이 부탁했다. 제발, 부디.

“내가 친절할 수 있게 해 줘.”

***

새벽녘부터 몰아치던 눈보라는 오늘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쾌청한 하늘은 태풍이 멎은 뒤의 가을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신성 마법이 제국의 기상을 뒤바꾼 덕분이었다.

귀족들은 조용히 감탄하며 황제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그의 위엄은 즉위식보다 오늘에 더 빛났다.

남쪽 정원과 남관이 전면 개방 되고 성대하게 연회가 열렸다. 데본시아는 야외에 놓인 높은 단상에 올라 붉은 망토를 나부끼며 축사를 했다. 꽃잎이 휘날리고, 봄날의 결혼식처럼 화사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한겨울이었으나 따뜻하고 맑았다. 황제의 마법 덕분이었다. 자리한 귀빈들이 일제히 일어나 갈채를 보냈다. 레이신과 렉시우스도 마지못해 동참했다.

스카이라만이 시큰둥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휘아킨은 제 아들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공작의 탓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못내 부럽다는 걸 그는 알까.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동안 스카이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공적으로 축사를 마친 데본시아는 단상에서 내려와 찢어진 입술을 문질렀다. 이제 피는 더 나지 않았다. 입맞춤을 두고두고 상기하려고 고집스럽게 고치지 않은 것인데, 생각보다 회복이 빨랐다.

“미카엘.”

그의 부름에 제라온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위치는 전했습니다. 공자 서하께선 지금부터 중정으로 가실 겁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순서는?”

“르온 국왕부터입니다.”

제라온이 순서를 정리한 명단을 넘겼다. 데본시아는 왕족에서 후작까지만 이어지는 명단을 확인하고서 물었다.

“허클리 백작은?”

“딸을 확인하기 전에는 알현하지 않겠다고, 완고하게 굴고 있습니다.”

“백작에게 동행인이 있나?”

“백작과 함께 입궁한 건 허클리 공녀님의 전속 하녀뿐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 인질로 잡기 딱 좋네.”

그는 흘리듯 말하고 명단을 다시 제라온에게 넘겼다. 제라온은 그의 발언에 오싹함을 느꼈으나 능숙하게 표정을 감췄다.

“르온부터 차례로 만날 테니……. 메이지.”

데본시아는 제라온에게 말하다가 돌연 제 전속 시녀를 찾았다. 메이지가 발 빠르게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허클리 백작을 중앙관 1층 응접실에 잘 붙들어 둬.”

“예, 폐하.”

메이지가 뒷걸음질로 빠르게 물러나더니 곧장 백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데본시아는 확 트인 정원으로 나아갔다. 만나야 할 귀빈이 가득했다. 지루하고 긴 형식적 절차를 앞두고 그는 애리얼과의 키스를 떠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당장에 중정으로 뛰어가고 싶은 걸 참느라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제발 아무 짓도 하지 마라.

그는 빌고 있었다.

‘백작이나 그 하녀까지 인질로 쓰게 만들지 마.’

그러면 관계가 파국이 될 테니까.

그는 빌었다.

***

애리얼은 그가 떠나고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드레스와 원피스뿐인 드레스 룸에서 그나마 편해 보이는 옷을 꺼냈다. 남색의 겨울 원피스와 회색 케이프 코트. 가장 칙칙한 색이고, 장식이 제일 덜 달렸다.

문제는 이곳에 신발이 없다는 거였다.

애리얼은 하는 수 없이 실내용 슬리퍼를 착용한 채 문 앞에 섰다. 분명 발이 시리겠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가기 직전,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황성의 조감도를 보며 탈출 루트를 재확인했다. 문에서 일직선으로 뛰어나가 가장 가까운 창문이나 문을 넘어 복도로 들어간 뒤 중앙관의 뒷문으로 나간다. 그 뒤에 정원의 샛길만 걸어 남관에 도달한 다음 연회가 한창인 귀빈들 사이에 숨어 황성 정문을 지난다. 이후에는 휴대폰의 조감도를 보며 수도의 다운타운으로 들어간 다음 마차를 잡아타든, 잠시 호텔이나 여관에 숨어 다음 루트를 짜든 한다.

허술한 루트에 허술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내 궁에만 갇혀 있었던 그녀가 세울 수 있는 계획은 이게 한계였다.

그가 연회에 붙잡혀 있는 동안 도망쳐야 했다.

어디든 멀리, 그가 없는 곳으로 피난해야 했다. 자유를 제한하는 이 끔찍한 궁을 벗어나야 했다. 그래야만 뭐라도 도모할 수 있다.

그녀는 긴장된 얼굴로 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달칵.

아주 손쉽게도 문이 열렸다.

백합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정원이 드러났다.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빠르게 확인했다. 없다. 아무도 없다.

사박, 잔디를 밟으며 발을 내디뎠다.

휴대폰과 이동 경비로 쓸 보석 몇 개만 챙겨서 몸은 가벼웠다.

‘……달릴까?’

생각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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