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를 밟으며 미친 듯이 다리를 움직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실내용 슬리퍼 때문에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초조했다.
빨리 확 트인 중정에서 벗어나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로 들어가야 했다. 벤치 하나 없는 중정은 심긴 초목도 너무 낮았다.
그나마 데본시아가 직접 감시하는 데다 감금용으로 만들어진 궁이라 그런지 상시 인력이 없다는 게 위안이었다. 그런데도 만약 피할 길 없이 마주친다면 마력으로 기절시키고 갈 수밖에.
멀기만 해 보이던 흰 벽과 기다란 창문이 선명하게 십 미터 이내로 다가왔다.
애리얼은 다리에 힘을 주고 속도를 붙였다.
열리지 않으면 부수고라도 들어가야 했다. 결계가 있다면 박살 내고서라도 나가야 한다.
이우우우-
기이한 소리에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귀를 찢을 듯한 기이한 하울링. 창문을 코앞에 두고서 사색으로 질려 달리기를 멈추었다.
쿵. 쿵. 쿵.
커다란 발굽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어째서. 왜.
덜덜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높다랗게 치솟은 뿔, 시커멓고 거대한 형상이 그녀를 지척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수.
사람을 한없이 짓이기고, 그녀에게 지옥을 선사했던 그 괴물의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과 마주쳤다.
도망쳐야 해!
본능이 호소했다.
하지만 애리얼은 극한의 공포에 내몰려 찍소리도 낼 수 없었다.
저게 왜 이곳에 있는가. 솔렘 공작저에나 있어야 할 저게 왜…….
두려움에 모든 생각이 휘발된 상태로 일 분이 지났다.
희한하게도 마수는 애리얼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깜빡이지도 않는 새카만 눈으로 애리얼을 주시할 뿐이었다.
‘도망쳐도 되나?’
애리얼이 창문이 있는 뒤쪽으로 슬쩍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굳은 듯 멈춰 있던 마수가 쿵! 앞발을 구르며 다가왔다. 겁에 질린 애리얼은 황급히 물렸던 다리를 원위치했다. 그러자 마수도 한 걸음 물러났다.
마치 파수견처럼.
마수는 애리얼이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마수는 네 명에 복종하도록 자랄 거야.”
과거의 한 음성이 그녀를 일깨웠다.
일 년 전의 겨울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 마수는 아직 작았었다.
누가 이만큼이나 키운 걸까.
“너더러 키우라고 하는 건 아니야. 키우는 건 내가 해.”
지이이잉-
손안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떨렸다.
“애리얼.”
흰 벽면에 난 창문을 열고서 그가 다가왔다. 샛노란 홍채를 지닌, 마수와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마수의 주인.
레이신.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재산 목록을 쥐여 주며 그녀의 아군인 것처럼 굴던 그가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
“공자님?”
애리얼은 혼이 나간 듯한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
“대체 왜…….”
“과거는 알지 않는 게 좋아. 알 필요도 없고.”
그가 쌩뚱맞은 소리를 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애리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이신에게도 회귀의 기억이 있었던가?
“나가지 말고, 중정에서만 놀아.”
그가 말했다. 마치 명령하듯이 그랬다.
멍해 있던 애리얼은 분노를 느끼고 눈을 치떴다.
“왜 이러는 거예요! 왜!”
데본시아에 이어 그까지 왜!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친 애리얼은 이를 악물고 사지를 떨었다. 분노로 몸이 주체되질 않았다.
솔렘의 시험 때 있었던 일로 제게 사죄하겠다고 무릎까지 꿇었던 인간이, 데본시아와 같은 짓을 벌이다니. 그것도 마수까지 끌고 와서!
“날 죽이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트라우마로 날 미치게 만들려고? 그래서 미치면 가둬서 가지고 놀려고?”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비켜!”
애리얼은 단번에 거대한 마력을 방사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러다 데본시아가 오면 끝이다. 검푸른 불꽃에 잔디가 화르륵 타들어 갔다.
레이신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면상을 향해 마력탄을 쏘아 날렸다. 힘 조절 따윈 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린 칼 같은 마력의 덩어리가 화살처럼 날아갔다.
레이신은 몹시 당황한 상태로도 그녀의 마력탄을 쉽게 막았다.
힘이 모자랐나.
마력을 열 배로 늘려 압축했다.
“애리얼, 그만…….”
듣기 싫었다. 열 배의 마력을 담은 마력의 화살을 열 개로 만들었다.
반은 마수를 향해, 반은 레이신을 향해 날렸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그나마 가장 가까운 창문을 향해 뛰었다. 안타깝게도 열린 창문은 마수가 지키고 있었기에, 그게 최선이었다.
애리얼은 굳게 닫힌 창을 향해서 마력을 압축해 날렸다.
와장창, 콰장!
유리창이 박살 났다. 창틀까지도 뒤틀렸다. 벽에는 실금이 갔다. 제 마력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갖추고 있는지 보여 주는 단편적인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전에도 이 비슷한 짓을 했었는데.
“앞으로는, 이런 짓을 벌이면 곧장 나를 찾아와.”
피식 웃음이 샜다.
웃기지 마. 너한테는 안 가. 난 나갈 거야.
애리얼이 망가진 창을 넘으려던 순간이었다.
덜컥 손목이 붙들리며 뒤로 끌려갔다.
“이거 놔!”
“…….”
“놓으라고!”
과묵한 문지기는 애리얼을 붙잡아 중정으로 끌고 갔다. 열 개의 마력 화살을 빠르게 처리하고서 문지기의 임무를 다했다. 깨진 창문의 앞을 마수가 막았다.
애리얼이 발버둥을 치며 마력을 재차 방사했다. 처음에 방사했던 것의 스무 배가 넘는 양의 마력이었다.
콰장창!
중정을 둘러싼 벽의 창문이 일시에 깨져 나갔다. 어마어마한 마력의 파장에 중정을 감싼 결계까지 산산조각이 났다.
정원에 검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며 타올랐다. 마수의 몸에도 불이 붙었다. 타는 냄새에 숨이 막히고, 재 가루가 휘날렸다. 시커먼 연기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아름다운 중정이 폐허처럼 망가졌다.
그러나 그녀를 옭아맨 레이신만은 멀쩡했다.
압도적인 방어술로 무장한 그가 그녀를 짓누르듯 품에 껴안았다.
“진정해.”
“놔!”
“괜찮을 거야.”
“놔! 놓으라고! 놔!”
저를 옭아맨 그의 손등을 미친 듯이 긁었다. 어깨를 감싸는 그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긁히고 물린 살갗에서 피가 흘렀다.
그런데도 레이신은 작은 신음 하나 없이 그녀를 결박하고서 있었다.
“괜찮아.”
달랠 줄도 모르면서 달래듯이, 무뚝뚝한 어조가 가늘게 떨린다.
가증스럽게도.
“아아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를 옭아매던 속박이 풀렸다.
“가. 애리얼.”
들린 목소리는 놀랍게도 레이신의 것이 아니었다.
스카이라의 목소리다.
이번에도 그가 와 주었다.
온몸이 환희로 떨렸다.
“고마워.”
애리얼은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덜덜 떨다가 그대로 앞을 향해 뛰쳐나갔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가까운 창문을 뛰어넘었다. 왜 우는지도 몰랐다. 가슴이 벅차고, 슬프고, 기쁘고, 죽을 것 같았다.
“스카이라, 스카이라…….”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복도를 달려 나갔다. 그가 좋았다. 고마웠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작별 인사도 건넬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그녀는 이 세계를 벗어나고 싶었다.
복도 저 너머로 애리얼의 뒷모습이 빠르게 사라졌다.
뒤에 남겨진 스카이라는 온 힘을 다해 마수와 레이신을 잡아 눌렀다. 갑작스럽게 난입한 공격술에 팔을 푼 레이신이 제 위로 뛰어든 스카이라에게 눌려 그대로 엎어졌다. 그의 마력에 뭉개진 마수는 거의 곤죽이 되어서 바닥에 납작하게 너부러져 있었다.
스카이라는 마력의 과부하로 코피를 흘리면서도 억척스럽게 레이신의 목을 쥐고 눌렀다. 애리얼에게 마음을 뒀으면서도 데본시아에게 동조한 이 친우이자 머저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황제의 개가 된 거야.”
“……난 황제의 개가 아니야.”
레이신은 목을 졸리면서도 곧잘 말을 뱉었다.
“난 애리얼의 개야.”
스카이라가 코웃음을 쳤다.
“주인을 물어 놓고, 네가 감히 애리얼의 개라고? 그런 개는 처분해야지.”
“물지 않아. 주인을 살리려고 이러는 거야.”
“데본시아의 손안에 놔두는 건 그 애를 죽이는 짓이야.”
“아니. 너도 진실을 알면 나처럼 행동하게 될 거야.”
“웃기지 마. 난 너처럼…….”
“막지 않으면 애리얼은 자살할 거야!”
스카이라가 비소를 지으며 반박하려는 도중에 레이신이 진실의 파편을 말했다.
스카이라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
그 시각, 불행한 배경을 가진 탓에 즉위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한 휘아킨이 중앙관의 지하로 잠입했다.
그는 스카이라가 특별히 건넨 피스톨을 쥐고서 아리앨라를 앞세웠다. 단 한 발뿐이지만, 아리앨라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탄환이 장전되어 있었다. 이중 첩자를 겁박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 덕분인지 아리앨라는 고분고분했다.
지하 성소의 초입에 들어선 그녀가 방어용 결계를 하나 깨부쉈다. 스파크도 일지 않고 연기처럼 결계가 지워졌다.
“추적되지 않도록 해제 마법으로 깼어요.”
“칭찬이라도 바라는 거예요?”
“아뇨. 제가 돕는 게 협박보다는 죄책감과 충성심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네, 뭐, 그러든가요.”
휘아킨은 충성스러운 척 항변하는 그녀를 무시했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도 쉽게 배신한다. 아리앨라 클라우스는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무하 공작을 배신한 거지만, 어쨌든. 배신자는 믿는 게 아니다.
다만 지금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으니 데려가는 거였다. 뛰어난 해제술사인 데다 금기인 신성 극계 술식을 탐구하여 제명까지 될 정도의 인물이니. 신성 술식을 파괴하러 가는 데 이보다 더 유용한 인력은 없을 정도였다.
아리앨라가 연달아 세 개의 보안 결계를 파괴했다. 해제술 특유의 정적인 뒤처리 덕분에 데본시아는 침입을 아주 늦게 알아챌 것이다.
커다란 방을 지나 좁다란 복도를 전진한 끝에 검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휘아킨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오찬도 끝났을 테고, 곧 자리를 비울 수 있을 터. 며칠 전에 황성의 이인자가 되신 황족께서 조감도를 넘기고 길을 뚫어 주었으니, 이제 렉시우스 크레시앙만 기다리면 됐다.
“그건 그런데, 백작님.”
휘아킨이 아리앨라를 불렀다.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렸다.
“네, 공자님.”
“제 마력을 빼앗은 술식은 어디에 있을까요.”
“…….”
“그것도 여기에 있을까요?”
“그건…….”
“당신도 마법사라면 알잖아요. 황제 폐하, 그 씹새끼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요.”
“…….”
“금서라면 나도 꽤 읽어 봤고, 금기도 잘 알아요. 마력을 뺏는 거, 그거 하면 안 되는 짓이잖아요. 하기 쉬운 짓도 아니고. 더군다나 나처럼 마력이 높으면 더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거, 나도 알아요. 아마 신성 2계나 3계 마법쯤 되려나?”
아리앨라는 사색으로 침묵했다.
정답이었던 모양이지.
“어디에 있을까요? 침실?”
“…….”
“집무실?”
“…….”
“황성에 있기는 한가?”
이제 휘아킨은 아리앨라의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마력을 빼앗긴 일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더 이상 정보를 줄 수가 없었다.
그가 마력을 빼앗긴 건 회귀 전의 일이었다.
데본시아, 그 고귀하신 황족이 회귀 전에 마력을 빼앗고, 그에게 낙인을 찍었다. 그런 뒤 존귀한 황족 나리는 빼앗은 마력을 태생적인 것으로 숨기기 위해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의 이번 인생은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그게 그가 아는 지식으로 추측한 내용이었다.
이번 생에는 마력이 없던 탓에 제 체질을 마저증이라 오해했고, 그걸 해결하려고 온갖 금서를 다 들여다봤으니까.
데본시아, 그놈이 썼을 방식을 거의 다 추론할 정도의 지식이 있었다.
그만큼 그는 절박한 인생을 살았다.
고귀한 마법사 가문에서 마저증으로 태어난 그의 인생은 쥐 새끼가 사는 시궁창만도 못했다.
그래도 적응하고 살았었는데, 그랬는데, 그냥 살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제 마력을 뺏어 간 새끼가 이제는 제 유일한 빛인 사람까지 뺏으려고 하니까.
잿빛 눈동자가 반쯤 돌아 버린 채로 질문을 이어 갔다.
“황성이 아니라면 어디에 있을까. 그 새끼가 회귀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을 장소. 내 마력을 빼앗으려고 기다린 곳.”
그는 홀로 답을 찾아 갔다.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내 것이었을 방.’
속으로 정확한 장소를 특정해 낸 그의 눈이 은빛으로 타올랐다. 살의가 활활 일어나고 있었다.
아리앨라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식은땀을 한 줄기 흘렸을 때였다.
저벅저벅, 숨길 줄 모르는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휘아킨이 사나워진 눈빛을 숨기고 입을 열었다.
“본 사람은 없겠죠?”
“없어. 문에 걸린 방어술이나 풀어.”
렉시우스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아리앨라에게 명령했다. 그의 왼손에 들린 근원 소멸기가 서늘한 빛을 냈다.
아리앨라는 이 와중에도 눈을 반짝이며 근원 소멸기를 훑었다. 저 뛰어난 마도구가 발동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그 호기심은 광기나 다름없었다.
미친 인간.
그래서 백작은 다루기 쉬웠다. 클라우스 백작은 마력과 마법에 돌아서 그와 관련된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냈다.
그녀는 한계에 가까운 마력을 써서 역류한 피를 코와 입으로 뱉으며 기쁘게 데본시아의 결계를 뚫었다.
***
“잠시 용무가 생겨서 자리를 비워야겠어. 미안하네.”
“아닙니다, 폐하. 신은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고맙군.”
바젠틴 국왕과의 대면을 진행하던 데본시아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응접실을 나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중정, 지하.
아주 다 난리가 났다.
“폐하, 송구합니다.”
제라온이 바짝 허리를 숙였다.
데본시아는 싸늘한 얼굴로 명령했다.
“지침대로 처리하고. 메이지.”
“예.”
“가서 백작과 그 하녀를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