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를 지났다.
사용인들이 없는 복도는 조용했다. 천운이었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확인하며 중앙관을 내달렸다. 쫓아오는 이는 없었다. 중앙관의 뒷문을 지나 정원의 샛길을 통해 나갔다. 원래 계획한 루트대로 쭉쭉 달렸다. 걸림돌이 하나도 없었다.
스카이라가 손을 써 준 건가 싶었다.
헉헉, 밭은 숨을 내뱉으면서 애리얼은 계속 뛰었다.
어느새 남관이 보였다.
성대한 연회가 열리는 장소. 화사하게 가꾼 정원에 모인 귀빈들이 보였다. 유쾌한 대화 소리와 우아한 음악이 들려왔다.
애리얼은 조경수에 숨어 천천히 숨을 골랐다.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다.
달리느라 헝클어진 머리칼과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연분홍 장미가 만발한 화원에 외투를 벗어 놓은 귀족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서 고상하게 웃고 있었다.
저 사이로 위화감 없이 섞여야 했다.
애리얼은 두꺼운 케이프 코트를 벗어 들고서 남색 원피스 차림으로 발을 내디뎠다. 얇은 스타킹을 신은 발이 잔디를 밟았다.
실내용 슬리퍼도 레이신과의 마찰 과정에서 벗겨진 상태였다.
우스꽝스럽겠지만 능청스럽게 굴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회가 열리는 정원을 지나지 않으면 황성 밖으로는 나갈 수 없기에…….
사박.
짧은 잔디를 밟으며 탁 트인 정원으로 들어섰다.
온통 밝고 화사하게 차려입고, 갖추어진 꽃들마저 파스텔 톤으로 밝게 빛났다. 그 가운데서 칙칙한 애리얼은 지나치게 돋보였다. 잘 웃고 떠들던 근처의 귀족들이 애리얼을 발견하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애리얼은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빠르게 했다.
그녀가 나아가는 곳마다 정적이 흐른다.
한겨울에 벌어진 화려한 봄의 연회에 그녀는 새카맣게 찍힌 점과 같았다. 경악의 눈길이 쏟아졌다. 이대로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애리얼은 창백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최대한 조용히 숨어 움직이는데도 귀족들의 시선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몇몇 시녀들이 애리얼을 알아보고 흠칫 놀랐다. 낭패였다.
차라리 이목을 죄 집중시키더라도 달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코트를 꾹 쥐고서 다리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누군가 나타나 그녀의 위로 양산을 드리웠다.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하얀 드레스가 애리얼의 볼품없는 차림새를 가렸다.
포도알 같은 눈동자가 애리얼에게로 훅 다가왔다.
“누가 너한테 이런 추한 차림새를 시킨 거니?”
애리얼은 놀란 나머지 어깨를 움츠리며 물러났다.
그러자 그녀가 잽싸게 한 걸음 더 따라붙었다.
“장미나 작약처럼 화려한 색감에 겹겹이 쌓인 드레스가 어울렸을 텐데. 이게 뭐야. 이 어중간한 회색에 남색. 어울리지도 않고……. 아예 새카만 밤하늘처럼 진한 검은색으로 치장하든지 했어야지!”
마주칠 줄도 몰랐고, 알은체를 할 줄은 더더욱 몰랐던 아나스타샤 샤펠.
그녀가 미간을 모으며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구두는 또 어딜 간 거야?”
아나스타샤가 올 나간 스타킹만 신은 애리얼의 발을 보고는 경악해 물었다.
“황성에서 미래의 황후에게 구두도 하나 안 맞춰 준 거야?”
애리얼은 얼떨떨하게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나스타샤의 사나운 성격이 유명한 탓인지 사람들이 애리얼에게서 슬금슬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덕택을 보는 중인 것이다. 이대로 모두의 시선이 떠나고 난 다음 움직이는 게 나을까.
“공녀 서하…….”
“이거 신어.”
애리얼의 발을 빤히 내려다보던 그녀가 놀랍게도 제 신발을 벗었다.
굽이 낮은 흰색의 펌프스를 애리얼에게 쓱 밀어 주고 자신은 레이스 양말을 신은 발로 잔디밭에 섰다.
“서하?”
“빨리 신어. 정말 못 봐 주겠네, 어휴.”
그녀가 신경질을 부리듯 중얼거렸다.
애리얼은 그녀가 건넨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펌프스를 신었다. 갑작스레 기대도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받은 친절이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아나스타샤의 펌프스는 애리얼에겐 약간 컸다. 그럼에도 맨발보다는 훨씬 나았다. 차갑게 떨리던 발끝을 질 좋은 가죽이 푹신하게 감쌌다.
“이제야 좀 보기가 괜찮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그러고는 친한 친구처럼 팔짱을 끼고서 그녀를 이끌었다.
“뭐야? 구경났어? 꺼져! 하여간 예쁜 건 알아 가지고……. 눈 돌려!”
팔을 막 휘두르면서 모이는 시선을 쳐 내고, 목청을 높이며 사람들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애리얼 역시 질겁하면서도 그녀의 곁에 딱 붙어 걸었다.
그럴수록 아나스타샤는 의기양양하게 길을 열었다. 샤펠의 존귀하신 공녀님인 그녀를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간 황태자비 후보 노릇을 한다고 귀여운 척 가식을 너무 떨었지.”
그게 귀여운 성격이었던가.
반박을 삼키며 얼굴을 굳혔다.
어느새 황성의 나가는 문이 가까워져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문을 똑바로 응시하며 데본시아에 대해 떠올렸다.
애리얼을 가지기 위해 약혼녀였던 저를 가차 없이 잘라내던 아름답고도 무서운 첫사랑.
샤펠 공작은 애지중지 아끼던 딸아이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 당한 모욕을 속으로만 삭였었다. 제 딸의 잘못이 없는 게 아니었으므로 황성에 어떤 항의도 하지 못했으나, 뒤로는 조용히 정보를 수집하며 황제를 골탕 먹일 생각을 해왔다. 반역까지는 아니고, 조금만 엿 먹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뒤를 팠다. 아나스타샤도 못내 분한 마음에 거기에 동조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약점을 캐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하고 나서는 공작도 아나스타샤도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오늘, 운 좋게 도망치는 게 분명한 모습의 애리얼을 발견했다.
아나스타샤를 가차 없이 버렸던 이유. 총애하는 백작가 공녀.
그런 존재인 애리얼 허클리는, 놀랍게도 황제를 싫어한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서 샤펠 공작과 아나스타샤가 움직인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애리얼을 정문에 데려갔다.
샤펠 공작의 힘으로 황성 앞의 기사들을 잠시 물려 놓았다. 십 분. 그 안에 애리얼은 도망쳐야 할 것이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에서 표정이 희미하게 사라졌다. 무표정해진 그녀가 사뭇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애리얼.”
팔짱을 풀며 그녀는 애리얼에게서 물러났다.
“나, 네 얼굴만은 진심으로 좋아했어.”
아나스타샤의 두 눈이 애리얼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남부럽지 않게 가장 아름다운 것만 누리며 자라 미감에 예민한 그녀의 심미안을 한껏 만족시킨 얼굴. 열등감에 몸부림치게 만들다 끝내 그녀의 수집욕을 불러일으켰던 외관.
그걸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다.
한때는 애리얼의 외모를 제가 뒤집어쓰고 싶었다. 그녀가 어떤 처지로 사는지도 모르고, 감히.
“그 외모, 아까우니까 상하지 않게 잘 살아. 종종 보러 갈게.”
끔찍할 수 있었던 황태자비의 삶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해 준 애리얼에게, 그녀는 행운을 빌며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서하!”
애리얼이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아나스타샤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애리얼이 멀어져 갔다. 아나스타샤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양산을 꽉 눌러 잡으며 정원으로 돌아갔다.
아나스타샤는 데본시아의 약혼녀로 십 년 가까이 지냈음에도 그의 성정을 잘 모른다. 애리얼이 나타나고서야 그의 본성을 일부 맛봤을 뿐이었다.
이제 그 잔혹한 황제 폐하께서 어떻게 나오실까.
알량한 동정으로 나선 결괏값이 두려워 후회가 조금 들었다. 그러나 애리얼에게 구두를 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 애를 정말 많이 질투하고, 싫어했고, 그만큼 선망했다.
그 빛나는 소녀가 망가지지 않길 바랐다.
아나스타샤는 레이스 양말을 신은 발로 정원을 밟았다.
샤펠 공작이 나와 그녀를 보았다. 떨리는 그녀의 손을 보고서 양팔을 벌렸다.
아나스타샤가 공작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갈색 머리칼이 풍성하게 휘날렸다.
“어머니…….”
“아샤, 걱정하지 말렴.”
“황제 폐하의 진노가 두려워요.”
“괜찮아. 폐하께선 바쁘실 테니, 너에게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실 거란다.”
공작이 딸을 토닥였다.
공작의 말은 정답이었다.
데본시아는 지금 중정과 지하에서의 일 때문에, 고작 신발을 빌려주고 정문까지 산책을 도운 아나스타샤 따위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금빛 머리채를 쥐고 들어 올렸다. 피에 젖은 얼굴에 어지러이 붙은 머리칼, 초점이 흐릿한 벽안에 눈을 맞췄다.
“키라.”
스카이라가 멸칭에 반응해 눈동자를 움직였다.
“왜 자꾸 이래. 레이한테서 다 들었으면, 그래서 이제 알았으면 그만해야지. 회귀를 몇 번을 했는데.”
“……병신, 새끼.”
스카이라가 피를 토하며 말했다.
데본시아는 웃지도 않고 그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놓았다.
스카이라가 처참하게 바닥으로 무너졌다.
레이신을 상대하느라 이미 고갈 상태였던 그는 데본시아의 공격술에 직격당해 사실상 숨만 겨우 붙은 상태였다.
레이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역시 공격술에 직격당한 후 데본시아의 발에 밟혀 쓰러졌다.
마수는 조각조각이 나서 불에 타고 있었다.
황제의 진노는 대기를 증발시킬 정도로 강대했다.
공격술이 폭발한 끝에 중정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하얀 공터가 되었다. 심혈을 기울여 지은 궁마저 재가 됐다.
유례없는 데본시아의 분노에 오래 함께한 제라온마저 기함했다. 등허리에 소름이 오르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체 어쩌려고 나간 겁니까, 허클리 공녀.’
긴장이 촉발되어 공기 중의 산소가 희석된 것처럼 분위기가 숨 막히게 첨예해진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다수의 걸음 소리에 제라온은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떴다. 허클리 백작과 허클리 공녀의 전담 하녀가 손목을 포박당한 채 황성 기사단에 의해 끌려왔다. 그 선두에 선 메이지가 황제를 찾아 고개를 숙였다.
“인질을 데려왔습니다, 폐하.”
이제는 공터가 되어 버린 중정에 선 데본시아가 행커치프로 손에 묻은 피를 닦은 뒤 장갑을 꼈다.
귀빈은 모두 남관에 들였다.
쾌청했던 하늘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꼈다. 진눈깨비가 날리는가 싶더니 굵은 눈발이 휘날렸다.
휘오오오-
차가운 바람이 얼음 같은 눈을 머금고 휘몰아쳤다.
이제 아무도 나갈 수 없으리라.
마법이 끝나고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정문으로 가서 도망친 황후를 데려올 시간이었다.
***
갑작스럽게 기상이 악화되었다.
진눈깨비가 굵어져 함박눈이 되고, 이윽고 함박눈이 우박처럼 단단해져서 눈보라로 몰아쳤다.
애리얼은 벌벌 떨면서 빠르게 눈이 쌓이는 길을 나아갔다. 어느새 눈이 발목까지 쌓였다. 푹푹 발이 빠지고, 눈이 달라붙은 옷은 천근만근이었다.
황성에서 다운타운까지는 걸어서 세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하아,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칼바람에 호흡마저 힘들었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켜서 거리를 가늠했다.
수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이대로면 밤이 되어야 겨우 도착할 터였다.
힘겹게 다리를 움직이며 열심히 눈을 헤치고 나아갔다.
“애리얼!”
성난 고함이 들렸다.
우우우웅-
뒤늦게 휴대폰이 울렸다.
애리얼은 공포에 전율하며 고개를 돌렸다.
온통 하얀 풍경 속에 핏빛 망토를 휘날리는 남자가 보였다.
데본시아다.
그의 옆으로 기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저를 잡으러 온 것인가.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마력을 모았다. 반역으로 여겨져도 상관없다. 끌고 가려고 하면 온 힘을 다해 저항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남은 게 없었다. 매달릴 건 진엔딩 하나뿐이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강력한 마력의 기운을 느낀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디 해 봐!”
눈보라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다가왔다.
못 할 줄 알고.
애리얼이 마력을 모은 순간, 눈보라가 살짝 잦아들었다.
데본시아의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 아주 익숙한 얼굴, 갈색 머리칼에 하얀 앞치마를 입은 사람.
공격술을 펼치려고 들어 올렸던 손이 툭 떨어졌다. 마력이 속절없이 흩어졌다.
공격할 수 없었다.
그가 카논을 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