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의지가 힘없이 부스러졌다.
카논이 입에 재갈을 물고 양손을 포박당한 채 죄인처럼 기사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전쟁 포로 같은 꼴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그녀가 처참한 대우를 받고 있다.
애리얼은 눈에 핏줄을 세웠다. 마력을 털어 낸 공허한 손을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카논은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요!”
강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그녀의 목소리가 높게 울렸다.
“카논을 놔줘!”
휘오오오오-
절규와 분노 그 중간의 음성이 눈보라와 뒤섞였다.
재갈을 문 카논의 입꼬리가 바르르 경련했다.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저렇게 소리치며 격해진 아가씨를 본 일이 없었다.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고작 하녀 한 명을 위해 황제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제 주인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고작 하녀를 인질로 잡았다.
“아으으…….”
카논이 신음했다.
애리얼은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다가서지도 못했다.
교착에 빠진 그녀의 두 눈동자가 연약하게 흔들렸다.
그는 그녀가 망설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바람이 멈추고 일순 주변이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해졌다.
절대적 지배자의 마력이 하얀 설원을 뒤덮으며 눈보라마저 배제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눌 백색의 무대였다.
그는 멀리서 애리얼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놔주면.”
자비를 베풀듯이.
“착하게 이리 올 건가?”
행동을 정해 주는 음성이 명료하게 그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카논이 재갈을 문 사이로 비명을 지르듯 우악스러운 소리를 내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기사들이 붙잡는데도 발악하며 온몸으로 거부를 표했다.
아가씨, 오지 마세요! 도망치세요!
카논의 저항은 애리얼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다.
애리얼은 그녀의 버둥거림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고서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윽, 으으!”
카논이 있는 힘껏 목소리를 쥐어짰다. 제발 가세요. 애원하는 듯했다.
데본시아가 짜증 난다는 듯이 미간을 구기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카논의 발악이 멈추었다. 고동색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더니 눈꺼풀이 스르르 덮였다. 고개가 앞으로 훅 꺾였다. 카논의 몸이 기사에게 붙들린 채 축 늘어졌다.
“이…… 미친!”
경악한 애리얼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뛰쳐나가듯 대여섯 걸음을 나섰다.
데본시아가 그녀를 환영하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어서 뛰어들어. 종용하듯 환히 품을 여는 그의 모습에 애리얼의 움직임이 멎었다.
함정. 덫. 올무.
극심한 거부감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다시금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된 애리얼은 싸늘히 굳은 낯으로 데본시아를 보았다.
황성의 절대자. 제국의 황제. 제지할 이가 아무도 없는 권력의 정점.
나는 그에게서 다시 도망칠 수 있을까.
카논을 구해야 함을 알면서도 사지가 벌벌 떨려 왔다. 이대로 그에게 잡히면 이제는 어떻게 될까. 오버히트 배드 엔딩에서 맞게 될 제 말로가 두려웠다.
발아래가 늪처럼 느껴졌다.
멈춰 버린 그녀를 보며, 그가 피로한 듯 한숨을 쉬었다.
“이리 와.”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라는 양 그의 음성은 딱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리얼은 다가서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완고했다.
“카논을 어떻게 한 거예요.”
“재운 것뿐이야.”
“……카논에게는 손대지 마세요. 카논은 풀어 줘요.”
“이 하녀를 놔주면 네가 올 거냐고, 짐이 먼저 물었지 않아.”
기사를 뒤에 세우고서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스스로 짐이라 칭한다. 상냥한 기색을 감춘 그가 폭군처럼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를 굴종시키려고, 그녀 스스로 저의 품에 안기게 하려고.
애리얼은 그의 수를 읽고서 이를 악 깨물었다.
이대로 그에게 가면, 카논이 훌륭한 협박의 수단이라는 걸 그에게 알리는 꼴이 되었다. 당연히 카논도 풀려나지 못하고 계속 인질로 잡힌 채 황성에 갇히게 되겠지.
지옥의 굴레와 같은 올무가 그녀의 발목을 졸랐다.
데본시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그의 목소리가 조금 상냥해졌다.
익히 겪어 왔던 회유의 순간 앞에 애리얼은 숨통이 졸리는 듯한 표정으로 떨었다.
데본시아의 얼굴에 감돌던 희미한 웃음기가 지워졌다.
“그러게 내가 실수하지 말라고…….”
그가 돌연히 말을 멈추었다. 코에서 피가 흘렀다. 새하얀 얼굴을 적시며 뚝뚝 흐른다. 그가 고통스러운 듯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새하얀 눈밭에 붉은 자국이 투두둑 생겨났다.
기사단의 혈색이 설원의 눈처럼 창백해졌다.
황제가 피를 흘린다.
날씨도 자유자재로 바꿀 만큼 압도적인 그 황제가, 피를 흘린다. 유례없는 상황이었다. 냉철해야 할 황성의 기사단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적습인지 아닌지 판단하려 애쓰는 눈빛이 분주했다.
“폐하!”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시에나가 황급히 뛰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어서 황성의를…….”
“물러가라.”
데본시아는 휘청거리면서도 시에나의 접근을 막았다. 피 묻은 얼굴을 닦으며 시에나를 밀어내곤 애리얼에게로 고집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의 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한 발짝 다리를 움직인 즉시 입에서 울컥, 핏물이 토해졌다. 허리가 고꾸라지듯 앞으로 숙어졌다. 피가 멈추질 않았다.
마력의 과부하로 인한 역류 현상이었다.
그는 발치의 눈이 피에 절어 녹아 버릴 정도로 토혈했다.
그의 마력이 약화함과 동시에 잦아들었던 눈보라가 다시 몰아치기 시작했다.
휘오오오오-
강풍이 눈을 머금고 싸늘하게 몰아쳤다.
기사들은 그들의 군주를 지키기 위해 충성스럽게 그를 에워쌌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카논 쪽의 경호가 헐거워졌다.
애리얼의 눈이 그 틈새를 정확히 포착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기회였다.
굳었던 다리가 풀렸다.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밟으며 곧장 카논을 향해 나아갔다. 순식간에 마력을 활성화하며 카논을 붙든 두 명의 기사를 노려보았다.
그들도 황성의 기사이기 때문일까. 두 기사의 고개는 애리얼보다 황제를 향해 있었다. 충성스러운 만큼 황제의 피에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큰 행운이었다.
파즈즈, 스파크를 일으키며 손안에서 마력탄이 뭉쳐졌다.
“명령한 대로 움직여!”
마력의 기운을 느낀 데본시아가 사납게 소리쳤다. 황제의 엄중한 명령이었다. 기사들이 뒤늦게 제자리를 찾으려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콰앙! 쾅!
검푸른 마력탄이 폭발하고, 카논을 결박한 기사 두 명이 차례로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그녀가 강력한 마력을 지닌 신성 마법사였던 게 일차적인 이유였고, 허클리 공녀에게는 작은 생채기조차 입히지 말라던 황제의 명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도 컸다.
애리얼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카논을 낚아챘다. 마력을 조심스럽게 방사해 카논의 손을 결박한 줄과 재갈을 끊어 냈다. 하지만 기절한 카논을 그녀 홀로 부축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가느다란 사지는 몇 걸음도 못 가서 고꾸라질 듯 휘청거렸다.
눈보라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카논의 얼굴 위로 눈보라의 차가운 눈 결정이 스쳤다.
“……으윽.”
카논의 입술 새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어나, 카논! 일어나!”
애리얼이 다급하게 카논의 뺨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열리며 고동색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아가씨?”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네, 네! 괜찮습니다!”
카논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누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사박거리며 눈을 밟는 소리가 분란하게 주변을 에워쌌다.
애리얼과 카논은 동시에 그 소음을 듣고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온통 하얀 눈뿐인 광경에 검은 실루엣이 섞여 든다.
황성의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에워쌌다. 다만 그들의 포위는 아주 첨예하지는 못했다. 유례없이 피를 흘리는 황제 쪽으로 신경이 쏠려있었고, 허클리 공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말고 포위하기만 하라는 황제의 명 때문에 더 다가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허술함을 포착한 애리얼은 빠르게 결단을 내려 카논을 제 뒤로 보냈다.
“내가 막고 있을게. 카논은 먼저 도망쳐.”
카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괜찮으세요?”
“응. 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전…….”
“난 괜찮아, 카논. 빨리 도망쳐.”
애리얼은 단호하게 카논을 밀어냈다. 그녀가 다시 인질로 잡힐 것을 염려한 행동이었다.
기사단은 애리얼과 카논이 갈라지면 당연히 애리얼부터 노릴 테니까.
카논도 제 고용주의 의도를 읽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없어야 제 아가씨가 더 쉽게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짧은 인사를 남기고 카논은 포위가 가장 허술한 곳을 돌파해 뛰어갔다. 큰 도로가 지척이니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사박, 사박, 사박.
기사 몇이 카논을 빠르게 쫓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 하녀에게 가면 여기서 자해할 거야!”
애리얼이 고함을 질렀다.
기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중요한 건 자신일 터. 그래서 이판사판으로 한 협박이었는데,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인질로 잡혀 고생했음에도 감사를 말하고 간 카논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애리얼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검푸른 마력이 손안에 고였다. 숨을 한 번 두 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마력을 뿜어낼 순간을 기다리며 침착하게 심신을 가라앉히고 시청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사박, 사박, 사박.
군화에 눈이 뭉개지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혹시나 자해를 저지를까, 그녀를 에워싼 기사들이 천천히 접근하는 소리였다.
황제가 건 제약 탓에 조금도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족쇄를 채운 듯 움직임이 제한된 기사단.
그들의 모습이 선명해진 순간, 애리얼이 마력을 방출했다.
***
수 분 전, 아리앨라가 탈진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며 모든 방어술을 깨트렸다.
밀실을 막은 문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나갔다.
렉시우스는 쓰러진 문을 발로 밀어 치우며 안으로 진입했다. 휘아킨이 아리앨라를 대충 부축해 주며 그 뒤를 따랐다.
렉시우스의 시선이 빠르게 밀실의 벽을 훑었다. 술식이 가득한 사방이 기억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쳐 휘청이던 아리앨라가 눈을 말똥하게 뜨고서 바쁘게 내부를 뜯어보았다. 반면 휘아킨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충 주변을 쓱 훑고 말았다.
“이게 다 신성 술식이라는 거예요?”
“아마도? 백작이 더 잘 알겠지.”
렉시우스의 시선이 아리앨라를 향했다.
아리앨라는 정신없이 주변을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이 특유의 도식과 압도적인 복잡함과 난해함! 첨예하고 완벽하게 다듬어진 신성 술식이에요!”
아낌없이 감탄한 그녀가 묻지도 않은 정보를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먼저 그녀는 밀실에 새겨진 술식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다.
오래전에 새겨서 해진 것, 몇 번이고 겹쳐서 다시 새긴 것, 그리고 완전히 새로 새긴 것.
세계의 순리를 벗어나는 이 술식은 수 없는 회귀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 세계자체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대기와 물처럼, 술식은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어버렸다.
무척 들뜬 아리앨라는 피를 줄줄 흘리는 입으로 각각의 술식이 봉쇄, 회귀, 압제라고 설명했다.
봉쇄는 이 세계를 떠나는 길을 막는 차원 차단 술식.
회귀는 이 세계를 특정한 시점으로 돌리는 시간 역행 술식.
압제는 이 세계를 아우를 만한 압도적인 힘을 강제로 누르는 금제 술식.
봉쇄는 진행하다가 포기했고, 회귀는 여러 번 사용하였으며, 압제는 최근에 새겨 현재 진행 중인 술식이었다.
압제에 흐르는 마력은 그 종류가 조금 달랐기에 알아볼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앞선 두 술식을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새로운 마력을 끌어 쓴 것일 터. 오래되지 않았다는 증명이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휘아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압제 술식을 쏘아보는 그의 잿빛 눈동자가 분노에 형형했다.
그 와중에도 아리앨라는 눈치 없이 감탄의 말을 쏟아 냈다.
“어떻게 세 개나 되는 신성 술식을 이렇게 완벽히 구현하다니……. 정말 대단한……!”
“설명에 사족은 됐어.”
아리앨라의 말을 막은 렉시우스가 근원 소멸기를 들고서 움직였다. 목표는 바닥에 새겨진 압제 술식. 가장 최근에 새겨 선명한 은색의 선을 자랑하는 그 술식에 근원 소멸기의 날을 들이댔다.
아리앨라가 몹시 당황하여 다급히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대공자 저하……. 그걸 진짜 부수시게요?”
“안 부술 거면 내가 뭐 하러 여길 왔겠어.”
무표정하게 대꾸한 렉시우스가 근원 소멸기를 세로로 세우고서 은색 술식의 정가운데를 조준했다. 그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가질 수 없으면, 너도 가져선 안 되지.”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렉시우스의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서고, 근원 소멸기가 바닥의 술식을 파고들었다.
은색으로 빛나던 압제 술식이 산산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