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치의 눈이 토혈에 녹아내렸다.
대량의 마력이 한 번에 소실되어 머리가 극심히 어지럽고 기도가 타는 것 같았다.
데본시아는 위태롭게 헐떡거리면서도 저를 부축하려는 시에나를 밀어냈다.
압제가 풀렸다. 시간이 없다.
“넌 황성으로 귀환해라.”
“하지만, 폐하!”
“반박하지 마. 한 번에 알아들어.”
데본시아가 시에나를 노려보았다. 형형한 황제의 두 눈에 시에나가 희게 질린 얼굴을 숙였다.
“속히 귀환하겠습니다.”
빠르게 복종을 택한 시에나는 기사 둘을 데리고 황성으로 향했다.
이미 스카이라와 레이신은 행동 불능 상태. 술식을 부수었을 렉시우스도 아마 죽었거나 죽어 가는 상태일 터. 다만 귀빈들이 남관에 머물고 있으니 신뢰할 수 있는 수족들은 최대한 황성에 배치하는 게 좋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술식이 망가졌다. 새로 그리기에는 마력도 시간도 부족했다. 지하의 침입자는 여전히 밀실에 머무는 채였다. 이대로면 밀실은 침입자의 손에 오염되어 다시는 신성 술식의 기반으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 와중에 눈앞에서는 인질로 잡았던 하녀가 도망치고 있었고, 애리얼은 악에 받친 듯 강대한 마력을 방사하며 제 기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검푸른 마력의 스파크가 눈까지 태웠다.
기사들은 감히 애리얼을 다치게 할 수 없어 애를 먹고 있었다.
데본시아는 격전이 벌어지는 곳을 심란하게 주시했다.
지하는 여전히 수습되지 않았고, 침입자는 제멋대로 움직인다. 갑작스레 불어닥친 눈보라와 사라진 황제 탓에 귀빈들은 당혹에 빠져 있었다. 특히나 왕족들의 경우엔 오늘을 위해 악천후를 무릎 쓰고 먼 길을 달려온 손님들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수습하지 않으면 향후 외교 관계에 악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황성으로 돌아가야만…….
“아, 됐어.”
시름에 잠기듯 깊어지던 눈동자가 급격히 차분해졌다.
지하와 황성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얼굴에 남은 혈흔을 닦고서 걸음을 옮겼다. 애리얼이 다가와 주기를 바랐으나, 헛된 꿈이었다. 술식이 망가진 이상 그에게 남은 건 미루고 미루었던 최악의 수뿐.
마력이 과부하에 이르고 심신에 타격을 받은 상태에서도 그는 수월하게 순간 이동을 해냈다.
눈밭을 가르며 멀리 달아나던 카논이 눈앞에 나타난 그를 보고서 기겁하며 방향을 돌렸다. 데본시아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등을 돌린 카논의 어깨를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처박듯이 눌렀다. 동시에 강한 환각술을 펼쳤다.
카논은 힘없이 고꾸라져 기절했다.
데본시아는 엎어진 카논을 내버려 두고 일어났다. 그를 급히 따라온 기사가 기절한 카논을 둘러멨다.
이제 애리얼을 찾아야 할 때다.
그는 검푸른 마력이 흘러나오는 중심지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서서히 눈보라가 잦아들자 기사들이 움찔거리며 동작을 멈추었다. 황제의 하얀 마력이 눈보라를 억누르며 일대를 에워싸고 있었다.
애리얼 역시 압사당할 듯한 마력의 기운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데본시아가 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기사의 어깨에는 익숙한 인물의 실루엣이 보였다. 아래로 늘어진 카논의 고개가 힘없이 흔들렸다.
그 순간, 담담하게 맞서던 애리얼의 표정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데본시아는 낭패감에 휩싸인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손을 슬쩍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기사들이 삽시간에 물러났다. 카논을 인질로 잡은 기사만 유일하게 그의 곁에 남았다.
애리얼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애리얼과 다섯 발짝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추어서 입을 열었다.
“애리얼, 이리 와.”
애리얼은 주먹을 꽉 쥐고서 고개를 숙였다. 잠시나마 카논을 도망치게 할 수 있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토혈로 인한 일시적인 요행은 결국 요행이었을 뿐이다. 카논은 다시 인질로 잡혔다.
“……카논은 놔줘요.”
그녀의 요구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데본시아는 미간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네가 뭘 착각하나 본데, 넌 지금 내게 뭔가를 요구할 상황이 아니야.”
“그럼 자비라도 바랄게요. 카논은 풀어 주세요.”
그렇게 말하자 그가 피식 조소했다.
“자비라……. 그건 이미 더없을 정도로 충분히 베풀었을 텐데.”
“대체 언제 자비를 베풀었다고…….”
“열쇠.”
발끈하여 반박하는 애리얼의 말을 데본시아가 단박에 잘라 냈다.
“줄을 잘라 열쇠를 소매에 숨기는 것도 모르는 척해 줬고, 요행으로 황성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도 참았고, 샤펠의 모녀가 널 돕는 것도 눈감았어. 어떻게 내가 이 이상 자비로울 수가 있겠어. 안 그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속을 후벼 파고 뒷골을 당기게 했다. 다 알고 있었구나. 다 눈치채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실패했으니, 네 완패야, 애리얼.”
그의 말이 맞았다. 완패였다. 그녀는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발버둥을 쳤으나, 결국 패배만 얻었다.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속이 쓰렸다. 억울하고 화가 나서 호흡이 격해졌다. 눈가까지 시큰거렸다.
애리얼은 입술을 꽉 깨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의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데본시아는 건조한 표정으로 고개 숙인 애리얼을 응시했다. 그는 그 나름대로 감정을 삭이는 중이었다. 술식이 깨어지고 즉위 축하연도 엉망이 되었다. 이미 손해를 너무 많이 봤다. 그러니, 그녀만큼은 무조건 가져야 했다.
“스스로 걸어서 나한테 와, 애리얼. 내가 잡으러 가게 만들지 마.”
그가 말했다. 명령이자 경고였고, 마지막 자비였다.
하지만 애리얼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너무나 분해서, 그의 말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마지막 자존심을 태웠다. 무고한 카논까지 인질로 잡고서 저를 협박하는 그가 너무나 싫었다.
미동도 없는 그녀를 보며 데본시아가 재차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 정도도 못 하겠다는데, 내가 가야지.”
인심을 써 준다는 듯 내뱉은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눈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약간의 거리마저 좁혀진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애리얼은 공포를 느꼈다. 흠칫, 떨린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데본시아가 두려웠다. 본능적인 거부였다.
나약해진 마음이 회피를 외쳐 댔다. 미동도 없던 몸이 절로 움직였다. 여전히 도망을 바라는 다리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어떻게 겨우 나왔는데.
바쁘게 물러나는 뒤꿈치가 눈에 푹푹 빠졌다.
거부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 행동에 데본시아의 낯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한 발짝이라도 더 가면, 네 하녀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게 될 거야!”
그가 소리쳤다.
발을 적시는 눈보다 더 냉랭한 음성이 애리얼의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한 발짝도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애리얼은 온통 눈으로 가득한 이 하얀 지옥 속에서 전율하며 그를 마주했다.
칼날 같고, 바다 같은 상이한 색의 두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한겨울의 눈보라처럼 그가 닥쳐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접근하여 팔을 뻗었다.
저항할 수 없다.
그가 무력한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가 하얀 정장을 입은 품으로 떨어졌다.
백색의 지옥.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진정한 배드 엔딩의 시작이었다.
멈췄던 눈보라가 다시 몰아쳤다.
***
무너진 밀실의 바닥에 쓰러진 렉시우스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생사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처참한 꼴을 한 채로 한참을 피조차 흘리지 않았다. 응당 흘러야 할 피조차 근원 소멸기의 대가로 증발했다.
아직 숨은 붙어 있는 거 같은데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게 아리앨라의 판단이었다.
휘아킨은 쓰러진 렉시우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지금 그가 죽어 버리는 건 곤란했다. 아직 황제는 건재할 텐데, 이쪽 전력만 나가는 꼴이었다. 일단 목숨은 붙여 놔야 한다.
“살릴 수 있나요?”
휘아킨의 물음에 아리앨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을 내놓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엘릭서를 사용하면 살 확률이 높아질 거예요.”
“그럼 쓰세요.”
“……네?”
당황스러워하며 묻는 아리앨라에게 휘아킨은 대답 대신 총구를 들이밀었다.
“공자님?”
“엘릭서를 써서 렉시우스 크레시앙을 살려요.”
“하지만 전 지금 엘릭서가…….”
“엘릭서를 써서 렉시우스 크레시앙을 살리라고 했어요.”
그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며 조용히 그녀를 협박했다.
아리앨라는 울상을 지으며 숨겼던 것을 토해 내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으로 소환술을 펼쳐 엘릭서를 가져왔다. 녹색 액체가 담긴 병 세 개가 그녀의 치마폭으로 떨어졌다. 이중 첩자 노릇으로 황성에서 하사받은 거였다. 그중 두 병을 렉시우스에게 사용했다.
두 번째 병이 완전히 다 비워진 후에야 렉시우스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근원 소멸기의 정산이 끝난 것이다. 검붉은 피가 금세 옷을 다 적시고 바닥까지 흥건하게 만들었다.
과다 출혈로 죽을 것 같은 양이었다.
그럼에도 아리앨라는 남은 한 병을 그에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엘릭서를 마셔 제 마력을 채웠다. 그런 뒤 최소한의 치료술로 렉시우스에게 응급 처치를 해 주고는 물러났다. 크레시앙 대공가 특유의 회복이 빠른 체질 덕에 그는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괜찮겠지.
휘아킨도 그녀에게 그 이상의 치료를 명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향한 총구를 내리지도 않았다. 그는 아리앨라에게 피스톨을 겨눈 채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이 렉시우스의 손에 쥐어진 근원 소멸기를 조심스럽게 빼내 쥐었다.
이제는 그가 이것을 쓸 차례였다.
“이제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으로 이동해요.”
근원 소멸기를 쥐고서 아리앨라를 마주한 채 명령했다. 아리앨라는 주저하는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휘아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신성 극계는 아니지만 신성 2계는 가뿐히 될 술식이에요.”
“알아요.”
“크레시앙 공자님과 달리 도련님께는 근원 소멸기를 버틸 체력이 없어요. 마력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걸로 될지…….”
“판단은 내가 해요. 그걸로 뒤져 버리면 내 그릇이 그 정도인 거겠죠.”
냉담히 말하는 휘아킨을 보며 아리앨라는 입술을 피 나게 깨물었다. 그를 고치기 위해 고용된 이가 그가 죽을지도 모를 치명상을 입는 데 일조하다니. 무하 공작가에 있어 이보다 큰 배신은 없으리라.
“곤란하면 입술만 자꾸 씹는 게, 제 선배님이랑 똑같네요.”
휘아킨이 웬일로 웃음기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 그리운 이를 보듯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은 것도, 비슷하고.”
“…….”
“피는 못 속이나 보죠?”
피식 미소까지 짓는 그 얼굴은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그는 아리앨라의 입술 씹는 버릇을 보고 떠올린 누군가를, 끔찍하게도 깊이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몹시도 위험하여 그 본인은 물론이고 애정의 대상까지도 위험하게 만들 것이었다.
“공자님…….”
“다른 생각 하지 말아요. 그냥 이동이나 해요. 판단은 내가 하니까.”
그는 다 안다는 듯이 아리앨라를 협박했다. 허리에 겨눠진 총구의 감촉이 서늘했다.
선택지는 없었다. 아리앨라는 눈을 감으며 순간 이동을 했다.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무하 공작가의 상징인 제비나비가 새겨진 문.
무하 공자의 개인실.
신분도 성별도 숨기고 살았던 그의 처지로는 평생 와 볼 수 없을 것 같던 곳. 무하 공작이 제 아들의 마저증을 부정하며 고집을 부려서 만들어둔, 참으로 기구한 공간.
굳게 잠긴 채로 영원히 쓰일 일이 없었던 그 공간의 앞에 도착했다.
아리앨라는 그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제비나비가 새겨진 문을 짚고 섰다. 방을 폐쇄하는 강력한 신성 마법사의 방어술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해제하며, 엘릭서로 겨우 회복한 마력을 바닥까지 소모했다. 문에서 물러난 그녀의 얼굴은 코피와 토혈로 피범벅이었다.
“부디, 공자님께서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고개를 돌려 힘겹게 그의 안위를 빈 아리앨라가 그대로 무너졌다. 휘아킨은 피스톨을 거두고 뒤로 넘어가는 그녀를 받아 냈다. 마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그녀는 만신창이였다.
휘아킨은 근원 소멸기와 피스톨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는 기절한 아리앨라를 안아 들었다. 가문을 배신하고서 황제의 밑에서 일을 수행한 이였으나, 근처 응접실의 소파에 눕혀 제 겉옷까지 덮어 주는 친절을 보였다. 그녀의 눈 감은 얼굴이 애리얼과 꽤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리앨라의 죄를 묻지 않기로 했다. 애리얼을 빼내 황제의 손으로 넘어가게 만든 배신까지 눈감아 주기로 했다.
휘아킨은 바닥에 놓인 피스톨을 회수하고 근원 소멸기를 손에 들고서 문 앞에 섰다. 그의 인생을 시궁창으로 처박은 원인이 이 너머에 있다.
그가 차게 가라앉은 얼굴로 문고리를 쥐고 돌렸다. 방어술을 잃은 문이 힘없이 스르르 열렸다. 밀실과 닮은, 은색의 술식이 사방에 새겨진 방이 보였다.
그 내부로 진입한 휘아킨은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금장식을 가득 달아 둔 보라색의 벽지, 천장에 그려진 밀도 높은 풍경화, 고풍스럽게 양각된 가구들.
공작저 저택 본관에 있는 그의 방과 똑같은 디자인.
“어머니도 정말…….”
허탈하게 나간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흐려졌다.
쓰지도 않을 방을 이토록 꾸며 놓은 무하 공작의 허례허식이 참으로 우스웠다.
오늘 그는 이 방에서 죽거나, 혹은 이 방에 어울리는 무하 공자로서 재탄생할 것이다. 그녀가 그리 바랐던 대로.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대고 몸을 숙였다. 거미줄 같은 복잡한 무늬가 한곳으로 모이는 가운데. 술식의 중심인 대리석 바닥의 한중간으로 근원 소멸기를 가져갔다.
“어머니, 혹시 당신은 제가 여기서 죽으면 슬퍼해 주실 겁니까?”
그가 여기 없는 이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만약 당신이 저를 위해 오열이라도 하신다면…….”
근원 소멸기를 세로로 세웠다.
“몹시 가증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대로 바닥에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