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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43)화 (231/264)

애리얼은 데본시아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 앞에서는 시에나가 잽싸게 나서서 복도 중간중간 나타나는 문을 열었다. 뒤에서는 기사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카논을 둘러메고서 따라왔다.

달칵, 달칵, 달칵.

수없이 문이 열리고, 기다란 복도가 끝없이 이어진다.

애리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걸음을 빨리하던 데본시아가 갑작스럽게 허리를 고꾸라트렸다. 붉은 피가 대리석 바닥으로 번졌다. 겨우 멎었던 토혈이 다시 울컥 터져 나온 것이다. 허억, 헉. 불규칙하게 헐떡거리며 토혈한 끝에 그는 욕을 내뱉었다.

황제가 내뱉은 상스러운 욕설에 시에나와 기사가 놀라 움찔거렸다. 애리얼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렇게 험한 말을 내뱉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이토록 고통스럽게 토혈하는 것도 본 일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앞서던 시에나가 짙어지는 피비린내를 맡고 창백한 낯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폐하…….”

“멈추지 마라.”

데본시아가 완고한 기색으로 피 묻은 입을 닦으며 말했다.

시에나는 그의 상태가 몹시 걱정되었으나 차마 반항하지 못하고 앞장섰다.

그대로 다시 이동이 이루어졌다.

데본시아는 단 한 순간도 애리얼을 붙든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애리얼은 미간을 구긴 채 그의 억척스러운 힘에 끌려갔다. 이러다가 팔에 멍이라도 드는 게 아닐까. 붙들린 팔이 아파져 오는 만큼 두려웠다.

데본시아의 상태가 평소와는 너무도 달랐다.

그가 저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무엇이 그를 이렇게나 여유 없게 만들었는지.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나 토혈하게 만드는지.

의문뿐이다.

의문에 해답은 없는 상태로 바쁘게 끌려간다. 그리고 이윽고 어떤 장소에 도착한다.

시에나가 어떤 장소의 문을 열고, 데본시아가 애리얼을 끌고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애리얼은 커다래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벽은 검은색이고 바닥은 체스 판 같은 대리석인 우중충한 색감의 거대한 공간. 있는 거라곤 커다란 침대 하나와 욕실인 듯 보이는 문이 다인 장소였다.

“여기가 어디예요?”

애리얼이 겁먹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데본시아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서 입술을 내렸다. 애리얼이 흠칫하며 물러나려 했으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는 게 더 빨랐다. 촉촉하고 녹진한 감촉이 머리카락과 함께 이마를 꾹 누르자 졸음이 몰려왔다.

익숙하고 불가항력적이며 불쾌한 느낌이 정신을 잠식했다.

애리얼은 속절없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환각술…….”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데본시아는 잠든 애리얼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는 침대로 향했다. 부드러운 시트 위에 그녀를 눕히고 크기가 맞지 않는 펌프스를 벗겨 냈다. 그러고는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불을 덮어 주었다.

환각술에 직격당해 곤히 잠든 그녀는 그가 다가가도 경멸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데본시아는 그녀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조심스레 정리해 주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흑발의 감촉이 무섭도록 부드러웠다. 그는 눈을 감고서 나지막이 신음했다.

그녀의 치마 주머니 속에 든 휴대폰을 꺼내야 하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인내심도 자제심도 부족한 상태였다.

그녀의 향기에 호흡이 흐트러진다.

곤히 잠든 그녀가 야속하고 사랑스러웠다.

“넌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렇게 태평하게 날 유혹했던 거지…….

그는 애리얼이 잠든 머리맡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가지고 싶은 걸 눈앞에 두고 참는 게 이다지도 고통스럽다니.

다 말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널 너무 사랑해.

그래서 뭐든지 할 수 있어.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할 짓까지도 저질렀어.

그걸 알면 너는 뭐라고 할까.

수없이 반복된 과거에서 그 해답은 이미 나왔었다.

그는 그 해답이 몹시도 싫었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너는 아무것도 몰라야 해.”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녀는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입이라도 맞출 듯이 상체를 기울였다가 주먹을 꽉 쥐고 물러났다. 바닥에서 일어나 빠르게 방을 나갔다.

시에나와 하녀를 둘러멘 기사가 보였다.

데본시아는 문을 닫고는 문고리를 쥔 채 방어술을 걸었다. 코피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빠져나가 버린 마력도 느껴졌다. 원래 그의 것이 아니었던 마력이 이토록 손쉽게 그의 곁을 벗어났다.

어떻게 이리도 최악일 수 있을까.

“도우라고 부른 것들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들을 막지도 못하고, 모든 게 완벽해야 할 날에 이토록 끔찍한 결과라니. 몹시 실망스러워.”

그가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에나와 기사는 긴장하다 못해 공포에 질린 낯으로 굳어선 제 군주의 명을 기다렸다.

데본시아는 연신 피를 닦느라 더러워진 장갑을 바닥에 버리고선 그들을 응시했다.

“너희 둘은 날 실망스럽게 하지 않길 바랄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예, 폐하.”

시에나와 기사가 동시에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

중앙관의 중정에는 스카이라와 레이신이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중앙관의 지하 밀실에는 렉시우스가 피투성이로 기절해 있었다.

아카데미의 제1 기숙사 동, 제비나비가 그려진 문 너머의 방에는 휘아킨이 죽기 직전의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넷 다 죽지는 않은 게 행운일까 불운일까.

데본시아는 급히 차에 올라 아카데미로 향했다. 마력을 되찾았을 휘아킨 무하부터 먼저 처리하는 게 좋았다. 진실을 알아 복수심에 불타고 가장 극단적으로 내몰려 있는 인물이기에, 가장 위험했다.

빼앗았던 마력은 술식의 소실과 함께 사라졌고, 남은 제 마력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나마 과부하로 인한 코피는 멎었으나, 큰 술식을 펼칠 수는 없을 터.

엘릭서는 스무 병이나 여분이 있었으나, 그는 단 한 병도 손대지 않았다. 그건 애리얼을 위한 거였다. 황제인 그가 24시간 지키고 있기도 어렵고, 애리얼이 자해라도 벌일 경우를 대비해 구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최상급 엘릭서는 제작에만 자그마치 3개월이 걸리니, 최대한 아껴두는 게 좋기도 했고.

그래서 그는 클라우스 백작에게 하사한 것과 같은 하급 엘릭서를 마셨다. 연녹색을 띠는 최상급 엘릭서와 달리 진한 녹색을 띠는 하급 엘릭서는 치유력이 일시적이었다. 당장만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각성제와 유사했다. 마신 직후에는 최상급 엘릭서를 쓴 것처럼 상처도 낫고 원기도 회복되지만, 하루만 지나도 피로와 고통이 후유증처럼 닥쳤다. 그런 부작용을 알고서도 복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오늘을 수습하는 게 중요했다.

그는 아카데미에 도착해 제1 기숙사 동으로 들어갔다. 동행인은 없었다.

망설임 없는 걸음이 기숙사 깊숙한 곳의 제비나비가 그려진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가 날아가 힘없이 벌어진 문 안으로 형편없이 망가진 술식과 그 술식 위에 쓰러진 무하 공자가 보였다.

데본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꽂힌 근원 소멸기부터 회수했다. 렉시우스에게 넘길 때만 해도 설마 이걸 사용하겠나 생각했었다. 설령 술식을 부수더라도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모하게 이걸 쓸까. 애리얼을 두고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애정이 그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 그녀를 놔두고 죽을지도 모를 일을 감행할까.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으나, 렉시우스와 무하 공자는 기어코 일을 쳤다.

데본시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라리 구질구질하게 고개를 숙이고 살아남더라도 어떻게든 후일을 도모하며 애리얼의 곁을 맴도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죽으면 뭐가 남는다고.”

그는 그녀가 있다면 죽어도 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나방처럼 저 하나 무너뜨리려고 이리 달려들어 쓰러진 이들이 우습기만 했다.

결국 술식을 하나 엎는 것뿐이고, 제가 죽는 것도 아닌데, 헛수고한 이들이 우스웠다.

다 반역으로 감옥에 처넣은 뒤 엄벌을 내려 줄까. 아니면 약점을 잡아 가문째로 뒤흔들어 줄까.

어느 쪽이 더 유용할지 계산하며 데본시아는 엎어진 휘아킨의 옷깃을 쥐고 들어 올렸다.

탕!

총성이 울렸다.

데본시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휘아킨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사는 게 지옥인데, 죽을지 모르는 도박이라도 해야죠.”

휘아킨이 피스톨을 데본시아에게 겨눈 채 말했다. 한 발뿐인 스카이라의 마력탄을 소모했으나 후회는 없었다.

“결국 안 죽었고.”

형형한 은빛의 눈이 데본시아를 향했다. 마력을 찾아 이채가 도는 그 눈동자는 무하 공작의 눈동자와 쏙 빼닮아 있었다. 무하 공작가의 마법사가 지니는 은빛 마력의 기운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비록 근원 소멸기의 대가로 대부분 지불하여 바닥난 상태일지라도, 휘아킨 무하에게는 마력이 돌아와 있었다.

데본시아는 허탈함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어코 죽지 않고 도박에 성공했나.

“운이 좋았네.”

강한 마력탄에 맞았음에도 강력한 방어술을 펼쳐 조금도 다치지 않은 그가 휘아킨에게 마력을 쏟아부었다. 날카롭게 방사한 마력에 휘아킨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려 갔다.

쿵!

도중에 가구에 부딪친 휘아킨이 피를 울컥 토했다. 타인의 마력에 그대로 노출된 탓에 머리가 지독하게 어지러웠다. 바닥으로 주르르 미끄러지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일어났다. 휘청이는 사지를 지탱하기 위해 방금 부딪친 가구를 잡았다.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충격에도 피스톨을 놓치지 않고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데본시아는 겨우 마력을 찾았음에도 당장은 마력이 없어 마법을 쓰지 못하는 불쌍한 공자를 보며 웃었다.

“나는 원래 신성 마법사로 태어났어.”

“…….”

“네가 마력을 찾았고 내가 마력을 잃었어도, 내가 너보다 강하다는 뜻이야.”

“자랑질은…….”

휘아킨이 빈정거리는 순간, 데본시아가 공격술을 날렸다.

콰앙!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휘아킨을 향해 날아가 폭발했다. 방의 벽면이 통째로 날아갔다. 부서진 벽 너머로 제1 기숙사 동의 정원이 보였다. 뻥 뚫린 벽을 넘어 데본시아의 발치로 눈발이 날아들었다.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그는 미간을 구겼다.

휘아킨이 없었다. 도망쳤다.

“쥐새끼 같은 게.”

경멸을 내뱉은 그는 잔뜩 낯을 구기고서 황성으로 귀환했다. 무하 공자를 찾기 위해 시간을 더 낭비할 순 없었다. 당장 중앙관에 널브러진 스카이라, 레이신, 렉시우스를 수습할 시간도 모자랐다. 홀로 가둬 둔 애리얼의 안위도 걱정스러웠다. 더 지체할 수 없다.

그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순간 이동이었다.

그제야 휘아킨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우웩, 웩. 구역질로 위액과 피를 쏟아 냈다. 처음 겪는 마력의 과부하였다. 공격술이 직격하기 직전, 가까스로 순간 이동을 해 아래층에 숨었다.

휘아킨은 웃으며 입 안에 남은 핏물을 마저 뱉어 내고는 피에 젖은 입술을 닦았다.

생에 처음으로 아무런 마도구도 없이 마법을 썼다.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의 일원으로서 잠들어 있던 그의 핏줄이 환호성을 질러 댔다.

그는 마법사였다.

이 불쾌한 울렁거림과 고통마저 기꺼웠다.

더는 마력도 없는 무하의 병신이 아니었다.

하하, 웃으며 환희했다.

이렇게 하나 되찾았으니, 남은 하나만 더 되찾으면 된다.

애리얼 허클리.

나의 선배님.

그는 잿빛을 버리고 은빛이 되어 요요히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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