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집착의 차이는 무엇일까.
***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고, 어머니를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제 형제를 사랑한 적도 없었고, 제 약혼녀마저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그녀가 끔찍한 결과를 맞을 때까지 그는 그녀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았다.
***
데본시아는 제가 끌어온 영혼인 애리얼 허클리를 자신의 업적쯤으로만 여겼다.
신성 극계 술식을 두 번이나 성공했다는 업적.
그녀를 끌어오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집착하고 갈구하던 과거를 모른 체하며, 그녀를 고작 그 정도로만 치부했다.
그런 주제에 그의 눈은 매번 정직하게 그녀를 좇았다.
그녀가 궁금했다.
애리얼, 그녀는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그녀에게 그는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차원 간에 구멍을 뚫어 그녀의 가족을 죽게 만든 원인이었으며, 그녀를 강제로 이 세계로 끌어온 일종의 납치범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 일을 조용히 은폐하여 아무도 모르게 했다.
이 일이 새어 나갔을 때의 파장이 아직은 제국에 이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제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혼은 응당 이곳에 태어나야 하는 게 맞았으므로.
데본시아는 후회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애리얼 허클리라는 존재가 궁금할 뿐이었다.
애리얼은 날 만나면 어떻게 할까. 분노할까? 날 죽이려고 들까?
그녀의 반응이 너무도 궁금했으나 그는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안달을 내야 할 것은 그가 아닌 그녀였으니까.
그는 오만하게 제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가 기억을 잃은 줄도 모르고.
***
데본시아가 그녀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아카데미에서 재차 그녀를 마주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그리도 불렀던 제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이 세계로 떨어졌음에도 담담했다. 그에게 분노를 불태우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정신력이 강한 인물이라 그런 거겠거니 여겼는데, 모욕에 붉어진 눈시울과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발견한 이후로는 그도 제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는 데 아주 능숙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여린 성정을 지녔다.
모욕에 상처받아도 극복을 잘하고 씩씩한 일면이 있으나, 눈앞에서 마주한 부모의 죽음을 견뎌 낼 정도로 강한 심지를 지닌 건 아니었다.
그녀는 기억이 없기에 담담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데본시아는 조금 불안해졌다.
왜 불안한 것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는 제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감정이 생겨나면 그걸 무시하고 억눌렀다. 짓눌려 무의식으로 숨어든 그 감정은 그의 행동이나 사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불안하지 않은 척 행동했고, 애리얼에게 조금도 친절하지 않았다. 무시, 모욕, 조롱, 비소로 그녀를 대했다. 이쯤이면 그녀가 먼저 분노하고 저를 떠나겠지 싶을 수준으로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차분함을 유지하며 그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 목적이 뭘까.
궁금증이 날로 커졌다.
그녀를 관찰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해답이 보일 것 같았다.
이토록 박대를 받으면서도 그녀가 제게 붙어 있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궁금증에 홀린 데본시아는 애리얼을 자주 찾았다.
그녀는 그를 잘 따랐다. 부르면 오고, 시키면 하고, 모욕해도 참고. 사용인이나 다름없는 대우에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순종적인 그녀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희열이 찾아왔다.
제가 데려온, 그것도 억지로 불러온 존재. 그런 존재가 제게 이렇게나 순종적이다. 마치 주인을 모시듯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날 사랑하기라도 하나?’
떠오른 생각은 그거였다.
그녀를 관찰하는 눈이 좀 더 집요해지기 시작했다.
그 시선에 기대감이 깃들었다.
만일 애리얼이 정말로 저를 흠모하기라도 하는 거라면, 그에 어울리는 보답을 해 줄 수도 있다.
이를테면, 황태자비 자리라도…….
저도 모르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데본시아는 흠칫 놀라서 혀까지 씹었다.
‘내가 무슨 미친 생각을…….’
아나스타샤 샤펠이라는 정치적으로 그 누구보다 이득이 될 황태자비를 두고 애리얼을 비로 맞으려 하다니. 정신이 나갔다고 볼 수밖에 없는 판단이었다.
측실도 아니고 황태자비라니.
데본시아는 제 감정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애리얼과 거리를 둬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는 중독이라도 된 듯이 그녀를 찾았다. 위험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술렁거리는 제 감정을 무시하면서 끈질기게 그녀와 함께했고,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애리얼과 스카이라가 종종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는 속이 뒤집힐 정도로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명백한 분노가 그의 이성을 흔들었다. 스카이라를 죽이고 싶었고, 그와 어울린 애리얼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당장 애리얼을 불러 제 것이라는 표식을 달아 버리고, 스카이라는 감옥에다 던져 버리고 싶었다.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이었다. 이런 생각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과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네가 황자랑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귀족들이 날 뭐라고 보겠니.”
보고를 듣고서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최대한 제 분노를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을 전했다.
다행스럽게도 애리얼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고개를 숙여 그의 뜻을 따랐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여느 때와 같은 순종적인 반응이 만족스러우면서도 기이하게 불편했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그녀는 스카이라를 대할 때는 훨씬 더 당돌한 태도라고 했었는데.
데본시아는 저를 향해 고개 숙인 그녀를 보자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분명 그를 스카이라보다 더 존중하기에 보이는 태도일 텐데도 그는 기껍지 않았다.
이런 모순적인 감정이라니.
끔찍했다.
냉철함을 흔들고, 비효율적인 판단을 충동질하는 최악의 감정 상태가 그에게 도래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그의 감정이 일방적이라는 거였다.
애리얼은 그에게 줄곧 붙어 있으려고 하면서도 그를 꺼렸다.
그는 그녀가 보이는 태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아주 잘 알았다. 이득을 위해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순종하는 태도. 분노나 짜증을 억누르고 철저하게 예를 갖추어 자존심을 꺾고 고개를 숙인다. 제국 산하 왕국의 왕들이 황태자인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보이곤 하던 그 몸짓이 그녀에게서도 보였다.
애리얼은 그를 흠모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에게 웃어 준다.
데본시아는 그게 불편했다.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헤실거리는 그녀를 보면 속이 뒤집혔다.
“넌 내가 좋아?”
그녀가 아주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좋아해요.”
그것 봐, 날 좋아하지 않으면서.
데본시아는 그녀의 기만이 몹시 짜증 났다. 저걸 어떻게 벌해야 할까.
좋지도 않으면서 좋아한다고 나불대고 제 감정을 쥐어흔드는 같잖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
이성이 무너지고 폭력적인 충동이 그를 잠식했다.
그 결과 그는 매우 비효율적인 판단을 내렸다.
아나스타샤 샤펠과의 약혼을 파기했다.
대신 약혼식에 애리얼을 세웠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 떠드는 애리얼을 제 옆에 끌어 앉혀 놓고 저를 사랑할 때까지 괴롭힐 생각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가차 없이 버릴 것이다. 아니면 측실이나 정부로 격하시키고 새 황태자비를 맞아도 되겠지.
데본시아는 그녀에게 든 배신감의 이유도 모른 채 과한 복수심에 불탔다.
그런 주제에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약혼식에 온 그녀를 보며 기괴한 만족감을 느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나의 비.”
그가 웃으며 칼라 꽃다발을 내밀었다.
애리얼은 거절하지 않았다. 강제로 약혼하게 된 거면서도 발칙하게 미소까지 지었다.
놀리는 건가 싶었다.
“기뻐?”
“네, 그럼요.”
애리얼은 그렇게 말했다. 얼떨떨한 얼굴이었으나, 기쁘다는 게 거짓말 같진 않았다.
데본시아는 꽤 혼란스러워졌다.
이 약혼이 영 싫은 건 아니었나. 저를 조금이라도 좋아하기는 한 건가.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불편하게 쿵, 쿵, 쿵, 쿵.
눈가가 달아오르고 미소를 지은 입꼬리가 경련했다.
애리얼을 오래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도망치듯 허공만 보면서 약혼식을 끝냈다. 가볍게 입을 맞추지도 않았다. 손조차 잡지 않았다. 애리얼은 칼라 꽃다발을 든 채로 방치되었다.
축하객들이 잔뜩 모인 앞이었다.
덩그러니 남은 애리얼은 어디로 보나 냉대받는 모양새였다.
그렇게나 황태자를 쫓아다녀 샤펠 공녀를 끌어내려 놓고 정작 약혼식에선 저 꼴로 남겨지다니, 수군거리는 소리가 홀을 채웠다. 내막을 모르는 귀족들의 칼날 같은 멸시였다.
그날의 일 때문에 애리얼은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었음에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데본시아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제대로 수습하지 않았다.
그는 제 눈앞에서만 그녀가 멸시받지 않도록 했고, 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녀가 멸시를 받아도 무시했다. 그러면 애리얼이 제게 매달릴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애리얼은 좋지 않은 낯빛을 하고서도 절대 데본시아에게 기대지 않았다. 아예 그를 찾지도 않았다.
약혼식을 기점으로 둘의 관계는 특별해졌는데, 미래를 약속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를 대하는 애리얼의 태도는 도리어 삭막해졌다. 그녀가 그에게 일방적으로 고개를 숙이던 예전보다 훨씬 못해졌다.
데본시아는 그에 화가 났다. 약혼녀까지 되었으면서 약혼자인 저를 찾지 않다니. 약혼식에서는 분명 기쁘다고 말한 주제에.
그는 그녀가 괘씸했다.
그래서 그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똑같이 외면했다.
어차피 숙이고 들어와야 할 건 그녀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지금까지 그녀가 항상 그의 모욕과 무시를 감내하며 먼저 숙이고 들어왔으니까.
그녀에게도 결국 기댈 건 약혼자인 저밖에 없지 않나.
모든 정황이 그에게 유리했다.
꼿꼿하게 버텨 봐야 부러지는 건 애리얼일 터다.
그렇게 생각했다.
눈이 내리던 어느 날,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릴 때까지.
“죽었다고……?”
“예. 사인은 독약을 이용한 자살로 보입니다.”
자살.
그녀가 자살했다는 말에 데본시아는 넋이 나가 버렸다.
침대에 조용히 누워 눈을 감은 그녀는 꼭 잠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믿을 수 없었다.
갖은 모욕에도 버티며 무덤덤한 얼굴로 일관하던 그녀가 자살이라니.
그는 손을 뻗어 애리얼의 뺨을 감쌌다.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싸늘하게 식은 피부가 만져졌다.
그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음을 알리는 그 촉감에 제 숨이 그녀의 숨처럼 멎는 것 같았다. 같이 암전을 맞는 것만 같았다.
왜, 어째서 너는 죽었나.
짚이는 이유가 너무 많은 동시에, 아무런 이유도 떠올릴 수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나만 두고 네가 떠날 수는 없는 거야.
너는 나의 약혼녀인데. 앞으로 미래에 나의 황후가 될 건데.
좋은 일만 가득할 게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너는 왜 죽었나. 내가 미웠으면 살아서 복수라도 해야지, 왜!
“왜…… 죽었어?”
공허한 물음을 담은 숨결이 창백한 애리얼의 낯 위로 내려앉았다.
감정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바닥으로 처박혔다. 딱 죽으면 좋을 것같이 끔찍한 기분이었다.
처참한 심정이 된 그가 시트를 쥐어뜯었다.
“저, 전하…….”
뒤에서 시녀의 우물쭈물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공녀께서 마지막까지 가지고 계셨던 물건입니다. 전하께서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데본시아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꿰뚫을 듯 시녀에게 가닿았다.
애리얼의 전속으로 붙여 준 시녀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묘한 물건이 담긴 트레이를 내밀었다. 직사각형의 형태로 한쪽 면은 거울처럼 어둡고 반질반질한데 다른 부분은 흰, 용도를 알기 어려운 물건이 보였다.
데본시아는 그 희한하게 생긴 물건이 이상하게도 눈에 익었다.
‘이건 분명…….’
애리얼이 이 세계로 끌려오기 전, 불붙은 자동차를 떠나지 못할 때도 꼭 붙잡고 있던 물건.
데본시아는 확연히 놀란 얼굴로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애리얼이 이걸 뭐라고 했더라?’
데본시아는 다른 세계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관찰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고가 나 이 세계에 끌려오기 전, 차 안에서도 그녀는 이 물건을 들고 있었다.
“……아, 네 휴대폰 좀 줘라.”
“아빠 폰에 내비 깔라니까. 스마트폰 뒀다 뭐 해.”
“아빤 그런 거 못 해.”
“직접 하기 귀찮아서 그런 거지?”
“딸이 해 주면 아빠는 편하지.”
“어휴……. 알았어. 일단 내 거 보고 하고, 아빠 폰 줘. 깔아 줄게.”
그렇게 오가던 흰색 물건과 남색 물건. 색은 달라도 비슷한 모양새에 까만 창을 지닌…….
“……폰. ……스마트폰, 휴대폰.”
데본시아는 조용히 그것의 명칭을 중얼거렸다.
이쪽 세계의 물건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의 혼을 따라 이 물건까지 넘어온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한가…….
강렬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애리얼의 자살이 이 물건과 관계된 것은 아닐까.
‘혹시 이게……, 애리얼의 기억을 되찾아 줬나?’
그래서 자살한 건가?
제가 그녀의 가족을 죽인 원인을 제공하고, 그녀를 이 세계로 납치해 온 걸 알게 되어서?
그것 때문에 삶의 의지를 잃었나?
섬뜩한 생각이 그를 휩싸고 돌았다.
그날로 데본시아는 업무를 죄 내팽개치고 그 하얀 물건에만 매달렸다. 그것에 해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문제는 이 물건에는 그의 마력이 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 세계에서는 분명 아무것도 아니었던 물건이 이 세계에서는 강력한 마력의 파장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작용한 것인지, 작은 물건 안에 가히 압도적인 양의 마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신성 마법사인 그마저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탓에 그 물건은 그 어떤 외부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마도구인 주제에 주체적으로 기능하고 작동했다.
마치 독립된 의지를 가진 양…….
‘……다수의 기도와 염원은 강력한 힘을 지닌다. 이런 힘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신성한 물건의 경우, 물건은 기도와 염원을 담아 스스로 기동하며 서툰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신의 마도구, 즉 신성 마도구라 부른다.’
데본시아는 어릴 적 읽었던 신성 마법을 다룬 금서의 내용을 불현듯 떠올렸다.
신성 마도구는 다수의 기도와 염원을 오랜 기간 축적하여 우연히 만들어지는 신화 속의 도구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예 불가능한 물건까지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금서의 지식을 활용하여 신성 마도구를 만들어 냈다. 순도 높은 마력을 다량으로 투입하고 첨예하게 다듬는 난도 높은 과정을 거쳤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 중 하나가 근원 소멸기였다.
하지만 이 하얀 마도구는 근원 소멸기처럼 설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건 애리얼의 간절한 염원이 뭉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로지 애리얼의 마력으로만 가득 찬 애리얼의 절실한 소원. 그 결정체.
데본시아는 그것의 안을 보기 위해 직접 해제술을 익혔다. 자그마치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때까지 그는 애리얼의 시신을 땅에 묻지 않았다. 방부 처리를 하여 제 침실에 놓고서 매일 휴대폰이라는 마도구를 연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안을 보았을 때, 그는 지독한 절망에 빠졌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조건 - 데본시아 해피 엔딩(달성)
탈출에 앞서 기억의 수복을 진행합니다≫≫≫』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문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게 어디의 문자인지는 뻔했다.
그녀가 납치당하기 전에 살던 세계의 문자.
“아…….”
데본시아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가족에 대한 기억은 잃었으나 그 문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 살던 세계의 문자를 읽으며 원래 살던 세계의 물건으로 뭔가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웃으며 모욕을 참았던 이유, 멸시를 당해도 담담했던 이유.
그렇구나. 너는, 돌아가고 싶었구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면서까지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들이 소중했던 거구나.
다름 아닌 이 내가 죽여버리게 된 것들이 그렇게나…….
“하하, 하하하…….”
메마른 웃음소리가 침실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