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데본시아는 아직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다. 저를 두고 떠나간 그녀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기에 그는 아직 그녀를 향한 애정을 자각하지 못했고, 그녀를 포기하기에는 집착과 미련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금기를 건드렸다.
그렇게 회귀했다.
그리고 또다시 애리얼의 자살을 겪었다.
그녀의 두 번째 죽음.
그 참상을 눈에 담은 그는 폐인이 되기 직전으로 치달았다.
애리얼을 향한 애정을 자각한 후였기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피폐해진 심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하마터면 폐태자가 될 지경까지 몰렸다.
그러나 간신히 정신을 다잡았다.
다시 회귀하면 된다.
하지만 회귀만으로는 그녀의 죽음을 막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데본시아는 봉쇄라는 새로운 신성 극계 술식을 추가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차원 간의 길을 막는 행위였다. 휴대폰이라는 마도구에는 도저히 개입하기가 어려워 쓴 차선책이었다. 가는 길을 막아 놓으면 휴대폰의 기능이 무엇이든 애리얼이 돌아가지 못하리라 여겼다. 저 휴대폰만 먹통이 되면 그녀도 포기하겠지.
그런 그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애리얼은 이전 회차와 같은 결말을 맞았다.
애리얼의 자살을 막기 위해서 별 난리를 다 쳤지만 실패했다. 묶어 놓고 가둬 두기도 했고, 달래서 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기억을 찾았고, 기억을 되찾는 순간 더는 살고 싶지 않아 했으며, 그를 극도로 증오하게 되었다.
데본시아는 그녀의 증오를 받는 것도 싫었고, 그녀가 죽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계속 회귀가 반복되었다.
결과는 늘 같았다.
애리얼이 죽고, 데본시아가 시간을 돌린다.
***
회귀로 반복되는 과거에는 어떠한 패턴이 있었다.
애리얼은 회귀할 때마다 이전 회차의 기억을 잃는다.
애리얼은 회귀할 때마다 황족과 관련된 핏줄, 그중에서도 데본시아, 스카이라, 렉시우스, 레이신 중 한 명 이상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애리얼의 죽음은 늘 눈이 내리는 겨울에 이루어진다. 정확하게는 일 월 일 일이 지난 새해부터. 이때 애리얼의 나이는 절대 스물을 넘기지 않는다.
이 세 가지가 회귀마다 반복되는 공통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그 외의 것에는 정해진 패턴이 없었다.
애리얼은 회귀 전과 회귀 후, 그 두 번 이후로는 더 이상 데본시아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은근히 부담스러워하며 멀리했다. 그를 마치 난해한 장애물로 취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분명 그녀는 회귀 탓에 이전의 기억이 없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처음과 달리 애리얼에게 상냥하게 굴었다. 그런데도 애리얼은 여전히 그를 피하고 있으니…….
‘기억이 없는데 너는 왜 나를 꺼릴까?’
의구심이 든 데본시아는 애리얼에게 전보다 더 많은 감시를 붙였다.
시녀의 보고에 따르면, 애리얼은 희고 네모난 물건을 늘 가지고 다니며 그 물건의 검은 부분을 자주 들여다본다고 했다.
그 보고를 듣고서 그는 한 가지 추측을 했다.
‘휴대폰이라고 했던가.’
그게 그에 대한 어떤 경고성 정보를 애리얼에게 띄워 줬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애리얼에게 모종의 정보를 제공하면서 뭔가를 시키고 있다.
회귀할 때마다, 애리얼의 행동은 매번 확연히 달라졌다. 스카이라, 렉시우스, 레이신 중 한 명과 인연을 맺거나, 두루두루 친분을 쌓거나, 혹은 삼각관계와 같은 복잡한 애정 관계를 형성하거나. 매번 바뀌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그녀의 행동 방향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매번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목적은 무엇일까.
최소한의 추측도 필요 없었다. 데본시아는 그 답을 아주 잘 알았다.
‘잃어버린 기억의 획득, 그리고 이곳에서의 탈출.’
처음에도 그걸 위해서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 모욕과 멸시를 견디며, 오로지 집으로 가기 위해서 그녀는 단단한 심지를 가지고 버텼다.
기억을 잃은 상태임에도 그만큼 이전에 살던 세계와 제 가족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그 반동으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을 그녀는 늘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버틸 수 없었던 그가 다시 회귀했다.
방법도 없이 영원의 굴레를 돌았다.
그런 줄 알았다.
어느 해, 그녀는 자살하지 않고 추운 겨울을 지나 스물의 봄을 맞았다.
***
애리얼은 죽지 않았다. 죽지 않고 이 세계에서 살아 나가기로 했다. 끔찍한 절망을 딛고 나아갔다.
스물을 맞은 그녀는 연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황성을 누볐다. 곧 있으면 약혼식을 치르는 그녀는 분명하게 이곳에서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본시아는 최악으로 기분이 나빴다.
그녀와 약혼을 치르는 상대가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봄꽃이 만발한 정원에 긴 흑발이 나풀거렸다. 데본시아의 시선이 물결치는 머리칼을 따라갔다. 사뿐한 걸음으로 달려간 애리얼을 스카이라가 두 팔 벌려 안았다.
데본시아는 미간을 구겼다.
애리얼을 감싸는 저 팔을 절단하고 싶은 욕구가 구역질처럼 올라왔다.
그녀의 식은 몸을 안고서 절망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행복해야 마땅한 일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이제 회귀할 필요는 없는데.
회귀를…… 하면 안 되는데…….
그녀가 살아 있음에 만족할 수 없는, 불쾌하고 끔찍한 감정의 깊이. 그 음습하고 질척한 수렁.
어엿한 연인의 모습으로 포옹하는 둘을 창문을 통해 훔쳐보며, 그는 잔악한 욕구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
하얀 카펫이 피로 물들었다.
축복으로 가득해야 할 약혼식 날이었다.
애리얼은 피투성이의 스카이라를 붙들고서 덜덜 떨었다. 불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데본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와 그녀가 붙든 스카이라를 바라보았다.
스카이라를 죽이려던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애리얼과 입을 맞추는 스카이라를 본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환각술, 그다음에는 공격술이었다.
당연히 아무 일 없을 거라 여겼던 찰나였다. 서로를 홀린 듯 바라보던 둘의 사이를 갈라 놓았다.
애리얼은 얼이 나가서 쓰러진 스카이라만 꽉 잡아 안고 있었다. 예쁜 드레스가 피범벅이었다.
환각술에 당한 스카이라는 이어진 공격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애리얼만은 확실하게 보호하려고 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스카이라는 애리얼에게 방어술을 써 주느라 그 자신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치명상을 입었다.
확실하게 그만을 노리고 쏜 공격술이 애리얼에게 맞을 리가 없는데.
“헛수고였네.”
데본시아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사이를 지나 애리얼에게로 걸어갔다.
애리얼은 여전히 스카이라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그런 일을 쳤는데도 숨소리마저 미약한 스카이라에게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데본시아는 배알이 뒤틀렸다. 손을 휙 뻗어 그녀의 턱을 쥐고서 아래로 떨어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드디어 그녀의 멍한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데본시아는 그녀의 흰 뺨에 튄 피를 닦아 주며 웃었다.
“그게 그렇게 소중해?”
조롱의 말에 흐리멍덩하던 흑연색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애리얼이 그의 손을 세게 쳐 내곤 피에 물든 스카이라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데본시아는 스카이라를 소중하게 감싸는 그녀를 고깝게 보았다. 전 세계의 죽은 가족에 이어서 스카이라에게까지 밀리다니.
불쾌한 열등감이 가슴속에 고였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은데, 왜 스카이라를 선택했어?”
“…….”
“왜 내가 아니고 스카이라였어? 응?”
“…….”
“애리얼!”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서 호소하듯이 물었다. 질투에 미쳐서, 집착으로 뭉쳐서. 깨어 있는 애리얼의 앞에서는 언제나 반듯하던 그의 평정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붙들고서 가만히 그의 호소를 듣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고인 눈, 격한 감정이라곤 조금도 깃들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스카이라를 살려 주세요.”
“…….”
“뭐든지 할게요.”
스카이라를 해친 장본인에게 스카이라를 구해 달라고 빌었다. 격하게 일었을 분노를 흩어 버리고 처절하게 밑바닥까지 떨어져서 그렇게, 원수나 다름없는 이에게 빌었다.
그 순간, 데본시아는 끝도 없는 패배감을 맛보았다.
동시에 애리얼을 향한 자신의 갈망도 마주하였다.
그는 애리얼이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죽지 않고 정착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것인 그녀를 견딜 수 없었다. 사랑을 잡아먹은 늪과도 같은 끈적하고 깊은 집착이 애리얼을 갈구했다.
그녀가 제 것이 아닌 세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애리얼의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살려 주면?”
“네.”
“날 사랑해 줄래?”
“노력할게요.”
여전히 스카이라를 소중하게 꼭 붙든 채로 그녀가 말했다.
거짓말.
데본시아는 제가 저지른 짓을 알았다. 그녀가 텅 빈 눈으로 하는 말들이, 그저 스카이라를 살리기 위해 하는 말에 불과한 것도 알았다.
애리얼은 데본시아를 사랑할 수 없었다.
처음 이 세계로 올 때부터,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애리얼의 원수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노력하겠다는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뱉는 것은, 전부 스카이라를 소중히 여겨서이다. 스카이라를 사랑해서이다.
데본시아는 질투심에 불탔다.
스카이라를 죽이고 싶었다.
그녀가 애원하는 만큼, 그녀가 노력하는 만큼 더 스카이라를 난도질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다음 세계에서는 널 가질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할 것이다.
“애리얼.”
“전하, 스카이라를…….”
애리얼이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데본시아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속삭였다.
“스카이라가 아니라 내 이름을 불러야지.”
환각술을 펼치자 다급해 보이던 애리얼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잠겼다. 스르르 눈꺼풀을 감으며 무너지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손은 스카이라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있었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양손을 하나하나 끌어모아 그녀를 온전히 품에 안았다. 그녀는 기절하고 나서야 얌전히 그에게 안겼다.
그 사실이 비참했다.
하지만 그래도, 스카이라에게 그녀를 넘기느니 이게 나았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을 애틋하게 안고서 피투성이로 죽어 가는 스카이라를 남겨 둔 채 약혼식장을 나왔다.
스카이라를 살릴 기분이 조금도 아니었기에, 이번 세계는 틀렸다.
애리얼은 어쩌면 이전 세계에서보다도 훨씬 더 그를 증오하게 되리라.
그러니 이번 세계도 실패다.
그는 빠른 판단으로 회귀의 준비를 했다.
‘신성 극계 술식이 하나 더 필요하겠어.’
조용히 결정을 내렸다.
애리얼의 휴대폰. 개입이 불가능하던 그 마도구에 억지로라도 개입해야 했다.
그녀에게 원수가 아니기 위해서.
그녀가 저를 경계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녀에게 새로이 다가갈 기회를 얻기 위해서…….
***
스카이라는 질기게도 살아남았으나 의식을 차리지는 못했다.
애리얼은 환각술에 당해 잠들었다.
그동안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휴대폰에 개입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 물건을 제한하지 못하면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문제는 이 물건 역시 신성 극계 마법에 해당한다는 것.
똑같은 신성 극계 마법으로 개입한다 해도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래서 여태 이 물건에 개입하지 못했고, 그 탓에 회귀만 수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방도가 없었다. 외부의 힘을 끌어와서라도 휴대폰이라는 물건에 개입해야 했다.
휴대폰이라는 다른 세계의 물건. 그런 것에 개입하려면, 그 물건이 감지하지 못할 외부의 마력이 필요했다.
데본시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휴대폰은 그를 포함해 스카이라, 렉시우스, 레이신의 마력을 탐색하고 그 정보를 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전부 황족과 관련된 핏줄이었다.
그녀에게 위력을 행사하여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 그의 마력이기에, 그 마력을 기억한 거겠지. 하지만 대상을 정확히 특정하지 못하고 그 성질만 기억하다 보니 다른 비슷한 마력도 포함된 것이 아닐까. 데본시아는 추측했다.
그렇다면 일단 황족의 피가 흐르는 인간의 마력은 배제하는 게 좋았다. 감지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개입을 위해서는 황족의 핏줄이 아니면서도 황족에 버금가게 강한 인간의 마력이 필요했다.
적절한 대상을 탐색하는 그의 시선이 무하 공자에게로 가닿았다. 이 일과는 전혀 무관한, 그에 대한 경계심이 적은 인물. 힘든 일 한번 겪지 않고 곱게 자란 도련님. 그러면서도 신성 마법사에 가까울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지닌 무하 공작가의 외동아들. 휘아킨 무하.
그 공자의 마력을 빼앗아야겠다.
결심한 데본시아는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학기를 보내는 그의 기숙사 방에 몰래 술식을 그렸다. 신성 2계 술식으로, 마력을 빼앗기 위해 만들어진 금기였다. 신성 2계 술식인데도 금기로 지정된 만큼 극계 술식과도 같은 파장을 이 세계에 줄 수 있는 위험한 마법이었다. 영구적으로 상대를 불구로 만드는 악랄한 술식으로 저주라고도 불렸다.
무하 공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기숙사 방에 발을 들였다가 낭패를 보았다. 술식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데본시아는 생각보다 꽤 손쉽게 그의 마력을 손에 넣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타인의 마력, 그것도 특수 마법 등급의 강대한 마력을 제 것으로 길들이기 위해서는 큰 고통을 견뎌야 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몸속에서 서로 충돌하며 날뛰는 감각이 온종일 이어졌다.
평생을 불편한 일 없이 살아왔으며 신성 극계 술식을 펼치면서도 크게 아프지 않았던 데본시아는 이 고통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황태자로서의 업무를 봐야 했고, 스카이라의 약혼식과 습격당한 무하 공자의 일도 수습해야 했다. 이중 삼중의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꽤 잘 버텼다. 버텨 내는 줄 알았다.
마력 충돌의 고통이 한 달째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쓰러졌다. 의식이 끊긴 동안 그의 마력은 쓰러진 그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 탓에 애리얼에게 걸어 둔 환각술이 풀리고 말았다.
데본시아는 쓰러진 지 고작 한 시간 만에 다시 의식을 차렸지만, 그때는 이미 애리얼이 황성에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즉시 사람을 풀어 애리얼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다만 그녀가 죽었을 확률은 낮았다.
황성에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스카이라가 있었다. 그녀가 스카이라를 두고 자살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혹시 애리얼이 제게 반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가 그녀의 휴대폰에 개입할 신성 극계 술식을 새로 완성했을 때였다.
애리얼은 무하 공작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황성으로 침입해 그의 신성 술식을 찾아냈다. 그가 회귀하지 못하도록 파괴할 생각으로 ‘파멸의 기원’이라 불리는 금지된 무기를 들고 지하 성소에 발을 들였다.
데본시아는 다급히 그녀를 저지하며 새로 완성한 극계 술식인 압제를 발동시켰다.
이제 아주 조금이었다.
회귀의 술식만 제대로 발동해 내면 그가 유리한 세계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신성 술식이 괴이한 빛을 발했다.
다급해진 애리얼이 분노에 얼룩진 얼굴로 그에게 파멸의 기원을 겨눴다. 술식이 새겨진 밀실 입구는 그로 인해 막혔으니, 이제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여긴 거였다. 데본시아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고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술식을 발동시키던 데본시아가 급히 총구를 잡아 내렸으나 이미 늦었다.
탕!
커다란 총성과 함께 날아간 총알이 데본시아에게 직격했다. 극계 술식을 사용하느라 제대로 방어술을 펼칠 여력이 없던 그의 복부에 제대로 바람구멍이 났다.
탕! 탕!
연달아 방아쇠가 당겨지고, 그의 등 뒤로 피가 흠뻑 튀어 밀실에 새겨진 술식을 더럽혔다.
그러나 이미 회귀 술식이 발동된 후였다.
분노에 사로잡힌 애리얼의 얼굴을 보며 그는 처참한 몰골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세계에서 보자.”
애리얼의 낯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비명을 지르려는 듯 그녀가 입을 벌린 순간에 시간이 되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