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는 늘 애리얼이 이 세계에 온 날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그랬었다.
그러나 이번 회귀는 달랐다.
데본시아는 휘아킨으로부터 빼앗은 마력을 체화시키기 위해 제가 태어날 때로 시간을 돌렸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가 애리얼이 쏜 총에 맞아 술식이 피로 더러워졌다는 거였다.
그게 첨예하고 완벽해야 할 극계 술식의 발동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시간은 성공적으로 돌려졌으나, 술식은 심대한 타격을 입어 망가졌다. 누적된 회귀와 마지막에 입은 총상으로 데본시아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안 그래도 휘아킨의 마력을 빼앗은 탓에 심신의 피로가 말이 아닌 상태였다.
데본시아의 마력은 심각하게 꼬여 이전처럼 신성 마법을 펼치려다가는 과부하로 죽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전까지의 회귀에서와 달리 이번 회귀에서의 그는 이전 회차의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하지만 그는 그 변수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전 회차에서 겪었던 감정, 질투심과 열등감만큼은 남아서 스카이라의 것들을 탐내게 되었다. 의미도 없는 그의 약혼녀들을 빼앗으며 그는 기이한 희열을 느끼고, 그러다가도 또 알 수 없는 지루함과 공허함에 빠졌다.
그래서 그는 그 소문에 대해서도 반응이 느렸다.
제국에 신성 마법사가 둘이라는 소문.
이유 모를 권태감에 잠긴 그는 그 소문이 황성을 가득 채울 때까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 한 해가 가고, 그가 열여덟을 맞은 생일날이었다.
데본시아는 어떤 소녀에 관한 꿈을 꿨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흑발에 홀린 듯이 눈길을 주었다. 그녀가 몸을 휙 돌리며 백합을 내밀었다.
“이 꽃, 어쩐지 전하와 닮은 거 같아요.”
미소를 머금은 하얀 얼굴. 은은하게 풍기는 백합의 향.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너는 누구기에 나를 이렇게나 설레게 하는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건넨 것을 받아 쥐었다.
부드럽게 휜 하얀 꽃잎, 노란 꽃술, 녹색의 줄기와 잎사귀.
그리고 하얀 얼굴과 흑연색의 눈동자.
아.
사랑스러운 나의…….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가쁘게 호흡을 몰아쉬며 그는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 깨어난 그의 머리에 어떤 술식에 관한 지식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장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빨리 이 술식을 써서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이 술식으로써 누군가를 데려와야 한다.
그는 각성제를 먹은 것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꿈을 꾸고 나서야 그는 제국에 신성 마법사가 둘이라는 소문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과거와 같이 허클리 백작저로 찾아가 아직 혼을 되찾지 못한 애리얼 허클리를 발견하고,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의 술식. 그걸 이용해서 저 공녀의 혼을 찾아와야 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혼을 차원 너머에서 끌어와야 한다.
해야 할 것들이 착착 정리되어 떠올랐다.
데본시아는 본능적으로 떠오른 기억을 따라 움직였다. 백작저에다 술식을 그리고 그녀를 찾았다. 꿈속에서 만났던 그녀, 애리얼. 내가 찾던 이. 그의 손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빠르게 추적 술식을 그려 냈다.
가장 처음, 그녀를 찾아내고 납치했던 신성 극계 술식 두 개가 완성되었다.
이 술식을 한 번에 발동시키려면 가히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섬세하게 운용할 필요가 있었다. 실패하면 타격이 클 것이었다.
만약 회귀의 기억이 모두 있는 데본시아라면 이 두 개의 술식을 단번에 발동시키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회귀의 기억을 잃은 열여덟의 그는 오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제 마력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 번에 이 두 가지 술식을 발동시켜서 애리얼을 끌어왔다.
당연하게도 엄청난 마력의 과부하가 그를 덮쳤다.
그는 내장이 꼬이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며 토혈을 일으켰다. 사지가 덜덜 떨리고 오한이 일었으며,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일반적인 과부하 증세와는 달랐다. 몸이 이상하다. 알아챈 뒤엔 늦었다. 처음 겪는 극심한 고통에 그는 몸부림쳤다. 그럼에도 도중에 술식을 중지하는 일은 없었다.
흐릿하게 떠오른 극히 일부의 기억과 그에 담긴 감정 때문에, 그는 이다지도 끔찍한 고통을 감내했다.
그 결과, 데본시아는 다섯 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애리얼의 혼을 이 세계로 끌어왔다.
하지만 억지를 부린 탓일까, 그의 마력은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 안 그래도 휘아킨에게서 뺏은 마력을 온전히 병합하지 못한 채였다. 서로 엉키고 꼬인 마력은 마법을 쓸 때마다 심신의 고통과 고열을 유발했다. 이게 안정화되려면 적어도 몇 년은 있어야 할 터였다.
마력의 양도 상당히 줄어 버렸다.
이제 더는 신성 극계 마법을 쓰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침음하며 눈을 감았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야.”
무엇이 정말 마지막인지도 모르면서 그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그 후로 그는 고열에 시달리며 꼬박 일주일 동안 침실에 틀어박혔다. 그러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온 날, 애리얼과 만났다.
그때도 회귀 전의 기억은 별로 없었다. 다만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묘한 설렘과 기이한 소유욕에 사로잡혔다.
***
잔상같이 흐릿하게 시작된 그의 기억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완전해졌다.
안타깝게도 그때는 이미 애리얼에게 몇 번의 실수를 저지르고 난 뒤였다.
그래서인지 애리얼은 그를 아주 티 나게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력이 꼬인 탓에 몸 상태도 별로 좋지 못했고, 기억을 떠올리는 게 늦은 탓에 적절한 대처도 늦었다. 그나마 그녀가 저를 혐오하고 있지는 않으니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그는 조용히 그녀에게 감시를 붙이고서 감정을 억누르며 때를 기다렸다.
이제 마지막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때였다.
가히 초인적인 인내로 성질을 누르며 애리얼에게 감시를 붙이고서 일 년 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데본시아는 묘한 보고를 들었다. 애리얼이 직접 레이신의 생일 선물을 골라 샀다는 보고였다. 그것도 백작가에서 일괄적으로 보내는 데 넣는 선물이 아닌, 개인적으로 준비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첫 일 년간은 레이신의 생일이 며칠인지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서, 희한하게도.
‘이번에는 생일을 챙기는 것이 조건인가? 하지만 왜 첫 일 년은 그냥 버렸지? 혹시 일정 이상 친분을 쌓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나?’
확실하진 않았다.
데본시아는 수많은 회귀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행동을 가늠했다.
기억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매번 바뀌던 행동들.
딱히 특정 인물과 가깝게 지내지 않는 것을 보아, 이번 회차의 조건은 아마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며 각각의 생일을 챙기는 것인 듯했다. 거기서 더해 생일 선물을 받는 것까지가 조건일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그녀가 회귀마다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고작 생일을 챙기는 정도에서 끝날 리가 없다. 그녀는 처음에도 온갖 멸시를 견디며 황태자비의 자리까지 오른 뒤에야 기억을 얻지 않았던가. 분명 다른 조건이 더 뒤따를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녀의 생일이 될 때까지는 가야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애리얼의 생일인 일 월 일 일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몇 시에 황제를 연명을 멈출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애리얼을 불러들일 것인지. 하나하나, 제게 유리하도록 상황을 조정했다.
아리앨라 클라우스를 포섭한 것 역시 일 월 일 일을 위해서였다.
애리얼의 사촌이며, 재판을 받을 정도로 애리얼을 도운 이. 애리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 훌륭한 마법사. 결정적으로, 마력과 마법에 미쳐 있어서 포섭하기 쉬운 인물.
이전 회차의 영향인지 그전까지는 연이 없던 휘아킨 무하가 애리얼과의 관계에 난입하긴 했으나, 상정 내였다.
아리앨라 클라우스가 있으면 휘아킨 무하까지 포섭할 수도 있고, 실패하더라도 감시가 어려운 무하 공작가의 사정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녀를 포섭한 덕에 데본시아는 휘아킨의 돌발 행동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대처할 수 있었다. 사실 애리얼의 목표를 어그러뜨려 미움을 받는 게 그가 아닌 휘아킨이라면 더없이 좋은 결과이기도 했다.
상황이 어떻게 틀어져도 그에게는 큰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이번 탈출 조건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창문까지 깨고 나가 스카이라에게 생일 선물을 전한 그녀의 행동에서 뻔히 드러났다.
스카이라의 생일도 아닌 날에 선물을 전한 것으로 보아, 생일을 챙기는 것 자체가 조건은 아닌 게 확실해졌다. 선물을 받는 것이 조건이다.
그렇다면 일은 쉬워진다.
그녀는 마지막에 무조건 제게 올 것이다.
그는 사냥을 나선 포식자와 같이 오랜 굶주림을 참으며 애리얼을 기다렸다. 그녀를 붙잡고서도 그녀를 취하지 않고 참았다.
완전히 때가 올 때까지.
약간의 불안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순조롭다고 여겼다.
그런데 큰 변수가 일어났다.
렉시우스가 제 목숨을 걸면서까지 금계 술식을 부수는 도박을 저질렀다.
그가 구태여 상정하지 않았던 수로 그의 압제가 풀렸고, 애리얼은 전과 같이 기억을 찾고 말았다.
더는 금계 술식을 쓸 수 없는 이 시점에, 그렇게 되었다.
애리얼은 전처럼 그를 혐오할 터였고, 벼랑 끝으로 몰린 그는 이제 굶주림을 참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이를 드러내고서 애리얼에게 다가갔다.
***
애리얼은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해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힘이 없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힘겨웠다. 입을 벌렸으나 목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으, 윽, 하는 짧고 약한 신음만 흘러나왔다.
그 작은 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녀의 마른 입술에 컵을 기울였다.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입을 벌리고 넘어오는 물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 모습을 보고서 누군가가 조용히 웃음소리를 흘렸다.
“잘 먹네.”
아이를 칭찬하는 듯한 말투의 고혹적인 음성.
데본시아.
정신이 번쩍 명료해졌다. 애리얼은 목을 축이는 물을 반사적으로 퉤 뱉어 내며 팔을 휘둘렀다. 그가 제게 날아온 그녀의 팔을 아주 간단히 잡아 부드럽게 손목을 감싸 쥐었다.
무력하게 반격을 저지당한 애리얼은 제 손목을 쥐는 그의 손바닥의 온기와 대비되는 차갑고도 익숙한 감촉을 느꼈다. 까무러치게 놀란 그녀의 시선이 가느다란 팔목에 걸린 검은색 고리로 가닿았다. 브레이슬릿의 어둡고 매끈한 표면이 눈에 담겼다.
충격으로 커다래진 애리얼의 두 눈에 분노와 혐오가 담겼다. 하, 어이없어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그녀는 몸을 확 일으켰다. 당장에 뛰쳐나갈 듯이 침대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 철그럭, 쇠사슬 소리와 함께 발목을 죄는 질긴 감촉이 느껴졌다.
홉떠졌던 그녀의 눈이 스르르 아래로 내리깔렸다. 가느다란 발목에 감긴 가죽과 그 위를 덮은 족쇄가 보였다.
“쇠는 아프니까, 가죽으로 먼저 덮었어.”
정수리 위로 그의 음성이 쏟아졌다.
“솜이 더 좋았으려나? 불편하면 말해. 바꿔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