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50)화 (238/264)

휴대폰, 다른 세계, 눈앞에서 죽음을 맞은 부모님.

스카이라는 어떤 추임새도 없이 가만히 경청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의 차분한 표정에는 단 한 번도 의심의 기색이 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죽고 싶은 거예요.”

애리얼은 그렇게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방에는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의 불행한 서사를 듣고서도 위로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둘 다 데본시아에게 고통받았고,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그것에 대해 서로 공감하는 일도 없었다.

둘은 그저 자신이 보이는 태도와 행동에 대한 이유로 과거사를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스카이라는 한참을 침묵하며 입을 열지 않았다. 방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가지고 온 온갖 종류의 설탕케이크를 전부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데, 그냥 여기서 살아.”

그가 말했다. 어쩐지 비꼬는 것같이 들렸다. 실제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말재주가 부족해서일 것이다. 스카이라는 상냥한 주제에 위로하는 건 서툴렀으니까.

“맛있는 걸 먹여 줄게. 다른 좋은 것도 다 갖게 해 주고, 좋은 데도 여행하게 해 줄게. 내가 다 해 줄게.”

“…….”

“그러니까 살아, 애리얼.”

그는 케이크를 잔뜩 올려놓은 테이블에 홍차까지 따라 주며 삶을 권했다. 먹을 것으로 사람을 꾀어 보기라도 하려는 건지.

“왜 그렇게까지 해요?”

“말했잖아.”

“……그럼 제가 안 죽는다고 하면, 여기에 안 오실 건가요?”

“…….”

“만약 제가 정말로 안 죽는다는 보장이 있으면, 저하께서 더 이상 이곳에 올 필요가 없잖아요.”

그녀의 말에 스카이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조차도 제 행동에 의문을 느끼는 듯, 말 한마디 없이 심각하게 고민을 이어 갔다. 그러다가 돌연 뺨을 붉혔다. 커다래진 두 눈 속의 파란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에서 외마디 감탄사가 나왔다.

“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애리얼은 그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기며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그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죽어도 계속 올 거야. 그러니까 죽는다는 말 좀 그만해!”

난데없이 버럭 신경질을 부린 그가 황급히 벌게진 얼굴을 감추며 도망치듯 방을 떠났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문이 닫혔다.

조용해진 방에 그가 두고 간 홍차와 설탕케이크의 은은한 향기가 서로 어우러져 퍼졌다.

눈꽃설탕이랬나.

무척 감미로운 향기였다. 케이크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그 향에 취해 허기를 느낄 정도의 향이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감흥 없이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배고프지 않았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즐겁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기력했다.

하지만 저를 꾀어내려고 그가 펴낸 향기가 어쩐지 싫지는 않았다.

그러니 조금 더 그것을 즐기다가 죽어도 되지 않을까…….

***

지쳐 있던 그녀는 매일 찾아와 저를 챙기는 스카이라의 살뜰함에 상당히 감화되었다.

죽을 기운조차 없어서 누워 있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식사를 챙기기 시작했고, 가끔은 일어나 앉은 채 먼저 그를 반기기도 했다. 물론 방을 나서는 일은 없었다. 그건 데본시아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런데 데본시아는 왜 스카이라가 날 찾아오도록 내버려 둔 걸까?’

그의 살벌한 집착 증세와 소유욕의 정도를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해답을 알아챘다.

데본시아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트 여섯 개로 그녀를 염려했다. 정상적인 염려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의 죽음을 겁내기는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스카이라의 방문을 눈감았던 거다.

스카이라가 그녀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애리얼은 그런 생각이 들자 당장에 죽어 버리고 싶었다. 질투심마저 누를 줄 아는 데본시아의 교활한 애정이 토악질이 날 정도로 불쾌했다.

데본시아를 죽일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녀에게는 그를 이길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녀는 신성 마법을 다룰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성 마법사로 태어났다지만, 그녀는 그와 달리 신성 마법을 배울 수 없었다. 신성 마법과 관련된 것은 제국에서 전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한낱 백작가 귀족인 그녀는 신성 마법에 관련된 서적 하나 읽을 수 없었다.

철천지원수를 죽일 수 없다.

그 사실이 그녀를 자학적으로 만들어 결국 자살에 이르게 했다.

애리얼은 입술을 세게 씹었다. 피가 흘러 입 안에 비린 맛이 감돌았다.

문득 그 맛이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최근 풍미가 좋은 것들만 먹어서일까. 피의 맛이 무척 역하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깨물기를 멈추고 입술을 닦았다.

단것이 먹고 싶어졌다.

스카이라가 가져오던 것들이 먹고 싶어졌다.

스카이라가 보고 싶었다.

“스카이라…….”

감정의 자각은 이다지도 사소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선명하게 이루어졌다.

***

처참한 과거를 회상하며 흐른 눈물이 베개를 축축하게 적셨다.

수많은 회귀 중의 그 어떤 과거도 행복할 수 없었다. 행복하지 않았다.

“……스카이라.”

한참을 울던 애리얼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힘없이 누워 있었다. 그때 그를 보며 살고 싶었던 마음이 지금은 힘없이 부스러진 상태였다. 너무나 많은 기억이 몰려와서 피로했고, 하나같이 끔찍한 결말이라 절망스러웠다. 다시 잊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잊어 봐야 데본시아에게만 좋은 일이겠지.

“스카이라…….”

애리얼은 그의 이름을 하염없이 되뇌며 자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살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데본시아에게 복수는 하고 죽고 싶어서. 그를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든 다시 이 굴레가 반복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서 온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유일하게 남은 희망인 그를 불렀다.

“스카이라.”

쿵.

둔탁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데본시아였다.

그가 문을 닫고 침대로 다가오며 애리얼을 주시했다. 애리얼은 모로 누운 채 그와 눈을 맞췄다. 스카이라의 이름을 외던 입을 꾹 다물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데본시아는 웃으며 그 시선을 즐겼다.

“누구 불렀어?”

“스카이라.”

애리얼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데본시아의 눈썹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애리얼은 질투와 열등감에 깨어지는 그의 무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정말로 징그럽게 그녀를 원하고 그녀에게 집착하는 그의 민낯. 그 소름 끼치는 일면을 보았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 내가 걜 해하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어차피 스카이라도 인질이라서 죽이지 않을 거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팔, 다리 정도는 잘라 버릴 수도 있는데. 사지가 없어도 목만 붙어 있으면 인질로는 손색이 없잖아.”

그는 동생의 사지를 잘라 버리겠다는 소리를 태연히 웃으며 했다.

무서운 인간.

역겨운 자식.

쓰레기.

그가 의자를 가져와 애리얼이 누운 침대 앞에 앉았다.

“계속 같이 있어 주고 싶었는데, 미안해.”

“…….”

“일 수습하느라 좀 늦었네. 우리 애리얼 때문에 외교 능력을 시험당하고 왔거든. 중간에 파투낸 담화까지 전부 다시 잡아 소화하느라 혼났어.”

“…….”

“네 남편이 유능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애리얼이 몸을 홱 일으켜 그에게 손을 휘둘렀다.

데본시아는 오히려 때리라는 듯 고개를 내밀었다.

짜악!

매서운 소리가 났다. 데본시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뺨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애리얼은 강한 마찰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감추며 말했다.

“날 사랑한다면 그래선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그렇게 믿고 싶은 거 아니고?”

“이딴 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이 아닌 게 아니라, 네가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사랑인 거야.”

“…….”

“난 널 사랑해, 애리얼.”

그가 팔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애리얼은 그 즉시 그의 손을 쳐 냈다. 저에게 닿아 오는 그의 온기가 소름 끼쳤다. 혐오스러웠다. 붉어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그래? 그런데 어쩌지……. 난 죽어 주고 싶지 않은데.”

데본시아가 웃으며 다가왔다. 미소 지은 입술과 달리 두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쪽 눈은 심해와도 같고 한쪽 눈은 빙하와도 같다. 지독하게 시리고 깊고, 두렵다.

애리얼은 몸을 뒤로 빼려고 했으나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아 당겼다.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감싸고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대로 그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억지로 고정된 채로 그와 이마가 맞붙었다. 그의 음습한 시선을 코앞에서 마주하자 절로 몸이 떨렸다.

깊고 깊은, 늪과 같은 그의 집착.

“애리얼, 너는 뭐든지 가질 수 있어.”

그가 낮게 속삭이며, 브레이슬릿을 낀 애리얼의 오른손을 끌어와 제 가슴팍에 올려 두었다.

얇은 셔츠 아래, 발작하듯이 뛰는 그의 고동이 애리얼의 손바닥으로 스몄다.

애리얼은 인상을 찌푸렸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손 아래에서 뛰고 있었다. 정신 나간 감정의 온상이 손에 잡힐 듯 뜨거웠다. 겁이 났다. 불쾌했다. 애리얼은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도망치려는 그녀의 손을 꽉 눌러 제 가슴팍에 밀착시켰다.

“휘둘려 줄게.”

그가 원하지 않는 것으로 그녀를 유혹했다. 블랙 오키드와 시더우드. 상쾌하고 깊은 향을 풍기며, 나른하고 간드러진 중저음으로.

“휘둘러 줘, 애리얼.”

간청하듯이, 애원하듯이. 그녀에게 요구했다.

애리얼은 몸서리를 치듯 사지를 떨었다. 있는 힘껏 그를 밀치고 싶었다.

입 안의 살을 깨물며 억지로 진정했다. 점막이 찢어져 입에 피가 고였다. 비린내를 느끼며 정신을 다잡았다. 침착하자. 그를 이용해야 하잖아. 복수하고 싶잖아. 침착해.

그의 두 눈을 마주 보며, 그에게 가만히 안겨서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그러면…… 렉시우스를 만나게 해 주세요.”

렉시우스. 예상 못 한 이름에 데본시아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왜 스카이라가 아니고 렉스야?”

“그 사람은 지금 제 종속이니까요.”

종속이라는 소리에 데본시아는 경쟁심이라도 느끼듯 질투심을 드러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거야?”

“나에게 충성의 맹세를 한 인간이니까요.”

“……그러네. 그랬었지.”

데본시아는 잊었던 사실을 뒤늦게 상기한 듯 되뇌었다. 질투심을 숨기지 못한 낯이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짓는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입술이 요사했다.

“네가 바라는 게 그거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렉스를 불러 줄게.”

그는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

“대신, 하나 약속해.”

무엇을. 묻기도 전에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케이스를 꺼내 한 손으로 열었다. 벨벳 쿠션을 드러내며 달칵 열린 케이스의 안쪽에서 백은빛 반지가 빛났다.

애리얼은 그게 그가 제 생일날 건네려던 선물이었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받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그 물건.

결혼반지.

받는 순간 특별 엔딩에 실패할 것이었던 물건.

예정된 미래를 알리는 끔찍한 상징.

파르르 진동하는 검은 눈동자가 하얀 반지를 눈에 담았다.

“결혼해 줘, 애리얼.”

데본시아가 케이스를 내밀며 청혼했다.

애리얼은 창백한 안색으로 그를 마주했다. 너무나 다정한 얼굴로 가증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았다. 스카이라에게는 몇 번이고 거절을 말해야 했던 입술이 데본시아에게는 승낙을 말하기 위해 달싹였다. 끔찍하고 처절하게, 죄악에 물든 기분으로…….

“네.”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역겹더라도, 당신이 추락할 때를 위하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