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도 한계를 넘으면 느껴지는 게 없었다.
렉시우스가 딱 그런 상태였다.
그는 근원 소멸기를 바닥에 꽂고 나서부터 완전히 정신이 날아가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임종을 맞는 감각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맞는 표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압도적인 감각이었다.
일시에 오감을 차단당하고 생각마저도 할 수 없게 막혀 버리는 느낌. 저라는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기분. 그 오싹함.
신성 극계 술식이라는 건 이다지도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한다.
‘근데 그런 걸 세 개나 쓰다니……. 이 미친놈.’
겨우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데본시아를 향한 감탄 아닌 감탄이었다. 동시에 그런 미친놈의 손아귀에 무방비하게 놓이게 되었을 애리얼이 걱정스러웠다.
그 미친놈이 걜 곱게 안 둘 텐데.
‘우리 주인님……. 내가 얼른…….’
무의식중에 든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흐릿하던 정신이 돌연 기이하게 명명해졌다. 물속에서 강제로 건져지는 것처럼 갑자기 멱살을 잡혀서 상체가 확 끌어 올려졌다.
렉시우스는 깊은 잠에서 깬 것 같지 않게 말짱한 얼굴로 태연히 눈을 떴다.
“뒤져서 지옥에 왔나? 기어코 부모를 다 죽인 천하의 패륜아 새끼가 보이네.”
렉시우스의 멱살을 쥔 데본시아가 그의 말에 반응해 웃었다.
“너무 저열한 말투로구나. 짐의 앞에선 예의를 차려야지, 공자.”
“제가 지금 자다가 일어난 거라서요. 예의까지 차려 줄 정신머리가 없네요, 폐하.”
렉시우스가 잔뜩 비아냥대며 받아쳤다.
데본시아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쥐고 있던 렉시우스의 멱살을 놓았다.
들어 올려졌던 렉시우스의 상체가 그대로 뒤로 무너지며 철제 침대에 부딪쳤다. 지독하게 얇은 매트리스는 충돌의 충격을 거의 흡수하지 못했다. 근원 소멸기를 사용한 이후 여태 아물지 못한 상처가 짓눌려 고통을 쏟아 냈다.
렉시우스가 낯을 구기며 욕설을 뱉었다.
“갑자기 왜 지랄이야. 안 죽이고 화풀이용으로 쓰려고 살려 뒀어?”
“넌 가만히 경청하는 유순한 성정의 소유자가 아니니 화풀이용으론 부적합하고, 난 득도 안 될 살인을 멍청하게 저지르는 저능아가 아니고.”
“그래서? 용건이 뭔데.”
“일어나.”
데본시아가 담백한 말투로 명했다.
“애리얼이 널 만나고 싶다고 말했어.”
“그래서 그렇게 열이 받은 거야?”
렉시우스가 빈정거렸으나 데본시아는 반응하지 않았다. 감옥이나 다름없는 격리실의 문을 열며 한마디 툭 던졌을 뿐이다.
“따라와.”
그제야 렉시우스는 제가 무슨 꼴로 어디에 처박혀 방치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사방이 철창과 결계로 싸인 좁은 독방, 양 손목에 걸린 마력 제어용 브레이슬릿, 최소한의 처치도 없이 내버려 둔 상처,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득한 몸.
상체를 일으키는 데만 해도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수준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렉시우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가 기어코 안 뒤져서, 실망스러우셨겠네요, 폐하.”
“잘 아네. 다음부턴 실망시키지 마.”
이죽거리는 렉시우스를 향해 데본시아가 서늘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늘 짓는 웃음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게 질투의 발현임을 렉시우스는 모르지 않았다.
저리도 여유가 없는 데본시아라니.
렉시우스는 제가 벌인 짓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곤 기분이 좋아졌다. 좁은 독방을 나서며 콧노래까지 능청스럽게 흥얼거렸다. 비록 신체는 만신창이에 마력까지 막혀 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데본시아가 미간을 구기며 그에게 셔츠를 던졌다.
“씻고, 그거 입고 와.”
렉시우스는 데본시아가 던진 검은색 셔츠를 받아 들고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근데 감시가 좀 헐겁다?”
“어차피 너, 애리얼을 보기 전엔 아무 데도 안 갈 거잖아.”
데본시아가 시큰둥하게 욕실 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도주의 위험이 없는 상대를 굳이 감시할 이유는 없었다. 구태여 사람을 붙여 봐야 인력 낭비다.
이 와중에도 효율은 칼같이 챙기는 데본시아를 보며 렉시우스는 짧게 혀를 찼다. 저러니까 제가 술식을 부술 거라는 건 상정을 못 했지.
데본시아는 가끔 도박수를 지나치게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나 이득도 없는데 감정적으로만 돌진하는 경우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멍청하게 왜 손해만 보냐는 식이었다.
물론 낮은 계급이나 잃을 게 없는 인물들이 마지막 발악처럼 구는 건 쉽게 예측해서 대응하곤 했다. 하지만 렉시우스 정도의 높은 고위 계급이 목숨까지 걸며 감정적 도박수를 던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애리얼까지 이용하는 놈인데.’
이득을 보기는커녕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오롯하게 데본시아를 엿 먹일 생각으로 가득했던 그의 의도를, 데본시아가 알아채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렉시우스는 시체라도 처리했는지 소독용 약품 냄새가 코를 찌르는 좁은 욕실에서 피를 씻어 내며 생각했다.
저런 놈에게서 애리얼을 어떻게 빼 와야 할까.
쏴아-
수전에서 찬물이 쏟아졌다. 소독약 냄새가 강렬하게 피어났다. 어디서 이렇게 독한 약품 냄새가 나는가 했더니 물 자체에서 풍기는 냄새였나.
아무래도 시체를 치우는 용도로 쓰는 욕실이 맞는 듯했다. 고문도 겸하는 독방이니만큼 죽은 이들이 많았을 테지. 그만큼 그가 중범죄자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겠고.
냉수가 몸을 훑고 가자 온몸의 상처가 쓰려 왔다. 그럼에도 그는 애리얼을 만날 생각에 꼼꼼하게 핏자국을 지웠다. 찬물에 젖어 김이 피어오를 것 같은 몸 위로 검은색 셔츠를 걸쳤다. 다행히 피 냄새는 나지 않았고 상처도 제대로 가려졌다. 거울이 없어서 얼굴이 어떤 꼴인지 확인하지 못해서 그것만 조금 아쉬웠다.
적당히 매무새를 정리하고 나오자 데본시아가 그의 팔을 덜컥 잡았다.
곧장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열악하던 욕실을 나온 렉시우스는 어느새 낯선 복도의 검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안에 가둬 둔 거야?”
데본시아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문고리만 돌려 열었다.
달카닥.
둔탁한 소리를 내며 두꺼운 문이 열렸다.
렉시우스는 슬쩍 벌어진 문 틈새를 보며 말했다.
“어지간히도 두꺼운 감옥을 지어 놓으셨네.”
“들어가.”
“웬일로 나더러 먼저 들어가라 그러냐. 넌 안 들어가게?”
“들어오지 말라더라.”
“애리얼이?”
렉시우스가 조롱이 확실한 웃음소리를 피식 흘렸다.
데본시아의 미간에 실금이 그였다. 그러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었다. 입꼬리가 간만에 호선을 그렸다. 억지로 지은 미소마저도 우아한, 완벽하게 여유를 가장한 낯.
“들어가서 얘기하고 나와.”
그는 말투마저도 어느새 나긋해져 있었다.
안에서 애리얼이 듣고 있기에 이러는 걸까.
‘얘도 참 어지간히 진심이네.’
렉시우스가 그를 보며 언짢은 듯 눈썹을 치키더니, 여유로운 몸짓으로 슥 문을 밀고서 들어갔다.
적요함이 느껴지는 거대한 방. 그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침대 위에 애리얼이 있었다. 이불을 덮고 가만히 앉아 그를 응시했다.
쿵.
문이 닫히며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오롯하게 둘만이 되었다.
그제야 애리얼이 입을 열었다.
“선배.”
그 목소리에 렉시우스는 주인을 찾은 개처럼 한달음에 달려갔다. 두 팔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품에 폭 안겨 드는 작은 몸,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따스한 체온이 억누르던 감정을 울컥 터트렸다. 이걸 놔두고 죽을 생각을 하다니.
“돌았지, 내가…….”
가늘게 떨리던 음성이 기어코 낮게 욕설을 뱉었다.
애리얼은 흠칫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품에선 평소에 풍기던 은은한 비누 향 대신 소독약 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락스물에라도 담가졌다가 나왔는지, 뭔지. 급작스러운 포옹보다도 더 그녀를 당혹스럽게 하는 요소였다.
“선배, 무슨 일 있었어?”
“응. 넌 몰라도 되는 일.”
그는 단호히 물음을 쳐 내며 애리얼을 더 꽉 감싸 안았다.
숨이 막혀 오는 포옹에 익숙한 부담감을 느낀 애리얼이 그를 밀어냈다. 렉시우스는 아쉬운 듯 그녀를 안고 조금 버티다가 결국 팔을 풀고서 물러났다.
애리얼의 눈이 빠르게 그를 훑었다.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독한 소독약 냄새. 물기가 느껴지는 머리칼과 냉수에 씻은 듯 차가운 피부.
그는 몸에 남은 어떤 흔적을 숨기기 위해 급히 씻고 갈아입은 것 같았다.
‘뭘 숨기려는 거지? 혹시…….’
애리얼이 눈보라 속에서 토혈하던 데본시아를 떠올리던 차였다.
렉시우스가 싸하게 굳은 낯으로 애리얼의 왼손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이거 뭐야.”
험악해진 금색 눈이 그녀의 약지에 끼워진 하얀 반지를 부술 기세로 쏘아보며 물었다.
“데본시아가 끼웠어?”
“선배를 만나게 해 주는 대신이었어.”
그렇게 말하자 렉시우스의 낯이 복잡한 감정을 담고서 일그러졌다. 화도 나고 당혹한 데다 낭패감까지 느끼지만, 못내 기쁘기도 한 얼굴.
“……그래도 이런 짓은 아니야. 넌 그냥 기다렸어야 했어, 애리얼. 그랬으면 내가 어떻게든 널 찾아왔을 텐데…….”
“기다리기 싫었어.”
딱 잘라 말하자 렉시우스는 심란함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애리얼의 얼굴이 단호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탓에.
“무슨 용건이야.”
“내 사촌, 클라우스 백작에게 이걸 전해 줘.”
애리얼은 조용히 목소리를 줄이며 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렉시우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그녀가 목숨 줄처럼 붙들던 것이니까. 오죽하면 그녀에게서 한 번 빼앗기까지 했었던 거였다. 그런데 이걸 전해 주라고…….
“진심이야?”
“응. 대신 이것과 상응할 정도의 공격용 마도구를 보내라고 해 줘. 그러면 이 마도구의 소유권을 완전히 넘기겠다고, 말해 줘.”
애리얼이 담담히 용건을 전하자, 렉시우스가 더 당황하여 되물었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다 직접 휴대폰을 쥐여 주는 손길에는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그에게 빼앗겼을 때 악을 쓰며 되찾으려던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신기루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러는가.
‘실패…… 했나?’
그래서 이게 더는 쓸모가 없어졌나.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묘하게 초연한 태도 변화와 체념한 듯한 분위기가 어떤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추측했다. 뭐에 실패한 건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쨌건 애리얼은 그 때문에 어떤 것을 마음먹어 추진하고 있었다.
‘어쩌면 상당히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를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이걸 도와도 괜찮은 건가.
불쑥 든 의문에 렉시우스는 참지 않고 입을 열었다.
“뭐 하려고 이러는 건데?”
그의 물음에 애리얼의 손이 시트를 움켜쥐었다. 작게 한숨을 쉰 그녀는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며 망설이다가 이불을 걷고 족쇄가 채워진 다리를 드러냈다. 소매를 걷고 브레이슬릿이 채워진 오른손도 보였다.
“선배, 내 꼴을 봐.”
애리얼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렉시우스는 충격에 물든 얼굴로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데본시아가 애리얼에게 족쇄 이상의 것을 채워 놓았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 말하며 다 포기한 듯 웃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난 여기서 무력하게 기다리고 싶지 않아, 선배.”
“…….”
“나도 대항하고 싶어. 그러니까 도와줘.”
그녀가 부탁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데본시아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말이었다.
그녀의 성격상 감금된 것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복수를 준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녀의 실패까지도 데본시아로부터 유발된 거겠지.
렉시우스는 착잡한 얼굴로 휴대폰을 받아 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내키지는 않지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대신 다칠 만큼 위험한 짓거릴 벌이면 바로 막을 줄 알아.”
“응. 고마워.”
애리얼이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 그녀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흩트렸다. 애리얼은 엉망이 되어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약간의 웃음기를 되찾은 얼굴로 말했다.
“그냥 하는 말 아니야. 무리하면 당장 내가 너 잡으러 올 거니까.”
진심이 아닌 척 장난 어린 말투로 전하는 진심이었다.
애리얼은 그걸 경고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그는 씁쓸한 눈길로 그녀와 눈을 맞추다가 휴대폰을 챙겨 넣고서 문으로 향했다. 척척한 바짓단 아래, 슬며시 드러난 발목에 미처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드러났다.
애리얼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누구를 다치게 했든가, 본인이 다쳤었든가. 핏자국이 의미하는 바는 그랬다. 독한 소독약 냄새도 피 냄새를 가리기 위함인 것 같았다.
어쩐지 데본시아가 급작스럽게 토혈하던 이유에 그가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았다.
진엔딩을 막던 의문의 힘이 갑작스럽게 해제된 이유도 렉시우스와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있었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고마워, 선배.’
그의 덕분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데본시아는 회귀 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이번 회차의 그는 자주 아팠고 마력의 과부하도 훨씬 많이 겪었다.
애리얼은 이 뜻밖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
“무슨 이야기를 했어?”
방을 나와 문을 닫자마자 데본시아가 물었다.
렉시우스는 안달이 난 듯 구는 그를 보며 조롱의 의도가 확연한 미소를 지었다.
“엿듣던 거 아니었어?”
“문도 벽도 두꺼워서.”
“그래서 못 들었다?”
대놓고 떠보자 데본시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렉시우스가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못 들었나 보네? 웬일로 성실하게 굴었냐.”
“내 황후가 싫어할 거 같아서.”
데본시아가 보란 듯이 자극적인 단어를 쓰며 받아치자 이번에는 렉시우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황후?”
싸늘히 낮아진 목소리에 헛웃음이 섞였다. 어이없다는 투였다.
데본시아는 그제야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그의 어깨를 쥐었다. 순식간에 복도를 벗어나 그를 다시 독방으로 끌고 온 다음 입을 열었다.
“애리얼의 왼손 약지, 못 봤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렉시우스의 낯이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냈다. 경직된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런 반응을 기대했다.
데본시아는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분명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보다, 오른손에 걸린 브레이슬릿보다, 약지에 끼운 반지에 가장 격하게 반응했겠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불 보듯 뻔했다.
데본시아는 그를 잘 알았다. 그가 가진 감정도 잘 알았다. 미래를 버리고 목에 건 그의 개 목줄. 거기에 새겨진 애리얼의 이름을 노려보며 경고한다.
“내 거라고 했었잖아.”
가장 처음에. 네가 애리얼을 처음 봤을 때. 그때.
“뭘 그렇게 끼고 사나 했더니, 이런 걸 숨겨 놨었어?”
“숨긴 적 없는데.”
“얠 대체 어디서 찾은 거야? 완전히 내 취향…….”
“내 거야. 건드리지 마.”
아주 예전의 기억이 렉시우스의 머리를 울렸다. 그때의 대화, 그때의 풍경, 그때 보았던 애리얼의 얼굴…….
구겨져 있던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서서히 지워졌다.
데본시아의 차가워진 눈이 그 식은 표정을 담는다.
“건드리지 마.”
그때와 같은 말로, 렉시우스를 향한 경고를 마쳤다.
렉시우스는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에 혼란스러워 혼몽한 눈빛이었다. 그사이 데본시아가 독방에 그를 두고서 나갔다.
혼자가 된 후에야 렉시우스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더듬어 쥐었다.
“건드리지 마.”
방아쇠가 당겨져 그의 뇌를 쏘았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이 죽었던 과거를 기억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