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아킨 무하가 반역자로 수배된 지 한 달이 지났다.
휘아킨은 공작저로 가지 않았다. 공작저는 숨기에 너무 뻔한 곳이라 수색이 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러면 아무리 폐쇄적인 무하 공작가라도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수도를 방랑하며 은밀하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눈길을 끄는 우월한 외관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사람을 꾀어냈고, 고위 귀족답지 않게 열악한 환경에도 쉽게 적응했다. 무시나 멸시를 받아도 덤덤했다. 그 덕인지 사람들은 그가 귀족이라는 의심을 별로 하지 않았다. 오랜 멸시와 따돌림에 적응한 것이 이런 곳에서 의외로 효과를 봤다.
그는 슬럼가의 곰팡이가 핀 반지하에 처박히고서도 씁쓸함조차 느끼지 않았다.
변장하고서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틈에 숨어 들어가 황성에 관련된 소문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했다. 동시에 무하 공작가와도 연락을 이어 갔다.
무하 공작은 마력을 찾은 제 아들을 아끼지 않고 지원했다. 휘아킨은 그녀의 달라진 태도가 역겨웠으나 지원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데본시아에게 복수를 하려면 공작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지금도 그는 공작이 마련해 준 은신처에서 조용히 금서를 파헤치는 중이었다.
금기시되는 것들. 그중에서도 저주를 중점적으로 탐독했다.
어떤 게 고귀하신 황제 폐하께 직격탄으로 먹혀들까.
똑똑.
한창 저주를 고르고 조합하는 중이었다.
똑.
똑똑똑.
희한하게 끊기는 노크 소리가 그가 있는 반지하를 울렸다.
“들어오세요, 이렌 님.”
그가 허락하자 문이 열리며 아리앨라가 들어왔다.
‘이렌’은 아리앨라의 어릴 적 별명으로 현재는 휘아킨과 접선할 때의 가명으로서 쓰고 있었다.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쓴 그녀는 혹시 몰라서 머리색까지도 갈색으로 바꾼 상태였다. 그가 쫓기는 처지였기에, 만날 때마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공작은 배신을 눈감아 주는 조건으로 그녀가 휘아킨의 완벽한 조력자가 되길 명했다. 휘아킨이 얻는 금서와 정보는 대부분 아리앨라가 조달하는 거였다.
“이번에 드린 서적에는 좋은 정보가 있었길 바라요.”
아리앨라가 살갑게 웃으며 문을 걸어 잠갔다.
휘아킨은 시큰둥한 기색으로 책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또 어머니의 걱정 같은 개소리를 전하려고 오신 건 아니겠죠?”
“오늘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어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아리앨라가 오른손을 들어 제 쇄골에 살짝 얹으며 웃었다. 사교계에서 쓰는 자신감을 표현하는 동작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휘아킨이 그녀를 흘긋 곁눈질하더니 책을 내려놓고서 일어났다.
“쓰레기 같은 차밖에 없지만 그거라도 마실래요?”
“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죠.”
아리앨라가 테이블 옆의 의자를 빼서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휘아킨은 나른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서 부엌이라 부르기에도 뭐한 좁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주전자를 불에 올리고, 찬장에서 찻잎이 담긴 통과 찻잔을 꺼내 준비했다.
마법은 일절 쓰지 않았다.
아리앨라는 그런 그를 신기하게 보았다. 귀찮은 짓을 시키면 마법을 쓰려나 해서 일부러 유도한 거였는데, 실패였다. 그는 참 꿋꿋하게도 손수 귀찮은 짓을 해냈다. 주전자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모습에서는 초연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마력을 되찾았으니 즐거워하며 마법을 써 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삐이익-
주전자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하얀 김을 뿜었다.
휘아킨이 화구의 불을 끄고서 주전자를 들었다. 찻잎을 넣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자 싸구려 찻잎의 향이 풍겼다. 그가 쓰레기 같은 차라고 말한 것치곤 괜찮은 냄새였다.
“안 귀찮으세요?”
아리앨라가 물었다.
휘아킨은 연노란색으로 우러난 차를 아리앨라의 앞에 놓으며 대답했다.
“뭐가 귀찮아요. 물 끓이고, 찻잎 넣고, 붓고. 엄청 간단한데.”
“하지만 마법을 쓰면 훨씬 더 빨리 끝나잖아요. 손가락만 휘익 하면 일 분도 안 걸리는데요.”
“아, 네. 다음부턴 그럴게요.”
그는 대충 대꾸하며 아리앨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혹시 아직도 마력 회복이 덜 된 거예요?”
아리앨라가 집요하게 질문했다.
휘아킨은 귀찮은 듯 눈썹을 찡그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되찾은 마력은 근원 소멸기를 사용한 때로부터 사흘이 흐른 뒤의 자정에 완전히 회복되었으나, 그는 마력을 쓰지 않았다. 황제에게 걸 저주를 완성하기 위해선 단 한 줌의 마력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쓸데없는 마력의 사용은 주변의 의심을 사기에도 좋고. 무엇보다도 평생을 마력 없이 살아왔기에 마법을 안 써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게 컸다.
“쓸데없는 사담은 그만두고 정보나 꺼내 봐요.”
그가 조용히 정보를 재촉하자 아리앨라는 로브 안쪽에 숨겨 온 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검은 창과 하얀 껍데기를 지닌 네모난 물건이 테이블에 놓였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부분이 놀란 휘아킨의 얼굴을 반사했다.
아카데미 시절 룸메이트로 지내면서 몇 번 보았던, 애리얼이 늘 소중하게 지니고 다니던 물건. 의미 불명의 마도구.
“이걸 왜 이렌이 가지고 있죠?”
“며칠 전, 대공비 전하와의 밀회에서 건네받은 물건이에요.”
아리앨라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서 설명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은 황성 기물 파손으로 잠시 독방에 머무르는 형을 받았다. 다만 그는 남부 전쟁을 훌륭하게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기에, 이 일은 전부 비밀에 부쳐졌다. 대공가의 명예를 위해서였다.
그만큼 렉시우스의 죄는 명백했고,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대공비는 항의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면회만 이어 갔다.
그러다 며칠 전, 대공비는 렉시우스에게서 애리얼의 마도구를 넘겨받았다. 황성에 소란이 일어 감시가 약간 느슨해진 때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공비에게 부탁했다. 클라우스 백작을 만나 휴대폰과 함께 애리얼의 말을 전해 달라고.
“제 사촌은 이걸 주는 대신 이것에 상응하는 공격용 마도구를 건네 달라고 했어요.”
“그런 게 있어요?”
휘아킨이 꽤 날카로워진 눈길로 네모난 마도구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이 도구를 애리얼의 손에서 본 뒤로 오늘까지, 그는 이 도구에 관해 지속적인 조사를 이어 왔다. 무엇이기에 그리 소중히 품고 다니나, 하는 약간의 질투심까지 느끼며 말이다. 하지만 조사의 성과는 형편없었다. 어떤 서적을 뒤져도 이것과 유사한 형태의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얻은 정보라곤 아리앨라를 떠보고 추궁해서 들은 게 다였다.
애리얼이 굉장히 소중하게 여겨 늘 품고 다니는 것. 몹시 강력한 방어술로 보호받는 것. 아리앨라의 해제술로도 단 몇십 초밖에는 해제할 수 없는 것. 읽을 수 없는 문자로만 내용이 적혀 있는 의문의 물건.
애리얼의 말로는 이걸 전 황태자, 현 황제에게서 하사받았다는데, 아마도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아리앨라는 이 물건에 흐르는 마력이 황제의 마력보다도 월등하다고 했다.
강렬한 염원이 느껴지는 새카만 마력. 이 물건을 가득 채운 건 아마도 애리얼 본인의 마력일 것이다. 그녀가 어떤 것을 염원하여 이걸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걸 내놓았다는 건 애리얼이 그만큼 궁지에 몰린 상태라는 건데…….
“대체 뭘 원해서 이걸 건넨 거죠?”
“파멸의 기원……. 아마도 그걸 원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애리얼이 아는 것 중에 이것과 상응할 만한 마도구는 그것뿐일 테니까요.”
파멸의 기원을 원한다는 건 무기를 원한다는 뜻이고, 무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의미일 터.
“선배님은 황제를 증오하는가 봐요.”
“…….”
“저랑 닮으셨네.”
그가 피식 웃었다.
아리앨라는 곤란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손끝만 연신 주물렀다. 황제를 증오하여 무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그녀라도 듣기 껄끄러운 것이었다.
툭, 투둑.
돌연히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났다.
툭, 툭, 투두둑, 투두두두둑.
작게 몇 번 울리던 소리가 점점 크고 시끄럽게 변했다.
계절이 변하는 걸 알리듯 비가 온다.
그 쓸쓸한 소리가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반지하를 가득 메운다.
휘아킨은 심란한 듯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이리저리 훑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전에 렉시우스 크레시앙이 이 물건을 들여다보고 이상해졌다고 했죠?”
“이상해졌다기보다는…… 뭔가를 알아챈 듯이 굴었어요.”
틀림없다. 그때다. 그때, 회귀의 기억을 찾은 것이다.
휘아킨은 패배감을 선사하던 공작저에서의 기억을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전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네가 있었던 적은 없어.”
“넌 이전에는 관계가 없던 존재라는 건데…….”
그는 렉시우스 크레시앙이 말한 그 회귀 전의 세계가 궁금했다. 저도 그때의 기억을 찾고 싶었다. 관계가 없던 인간이라는 말을 깨부수고 싶었다. 저도 그녀에게 영향력이 있는……,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관계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감았던 눈을 뜨고서 하얀 물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이렌. 아니, 아리앨라 님.”
본명을 부르는 그의 음성에 아리앨라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단 한 번도 그녀를 이름으로 칭한 적이 없는 이였다. 그런 이가 몹시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씀하세요.”
“이걸 해제해 주세요.”
뜻밖의 요구를 마주한 아리앨라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세차게 떨렸다.
휘아킨은 완고한 기색을 띤 채 그녀의 앞으로 네모난 마도구를 밀었다.
“저도 렉시우스 크레시앙처럼 뭔가를 알아채고 싶어요.”
“…….”
“그러니, 해제하세요.”
그의 말이 부탁에서 명령으로 바뀌었다.
공작으로부터 완벽한 조력자가 되길 명받은 아리앨라는 그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제 앞으로 다가온 마도구에 조용히 손을 올리고서 능숙하게 해제술을 펼쳤다. 익숙한 고통이 그녀를 덮치고 압도적인 마력량이 그녀를 헤집었다. 코피를 흘리다가 입으로도 피를 뱉으며 말했다.
“삼십 초!”
다급하게 시간을 알리는 외침과 함께 검게 잠긴 창 부분이 환하게 밝아졌다.
휘아킨은 그 즉시 마도구를 집어 들고서 밝아진 부분에 눈을 고정했다.
『경고! 비정상적인 접촉입니다.』
예전에 아리앨라가 해 줬던 설명대로 읽을 수 없는 문자가 떴다.
파지직, 파직!
개입을 거부하며 하얀 마도구가 새까만 마력의 스파크를 일으켰다. 하얗던 화면이 검게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지지직, 지지직.
마도구를 쥔 손가락에서부터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지지지직-
삼십 초가 흐르고 네모난 창이 완전히 검게 잠겼다.
끝이었다.
휘아킨은 멍한 상태로 마도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래대로 돌아온 액정이 그의 얼굴을 담았다. 새카매진 창에 얼이 빠진 멍청한 낯이 반사되었다.
마력의 스파크에 그을린 손가락만 아플 뿐, 머리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외부인이라는 걸 알리듯이 아무것도…….
입술이 벌어지고 턱이 덜덜 떨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회귀의 기억이 떠올라야 했다.
응당 그에게도 떠올랐어야 한다. 그녀와 이어졌던 과거가. 회귀 전의 이야기가…….
기다리던 것이 떠오르지 않아 뇌리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그가 바라지 않던 잔잔함이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처럼 밀려드는 기억에 휘청거리고 싶었다. 부디 뇌가 곤죽으로 엉키길 바라며 마도구를 부서트릴 기세로 틀어쥐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머릿속은 잠잠하기만 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하다.
‘정말로 나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던 거야? 애리얼은…… 정말 나와는 한 번도……? ……하지만 선배님이랑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아리앨라 클라우스!”
그가 다급하게 아리앨라를 불렀다. 그것도 풀 네임으로 칭했다.
아리앨라는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코피를 닦으며 그를 보았다.
창백한 낯의 휘아킨이 그녀에게 재차 흰 마도구를 내밀었다. 그을린 손끝이 파르르 진동한다.
“죄송해요. 잘 못 봤어요. 한 번 더 부탁드려요.”
“공자님…….”
“죄송해요. 부탁드려요. 죄송해요.”
휘아킨이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한 번 더 해제술을 써 주길 요구했다.
하지만 아리앨라는 이미 마력의 과부하가 온 상태였다. 그가 원하는 한 번 더 따위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감히 거절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휘아킨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갖은 학대와 따돌림에도 무덤덤하던 그가 금방이라도 망가질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리임을 알면서도 마도구를 쥐고서 한 번 더 해제술을 행했다. 두 번이나 공격당한 마도구가 흉흉한 마력을 뿜어냈다.
“아, 으윽!”
아리앨라가 피를 울컥 토하며 마도구를 떨궜다. 상체가 앞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휘아킨은 엎어지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주며 마도구를 빠르게 쥐었다. 창이 하얗게 변한 마도구가 마력의 스파크를 검게 튀기며 그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깜박이며 방어술을 행사하는 마도구의 마력이 그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연달아 이어진 해제술은 처음보다 훨씬 위력이 약했다. 십 초도 버티지 못하고 흰 창이 검게 죽었다.
여전히 휘아킨은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한 채로, 두 번째 기회마저 끝났다.
이렇게 허무하게.
그는 이를 악물고서 눈을 꽉 감았다. 허탈하게 마도구를 내려놓는 그의 손은 마력에 화상을 입었다. 얻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길게 뱉어 내는 숨소리가 거칠게 떨렸다.
진정하려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겨우 뜬 눈은 혼이 나간 듯 멍했다. 아리앨라를 소파에 눕혀 두고 치료술을 써 주는 동안 손이 연신 경련하듯 떨렸다.
마법도 엉망으로 발현되었다.
아리앨라는 간신히 피만 멎은 상태로 잠들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그는 절망에 잠긴 얼굴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오늘로 희망도 기대도 전부 꺼졌다.
이 마도구는 그에게 끝까지 어떤 기억도 선사하지 않았다.
그는 외부인이었다.
아무 관계도 없이 잘 살다가 데본시아 때문에 인생이 시궁창으로 떨어져 버린 피해자에 불과했다. 데본시아가 그의 마력을 빼앗지 않았다면 관련될 일이 없는 존재였다.
그랬기에 이 물건은 외부인인 그에게 줄 기억이 없었다. 수많은 회귀 동안 그의 정보는 이 기기에 입력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는 회귀 전의 기억을 얻을 수 없었다.
고귀한 무하의 외동아들로 행복하게 자란 기억은 사라지고, 남은 건 마저증으로 오인당해 시궁창에 처박힌 인생뿐.
그런 와중에 구원자라 여긴 애리얼과의 연결점마저도 데본시아로 인해 생겼다는 아이러니가 우스웠다.
이걸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하……. 하하하…….”
허탈함에 젖은 웃음소리를 냈다.
데본시아의 탓에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덕분에 애리얼을 만났으나, 결국은 외부인인 처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나도 안 줬잖아. 괜찮아. 안 줘도 돼.”
기대를 품고 찾아간 일 월 일 일. 그날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마저 불쑥 머리를 울렸다.
“네가 주는 거, 별로 안 가지고 싶어.”
다른 이의 생일은 일일이 챙겼으면서 그의 생일은 챙기기는커녕 그에게 선물을 받는 것도 거부했다. 데본시아는 만나러 갔으면서, 그는 만나길 거부했다.
기숙사 방에서 보았던 애리얼의 노트에도 그의 생일은 빠져 있었던가.
그녀에게는 그가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필요로 한 적 없었다.
애초에 그녀와 관련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하하하하!”
그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듯 웃었다.
이중적인 태도의 어머니, 밖으로 나돌기만 하는 아버지, 학대와 방치로만 점철된 성장기, 친구 하나 없는 좁은 인간관계, 유일한 구원이었던 애리얼과도 연결 고리가 없는 비루한 처지.
시궁쥐도 무리 지어 살지 않는가.
그런데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인 데본시아를 향한 증오만이 남았다. 분노만이 남았다.
오로지 복수만…… 남는다.
“파멸의 기원……. 아마도 그걸 원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아리앨라와 나누었던 대화가 이정표처럼 떠올랐다.
이 마도구를 버리면서까지 애리얼이 원한 물건. 파멸의 기원. 금지된 무기.
“선배님. 당신도 복수를 원하시나요?”
그가 허공을 향해 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며, 그녀의 반응을 상상하며.
데본시아가 증오스러우신가요?
죽이고 싶으신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같았다.
죽이고 싶다고 답한 것만 같았다.
그는 텅 비어 버린 눈동자로 애먼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허상을 보고 정신이 나간 듯.
“제가 이루어 드릴게요.”
웃으며 말했다.
“당신께서 바라실, 제 진짜 선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