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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53)화 (241/264)

감금된 지 이 주가 되던 날의 일이었다. 애리얼은 심하게 아팠다. 스트레스성 몸살이었다. 열이 오르고 사지가 수시로 떨렸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곧장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그녀를 돌봤다. 치료술을 써서 바로 열을 내리고, 뭉근하게 끓인 수프를 한 숟갈씩 직접 떠먹였다. 그 손길이 너무 극진하여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어 그는 애리얼의 거처도 옮겨 주었다. 애리얼은 갑갑한 격리실을 벗어나 볕이 잘 드는 황성 중앙관의 3층 객실로 이동했다. 그녀가 아픈 것이 사방이 틀어막아진 환경 탓이라고 여긴 건지.

‘웃기지도 않네.’

애리얼은 그의 그런 극진함이 우스웠다. 저를 감금하고, 저와 관련된 이를 줄줄이 인질로 잡았으면서, 제가 아픈 데에는 무척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치료술로 금세 치유되는 몸살 좀 앓는다고 이토록 배려심 넘치게 굴면서, 저를 협박하고 가두는 데는 망설이지 않는다.

제 관심을 받으려고 안달하면서도 제 감정은 철저히 무시하는 식이었다.

‘손안에 있으면 친절하게 굴겠다는 건가?’

그렇게 추측하자 이가 갈렸다.

그의 행동과 생각을 가늠할수록 열이 받았다.

하지만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애리얼은 소파에 앉아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눈앞에 환히 열린 창문이 있었지만 나갈 수 없을 것을 알았다. 시야만 탁 트였을 뿐, 그녀는 여전히 데본시아의 결계 속에 갇힌 처지였다. 족쇄는 풀렸어도 손목에는 아직 브레이슬릿이 걸려 있었다. 마력은 쓸 수 없다.

따로 부탁을 전했던 렉시우스의 소식도 몰랐다. 그와 연락할 방도도 찾지 못했다. 렉시우스에게서 거래 내용을 들은 아리앨라가 알아서 찾아와 주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뿐.

데본시아가 펼치는 배려라는 이름의 감시 아래에선 그 무엇도 시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초조하고 불편하면서도 모순적으로 안락했다.

똑똑똑.

그녀 홀로 있는 방 안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허락하자 문이 열렸다. 이곳에 찾아올 인간은 한 명밖에 없었다.

“몸은 좀 괜찮아?”

데본시아가 다정한 눈빛과 걱정 어린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뻔뻔하게 소파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괜찮아요.”

애리얼은 억지로 대답을 뱉어 냈다. 그의 치료술과 각별한 보살핌 덕분에 몸은 일찌감치 나았고, 갇힌 것만 빼면 대우도 남부럽지 않게 받고 있었다. 괜찮지 않을 리가 있나.

“곧 결혼식인데 건강해야지.”

“…….”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원하는 걸 말해 주면 더 좋고. 아프면 바로바로 나 부르고.”

“……네.”

애리얼은 여태 제 이마에 얹혀 있는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데본시아는 아쉬운 듯 손을 거두면서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정말 그녀가 걱정스럽기라도 했는지 얼굴의 음영이 짙었다. 아니면 그냥 일이 많아서일 수도 있고. 어쨌건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긴 했다.

호재였다.

애리얼은 그가 더욱더 피곤하고 힘들기를 바랐다.

그래야 틈이 생겨서 찌르기 편할 터다.

그러니까…… 더 아픈 게 좋을 거 같았다.

또다시 아프고 싶었다.

***

그녀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이틀 후의 자정. 애리얼은 불쾌할 정도로 높아진 체온을 느끼며 씨근거렸다. 식은땀에 베개가 젖었다. 더운 숨을 몰아쉬는 입술은 메말라 갈라졌다. 머릿속이 온통 흐렸다. 시야도 뿌옇게 흐렸다. 잠에 완전히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하는 감각. 몽롱하고 어지러운 상태로 몸을 웅크렸다.

스트레스성 몸살이 재발한 것이다.

렉시우스에게 휴대폰까지 주며 아리앨라와 만나길 고대했으나, 아무런 진전도 없이 여전히 갇힌 상태. 거기에 원수의 얼굴을 매일같이 보며 그 원수와의 결혼식을 무력하게 기다려야 하는 처참한 처지가 그녀에게 다시 병을 불렀다.

애리얼은 다시 찾아온 병이 기꺼웠다. 열에 젖어 쌕쌕 숨을 몰아쉬면서도 일부러 데본시아를 부르지 않고 참았다. 그래야 그가 매일 밤 제가 아프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신경을 곤두세울 테니까. 끙끙 앓고 사지를 벌벌 떨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텼다.

그렇게 얼마나 참았을까.

애리얼은 손안이 저리는 걸 느꼈다. 마력이 방출되는 곳이었다. 왜 이럴까. 일반적인 몸살과는 다른 이유가 이것 때문일까. 호기심에 마력을 방출하려고 해봤다. 그 즉시 브레이슬릿의 억제가 발동되었다. 방출되지 못한 마력이 역류해 몸속에 고였다. 그렇게 쌓인 마력이 뭉쳐 들끓는 게 느껴졌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통쾌했다. 드디어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한 병의 근원을 알아 가는 것 같았다.

분노에 가시처럼 날카로워진 마력을 켜켜이 쌓아 가며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아프면서 그를 끝없이 괴롭히다가 끝내 지쳐 버리게 만들고.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를 쏘아 죽이는 상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 아파야 했다. 스스로를 조각내야 했다.

감금당해서 발이 묶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정신이 흐리멍덩한 가운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자학하면서 복수를 꿈꾸는 애리얼은 밤새 저주를 깨쳐 가고 있었다.

***

미지근한 손이 애리얼의 이마를 덮었다. 열이 오른 머리는 적당한 체온을 지닌 손마저도 차갑게 느꼈다. 애리얼은 무의식중에 그 손을 따라가 얼굴을 비볐다.

커다란 손이 호응해 주듯 애리얼의 뺨을 감쌌다.

“아프면 바로 부르라고 했잖아…….”

갈라진 중저음으로 하는 원망이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애리얼이 가늘게 눈을 떴다.

데본시아가 조금 화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하며 느슨히 풀어진 가운. 자다가 급히 온 것인지 그의 차림새는 영 정돈되어 있지 못했다.

애리얼은 오렌지색의 스탠드 조명에 드러난 그의 모습을 천천히 훑다가 물었다.

“왜…… 왔어요?”

그것도 이 밤에, 어떻게 알고.

짧은 질문에 함축된 의미를 눈치챈 그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네 손목에 채운 브레이슬릿이 그냥 마력을 막는 용도이기만 할 것 같아?”

“브레이슬릿으로 알고 오셨다는 건가요?”

“그래. 내 마력과 연결된 거니까, 그걸로 비정상적인 마력의 흐름을 다 알 수 있어.”

“그래서 이 밤에…… 찾아오신 거예요? 브레이슬릿으로 느껴지는 제 마력이 이상하니까?”

“응.”

데본시아가 애리얼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치료술을 썼다.

서서히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머리를 흐릿하게 하던 아픔이 가셨다. 고통에 시달리느라 지쳐 있던 애리얼은 지끈거리던 통증이 사라지자마자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 한숨은 안도의 표현이었을까, 착잡함의 토로였을까.

의식이 빠르게 멀어졌다.

더 생각할 수도 없이 애리얼은 깊은 잠에 빠졌다.

***

데본시아는 애리얼이 잠든 침실의 소파에 앉아 나른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애리얼이 제 마력을 이용해서 자해하고 스스로를 저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수없는 회귀에서 그녀는 꽤 자주 그런 짓을 했다. 이번처럼 그에게 붙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감금당했을 때, 그녀는 최후의 수단처럼 제 몸속에 있는 마력을 사용해 자해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엘릭서를 준비했다.

치료술만으론 한계가 있기에, 엘릭서를 써서 자학적으로 변한 그녀의 마력을 안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일시적인 효과겠지만 그녀가 자해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벌 수는 있다는 게 컸다.

상시 치료 효과를 발휘할 새 마도구가 완성될 때까지만 엘릭서로 버티면 된다.

그 전에 그녀가 제게 마음을 열어 준다면 더 좋겠지만…….

“불가능하겠지?”

허탈함에 터진 씁쓸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걸렸다.

이미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데, 감정이 죽질 않아서 고통스러웠다.

아픈 그녀를 보는 건 늘 죽도록 힘들었다.

발작하는 가슴을 부여잡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다간 심장이 터져 죽고 말 것 같았다.

‘그러면 오히려 넌 기뻐할까…….’

그의 두 눈이 애리얼이 누운 침대로 향했다. 자그마한 곡선을 그리는 이불의 둔덕. 그것만 보아도 좋다고 설레 오는 가슴이 우스웠다.

가만히 집요한 눈길로 애리얼을 응시하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침대로 향해 몸을 숙이고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잠든 그녀의 얼굴. 어지러이 흘러내린 흑발을 살며시 정리해 주다 조심스레 침대로 올랐다. 이불에 덮인 그녀를 감싸 안으며 옆자리를 차지하고 누웠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잠시 얼굴만 보다가 가려고 했는데.

손을 댄 순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를 끌어안고서 누웠다.

졸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잠들고 싶지도 않았다.

부드러운 흑발이 그의 손에 감겼다. 자그마한 몸이 그의 품으로 들어와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감각을 내버려 두고 어떻게 잠들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많은 회귀를 했어도 이런 순간이 거의 없었기에, 그는 더 느끼고 싶었다. 그녀가 편안하게 자신의 팔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순간을…… 조금 더.

“애리얼…….”

깊게 잠든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붙이며 팔에 힘을 주었다. 식은땀에 젖은 피부의 감촉이 그에게 전율을 선사했다.

징그럽게 굶어 고통스럽게 결핍된 마음이 순간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

데본시아가 애리얼을 품에 안고서 눈을 감았을 때, 레이신은 차가운 독방에서 눈을 떴다.

한기가 느껴지는 얇은 매트리스와 철제 침대. 희미한 피 냄새. 창문이 없는 벽.

노란 눈동자로 찬찬히 주변을 뜯어보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복부에 급작스러운 통증이 일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통증의 중심부를 확인했다. 왼쪽 아랫배였다. 공격술에 찢어진 상처가 오래 방치되어 곪은 상태였다. 마력이 약하거나 없는 일반인이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처다.

그런데 이 상태로 그냥 독방에 내버려 두다니.

애리얼을 막지 못한 탓에 이런 취급을 당한 건가.

그래도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니 데본시아가 애리얼의 자살을 어떻게든 막은 모양이었다. 애리얼이 죽었다면 침대 딸린 독방이 아닌 고문실에서 사지가 잘린 채 깨어났을 것이다.

레이신은 눈살도 찌푸리지 않고 순순히 수긍하며 치료술을 썼다. 기절이 길었던 탓일까. 체력은 떨어졌어도 마력은 충만했다. 그 덕분에 서투른 치료술로도 그럭저럭 상처를 치유했다.

고통이 적당히 사그라지자 그는 곧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좁은 방의 출구는 두꺼운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부숴 버릴까.

잠깐의 고민을 한 그는 이윽고 부수는 것보다 좀 더 온화한 방법을 택했다. 순간 이동. 그는 치료술만큼 서투른 그 마법을 써서 방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이동 거리가 짧아 마력의 과부하가 오지는 않았다.

레이신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쥐 죽은 듯 고요하며 어두운 사위. 독방처럼 창문이 없는 기다란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 걷다 보면 어떻게든 나갈 수 있겠지.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대충 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쿵! 쿠웅!

단단한 걸 사정없이 들이받는 소음이 그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가 선 장소에서 뒤로 약 십 미터 거리에 그가 나온 방의 출입문과 똑같은 문이 보였다. 두꺼운 철문에서 쿵쿵 소리가 나고 있었다.

무식하게 저걸 몸으로 부수려는 건가.

레이신은 호기심에 철문으로 향했다.

쿵! 쿵! 쿠웅!

규칙적인 듯하다가도 불규칙하게 어긋나는 소음이 복도를 시끄럽게 울려 댔다.

누가 있기에 저리도 요란한가.

적어도 차분한 상태는 결코 아닌 듯했다.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제 신원을 파악할 빌미를 주고 싶지는 않으니 말로 하긴 싫고,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레이신이 무감정한 얼굴로 문을 세게 쾅 찼다.

그러자 문안에서 울리던 소음이 멈췄다.

그러더니 얼마 후, 쾅!

맞받아치듯 철문을 발로 차는 굉음이 울렸다.

익숙한 성질머리에 레이신은 안쪽에 갇힌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앞뒤 안 가리고 감정적으로 받아치는 발길질. 이건 특정 순간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지는 렉시우스가 보일 판단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인물은 하나.

“살아 있었나…….”

놀라워하며, 그는 갇힌 친우를 보기 위해 순간 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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