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갇혀 있던 곳과 같은 하얀 밀실. 창문 하나 없는 열악한 독방에 어울리지 않는 금발이 보였다.
문을 노려보던 스카이라가 마력을 느끼고 몸을 휙 돌려 레이신과 마주했다.
“너.”
파란 불꽃처럼 이글대는 눈동자가 레이신을 쏘아보았다.
레이신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 그는 얼굴에 피딱지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양손도 걸레짝처럼 찢어져 피를 뚝뚝 흘렸고, 온몸이 다 오래 곪은 상처투성이였다. 양쪽 손목에 전부 브레이슬릿이 걸려 있는 걸 보니 방어술과 공격술을 모조리 제한당해 힘으로라도 문을 부수려고 한 모양이었다.
레이신은 저도 모르게 혀를 쯧 찼다.
그에 스카이라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네 꼴도 한심하거든?”
“…….”
“구경하러 왔어?”
“데본시아가 왜 널 살려 둔 걸까.”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
“하……. 당연히 인질로 쓰려고 살려 둔 거겠지.”
스카이라가 한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이걸 일일이 설명해 주는 내 처지가 참…….”
자조 섞인 한탄이 따라붙었다.
레이신은 검은 브레이슬릿이 걸린 스카이라의 손목을 보다가 미간을 구겼다. 왜 스카이라에게만 구속구를 걸어 두고 저는 그대로 둔 걸까. 같은 편이라는 건가. 아니면 제가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 않았다.
그저 애리얼이 자살하지 않기를 원해서 더 효율적인 선택을 했을 뿐인데. 딱히 데본시아와 한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리얼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편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할 예정이었다. 다만 그 대전제는 그녀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면 자살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 내 앞에서 고해하는 거야?”
스카이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돌연 레이신이 뭔가를 깨달은 눈으로 스카이라를 보았다.
“그러네.”
“뭐가?”
“고해. 난 그걸 애리얼의 앞에서 하고 싶었던 것 같아.”
“…….”
“미안하다고 하고, 애리얼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
“나도 인질이 되고 싶어.”
“병…….”
튀어나오려던 욕을 간신히 끊어 낸 스카이라가 구겨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쏘아붙였다.
“데본시아, 그 새끼가 너랑 애리얼을 만나게 해 줄 것 같아?”
“…….”
“못 믿겠으면 애리얼한테 한번 가 봐.”
***
깊게 잠들었다 일어난 애리얼은 저를 결박하듯 안고 있는 데본시아를 보고서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데본시아는 자는 척 감았던 눈을 뜨며 웃었다.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악몽 그 자체인 남자가 간드러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애리얼은 소름이 끼쳐서 몸서리를 치듯 떨었다.
데본시아가 그 떨림을 느끼고서 그녀를 달래듯 토닥였다.
“쉬이, 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겁내지 마.”
등을 두드리고 자상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정한 연인인 양 몹시 가증스럽게. 유일한 구원인 양 오만하게.
괜찮다고…….
그녀가 괜찮지 못한 이유를 전부 제공한 악몽이 구원자 행세를 한다.
열이 들끓는다. 복수를 다짐하며 냉정해지라고 되뇌었던 이성도 제 역할을 못 했다.
괜찮다고? 괜찮지 못하게 만든 게 누군데?
애리얼은 눈이 뒤집힐 것만 같은 분노와 거부감에 바르작댔다.
“이거 놔……!”
“괜찮아, 애리얼. 괜찮…….”
“그만해! 놔!”
겨우 떨어졌던 애리얼의 체온이 다시 높아졌다. 발작과도 같이 마력이 끓어 폭주했다. 자학으로 몸살이 곧장 재발한다.
데본시아가 즉시 치료술을 사용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애리얼이 끙끙 앓으며 그의 품속에서 몸부림쳤다.
데본시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남김없이 지워졌다. 처참하게 일그러트린 낯으로 애리얼을 찍어 누른 그가 벽면에 박힌 호출 벨을 눌러 시에나를 불렀다.
이윽고,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자마자 그가 고함을 쳤다.
“엘릭서 가지고 와!”
불호령 같은 명령에 시에나가 급히 복도를 뛰어갔다.
***
애리얼의 간헐적인 비명과 데본시아의 화난 음성.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음.
문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는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파국인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레이신은 엘릭서를 가지러 뛰어간 시녀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은밀히 뒤를 밟아 이곳까지 왔다. 데본시아도 시녀도 급작스러운 상황에 경황이 없어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조용히 몸을 숨긴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문 너머의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애리얼의 절규하는 음성이 그의 가슴을 할퀴었다.
이러려고 데본시아를 도운 게 아니었다. 절대 이러려던 게…….
정말 이럴 줄 몰랐나?
깊게 침전한 본능이 문득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애초에 애리얼이 중정에 감금되어 있는 걸 알고도 데본시아를 도운 게 아닌가.
그녀가 살길 바라서.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끔찍한 지옥이더라도…… 이 세계에 같이 있었으면 하니까.
갑작스럽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는 드디어 제가 가진 감정의 밑바닥을 마주했다.
그녀의 비명을 들으면서 후회하는 동시에 후회하지 않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낀다.
애리얼에게 느끼던 설렘의 본질은 이토록 질척하고 이기적인 감정이었구나.
이어지던 비명이 갑작스럽게 멎었다.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고, 데본시아가 나왔다. 그가 벽에 기대선 레이신을 태연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 왔어.”
“십 분 전에.”
“숨는 실력 하나는 뛰어나네.”
“…….”
“독방에서는 언제 나왔어.”
“한 시간 전에.”
“그럼 옷 좀 달라고 하지. 네가 그러고 다니면 무슨 소문이 나겠어.”
데본시아는 상의조차 입지 않은 레이신을 훑으며 손을 까딱거려 시에나를 불렀다. 그녀가 빈 엘릭서 병을 회수한 상자를 안고서 달려왔다.
“시에나, 공자에게 방을 안내해…….”
“데브.”
레이신이 데본시아의 말을 끊었다. 잘 부르지 않던 애칭까지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데본시아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그를 보았다.
레이신은 데본시아의 피부 아래까지 뜯어볼 기세로 형형한 눈동자를 하고서 물었다.
“후회해?”
“아니.”
데본시아가 즉답했다. 후회라는 걸 할 양심 있는 놈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너는?”
이번에는 데본시아가 형형한 눈빛을 하고서 물었다. 레이신과 달리 약간의 웃음기를 띤 얼굴이 사악했다.
“후회하니?”
“……아니.”
레이신이 답했다.
애리얼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단지, 레이신은 어떻게 하면 애리얼이 행복할지를 모를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살리는 것에만 매달린다.
이걸 애정이라고 해도 될까.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
데본시아는 아주 빠르게 국혼의 준비를 진행했다.
식을 올리는 날짜는 3월 15일.
애리얼에게 엘릭서를 쓰고 난 날로부터 고작 일주일 후였다.
엘릭서를 주사당하고 마력이 강제로 안정화된 애리얼은 망연자실했다. 이젠 마력으로 자해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렉시우스나 아리앨라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데본시아가 미리 알고 막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이래서 과연 복수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데본시아의 감시가 너무 철저한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뭐라도 하려고 하면 브레이슬릿이 요동치며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데본시아가 찾아와 그녀와 시간을 보냈다. 그녀와 한방에 눌러앉아, 몇 시간이고 함께했다. 일감을 가져와서 해 뜰 때부터 해 질 녘까지 그녀의 방에 머무른 적도 있었다.
마치 그녀를 감화시키려는 듯이. 제게 익숙해지도록 조련하듯이.
그리하여 그를 혐오스러워하는 그녀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있도록.
“왜 저하고 결혼이 하고 싶은 거예요?”
애리얼이 문득 짜증이 나서 물었다.
소파에서 결재한 안건들을 훑던 데본시아가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앉은 애리얼이 무표정한 낯으로 그와 눈을 맞췄다.
그는 조금 놀란 눈치로 그녀를 보다가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널 사랑하니까.”
“그러면 정부로 두든지 하면 되잖아요. 왜 국혼 같은 귀찮은 짓을 해요?”
“……질문이 이상하네. 사랑하니까 정부로 두고 싶지 않은 건데.”
“그냥 정부로만 둬도 당신이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잖아요.”
그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유일한 옆자리에 너를 앉히고 싶고, 가장 고귀한 대접을 받게 해 주고 싶고. 그런데 널 어떻게 정부로 둬.”
“그러니까…… 절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은 거라고요? 사랑이 이유라고요?”
“응. 사랑해, 엘.”
그가 생긋 미소 지으며 고백했다. 멋대로 지은 애칭을 부르며 뺨을 발긋하게 물들였다. 수줍게 웃는 얼굴이 탁월하게 아름다웠다.
누가 그 얼굴을 보고 모진 말을 뱉을 수 있을까.
애리얼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싫어요. 죽었으면 좋겠어요.”
싸늘하게 내뱉은 말에 그의 얼굴이 슬며시 굳었다.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이런 말을 들으면 상처를 받나 보지? 너무 같잖아서 비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정부이고 싶어요. 국혼을 취소해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데본시아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비수를 꽂아 대는 그녀의 턱을 감싸 쥐고서 상체를 숙였다. 가까이 눈을 맞추고서 조용히 진심을 전했다.
“난 너를 정부로 둘 수 없어. 넌 황후가 될 거야.”
“…….”
“내 옆은 네 거야, 애리얼. 내 사랑.”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며 다가가 애리얼에게 입술을 붙였다. 말랑한 감촉이 살며시 스치자마자 그녀가 홱 얼굴을 돌리며 그를 밀어냈다.
데본시아는 순순히 밀려나 주며 나긋하게 말했다.
“내일은 이러면 안 돼, 엘.”
내일. 지척으로 다가온 결혼식 날짜가 애리얼의 숨통을 졸랐다.
그의 뜻대로 그의 황후로서 그의 옆에 서는 날.
애리얼은 교수형 날짜를 들은 것처럼 안색이 나빴다. 저도 모르게 브레이슬릿이 걸린 오른 손목을 긁어 대다가 데본시아에게 저지당했다. 그녀의 오른손을 꽉 움킨 그가 조곤조곤 회유를 시작했다.
“너를 위해서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뭐든 해 줄 수 있어.”
“…….”
“네가 나에게 바라기만 한다면, 나를 선택하기만 한다면, 너는 전부 가질 수 있어.”
“…….”
“그러니까 이제 그만 포기하자, 응?”
그의 팔이 그녀를 감싸 당겼다.
“사랑해. 사랑해, 엘. 애리얼. 나의 황후.”
데본시아가 그녀를 품에 안고서 어르고 달래듯이 연신 부드럽게 불렀다.
그가 부를수록 애리얼의 흑연색 눈동자는 초점 없이 꺼져 갔다.
엘. 애리얼. 황후. 사랑해.
같은 단어들이 그녀를 세뇌하려는 기세로 수없이 반복되었다.
***
결혼식은 축복의 날이었다.
그것도 황제의 국혼이라면 제국적 경사이다.
이번 황제의 국혼은 선황의 결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심혈을 기울였다. 제국민들에게도 국혼의 기념으로 갖은 재물이 내려졌다. 부드러운 옷감, 최고급의 설탕과 소금, 흰 빵과 고기, 포도주까지 잔뜩 하사받으며 제국민들은 외쳤다.
이런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을 존귀한 황후는 얼마나 행복하실까. 모두가 그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정작 그 황후는 식장에서 목을 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