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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56)화 (244/264)

“불편하신 건 없으신가요?”

방을 촘촘히 훑은 시녀가 애리얼을 향해 물었다. 공손한 말투 아래 숨은 의심이 느껴졌다.

애리얼은 냉정한 태도를 보이며 시녀와 눈을 맞추었다.

“없어.”

단호한 대답에 시녀는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식은 한 시간 후에 거행될 예정이오니, 그 전까지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녀가 연신 짧고 단호하게 대꾸하자 시녀는 의심의 기색을 거둔 채 조용히 물러났다. 황후로서 모셔야 할 이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애리얼은 초연한 표정을 가장한 채 머리를 굴렸다.

무기는 손에 들어왔다. 중요한 건 이제 브레이슬릿을 어떻게 풀까 하는 것.

한 시간 후면 대기실을 나가 웨딩 로드를 걸어야 했으므로,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데본시아는 그녀가 가진 소환진을 금방 눈치챌 것이다. 그와 마주하기 전에 브레이슬릿을 풀고 무기를 소환해야 했다.

‘브레이슬릿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날 보호하는 동시에 내가 마력을 쓰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물건…….’

신체적인 힘이나 물리력, 마법 등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이걸 부술 수 없다.

게다가 현재의 브레이슬릿은 전에 꼈던 브레이슬릿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졌다. 당연히 억제력도 훨씬 더 강했다. 그때는 마력을 흡수하는 것만 제재당했다면 지금은 아예 마력의 사용 자체를 제재당했으니 말이다.

전처럼 과하게 마력을 방사하여 브레이슬릿을 부수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걸 부수려면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일반적인 힘의 논리에 지배받지 않는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파괴의 집행.

애리얼은 그런 힘을 가진 것을 딱 하나 알고 있었다.

솔렘의 증표를 주는 대가로 레이신이 가져오라고 했던 물건.

레이신의 목소리가 생생히 떠올랐다.

“근원 소멸기를 썼어.”

그걸로 그는 렉시우스의 결계를 부수었고, 마수도 죽였다.

근원 소멸기.

그거면 브레이슬릿을 부술 수 있다.

문제는 근원 소멸기의 위치다.

애리얼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대략 일 년 반 전, 애리얼은 레이신의 부탁을 받아 데본시아에게서 근원 소멸기를 빌렸다. 그 후 레이신의 손으로 넘어간 근원 소멸기는 솔렘의 시험이 끝난 후 다시 애리얼에게 돌아왔고, 그걸 렉시우스가 대신 반납해 주겠다며 황성으로 가지고 갔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아는 근원 소멸기의 행방이었다.

그때 렉시우스가 제대로 반납했다면 근원 소멸기는 이곳 황성에 있을 터.

그렇다면 데본시아가 제게 올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지금, 움직여야 한다.

“……애리얼 허클리.”

애리얼은 소환진을 쥐고서 조용히 제 이름을 외었다. 제비나비가 새겨진 자그마한 철판이 마력을 뿜어내며 모양을 바꾸었다. 종이보다 조금 두꺼운 정도에 불과하던 것이 빠르게 부피를 키우더니, 이윽고 그녀가 아는 형태로 손안에 쥐어졌다. 애리얼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제야 시녀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채고 애리얼에게로 다가섰다.

“무슨 일…….”

다급히 다가온 시녀의 말이 끊어졌다.

애리얼이 시녀의 미간에 은색의 피스톨을 겨누었다. 저격 총은 들기가 불편하기에 빠르게 다이얼을 돌려 바꾼 형태를 바꾼 뒤였다. 브레이슬릿 탓에 마력을 쓰지 못해서 빈총이기는 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시녀는 몹시 당황해하는 낯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물러나는 시녀를 따라 애리얼이 몸을 일으켰다.

시녀의 눈이 빠르게 전화기를 향했다.

그러자 애리얼이 으름장을 놓았다.

“지금부터 그 누구에게든 연락하려 하면 난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길 거야.”

“황후 폐…….”

“대답은 묻는 말에만.”

눈치 빠른 황제의 시녀는 빠르게 입을 닫았다. 표정이 차분히 정리되었다.

애리얼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시녀에게 다가갔다. 시녀는 다가오는 총구에 엉거주춤 물러나다가 문에 등을 부딪쳤다.

“근원 소멸기가 필요해.”

근원 소멸기라는 말에도 시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숙달된 황제의 수족답게 평정을 유지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근원 소멸기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근원 소멸기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 황제가 마도구를 보관해 두는 금고로 안내해.”

“송구하오나 저는 황제 폐하의 금고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메이지 에프론. 황제의 세 수족 중 한 명. 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움직이며 극비리 업무를 주로 수행하는 자. 그런 네가 금고 위치를 모를 수 있어?”

그녀의 신원 정보를 줄줄이 말하자 그제야 태연자약하던 시녀의 얼굴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미카엘, 시에나, 메이지. 데본시아가 신뢰하는 세 명의 수족. 그중에서도 메이지로 불리는 이 시녀는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면에서 활동하는 이였다.

그래서 메이지는 애리얼이 제 신원을 알고 있을 줄 몰랐다. 지금껏 애리얼의 앞에 제대로 나타난 적이 없었으니까.

메이지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애리얼도 기억이 없었다면 그녀의 이름은 당연하고 얼굴도 몰랐으리라. 하지만 애리얼에겐 회귀 전의 기억이 있었다. 그 수없이 반복된 과거에서 메이지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과거에도 감금당한 이후에 그녀를 감시하는 것은 늘 이 시녀였다. 은밀히 활동하는 만큼 데본시아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수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근원 소멸기가 황성에 있다면, 이 시녀는 그 위치를 알고 있으리라.

“안내해, 메이지.”

시녀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바뀌었다. 데본시아의 수족답게 눈치가 빠른 그녀는 애리얼에게 타협의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읽었다. 그러니 괜히 모르는 체하는 것은 더 효과가 나쁠 것이다.

“알겠습니다.”

메이지는 우선 고개를 끄덕이고서 문고리를 돌렸다. 미간에 겨눠진 총이 위협적이었다.

마력이 없는 메이지는 애리얼이 든 총이 파멸의 기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저 총으로 말미암아 애리얼에게 협력하는 자가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삼엄한 황성의 보안 체계를 뚫고 저 총을 건넬 정도로 유능하며 강한 협력자.

‘누구지?’

황자와 크레시앙 공자는 오늘 아침까지도 독방에 있다가 방금 감시를 붙여 응접실로 보냈고, 솔렘 공자는 황제 쪽에 선 상태이다. 클라우스 백작 역시 황제 쪽의 인물이었고, 허클리 백작은 어제까지 독방에 있었다. 게다가 허클리 백작은 황제의 직인이 찍힌 종이까지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남은 건 샤펠과 무하.’

일전에도 애리얼 허클리를 도왔던 아나스타샤 샤펠이나 애리얼 허클리와 룸메이트를 지냈던 휘아킨 무하가 협력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혹은 의외의 협력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걸 알아내야 했다.

달칵, 문이 열렸다. 애리얼은 메이지를 돌려세우고 그녀의 허리춤에 총구를 댔다.

복도는 조용했다. 신부의 모습을 보는 이가 거의 없도록 최소한의 호위까지 물린 데본시아의 질투심 덕분이었다.

메이지는 빈 복도를 앞장서서 나아가며 우선은 순종적으로 굴었다. 협력자의 존재를 눈치챈 이상 그 혹은 그들의 신원을 밝혀내야 했다. 황제께서도 이러기를 바라실 터.

그러니 그 전까지는 애리얼의 요구를 맞춰 주는 게 좋았다. 금고까지는 인도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허클리 공녀는 브레이슬릿을 차고 있어서 마력을 쓸 수 없으므로, 금고를 부술 힘이 없다. 그런데도 현재 그녀가 협박까지 하며 근원 소멸기의 위치를 요구하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일 터. 아마도 금고까지 그녀를 데려가면 그녀의 협력자가 나타나겠지. 그런 추측이 선다.

그에 대해서는 애리얼도 짐작한 바였다.

총을 보인 시점에서 이 눈치 빠른 시녀는 제가 협력자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알아챘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저를 금고까지 데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협력자의 신원을 밝히고자 할 것이다. 브레이슬릿에 마력을 제한당하는 제가 혼자 움직일 리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하지만 여기, 메이지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바로 극한까지 몰린 애리얼의 심리 상태이다. 우울과 절망감, 복수심 등에 시달린 애리얼은 냉정한 판단보다는 순간순간의 기회를 우선시했다.

일단 금고까지 가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고, 그게 다였다.

나머지는 금고에 도달해서 생각할 예정이었다.

적어도 대기실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데본시아에게 소환진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이러는 게 나았으니까.

남관의 조용한 복도만 골라 빠져나간 메이지는 침착하게 애리얼을 중앙관으로 인도했다.

국혼으로 인해 인원이 남관에 모인 탓인지 중앙관은 매우 조용했다. 약 두 달 전, 애리얼이 도망쳤던 연회 날이 떠오르는 적막함이었다. 그때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번은 달라야 했다. 다르길 바랐다.

두꺼운 벨벳이 깔린 바닥을 밟으며 내밀한 곳으로 진입한다.

메이지는 황제의 침실을 지나 복도 끝으로 향했다. 새하얀 벽이 앞을 가로막을 때까지 직진하여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벽면에 그녀의 손이 닿자 독수리 모양의 술식이 나타났다.

[승인 완료]

흰 벽에 글자가 떠오르더니 슬라이딩 도어처럼 반으로 갈라져 길을 냈다. 깊은 안쪽으로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메이지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애리얼은 총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뒤따랐다.

한 명이 간신히 지날 정도로 좁은 복도가 삼십 미터는 이어지다가 길쭉한 문이 나타났다. 메이지가 그 문으로 손을 뻗었다.

문 위로 아까 벽에서 봤던 독수리 모양의 술식이 떠올랐다.

[승인 완료 - 메이지 에프론]

시녀의 이름이 떠오르고 문이 열렸다. 좁은 복도와는 판이한 어마어마하게 넓은 공간이 이질적으로 펼쳐졌다.

백색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광장과도 같은 원형의 공간. 그 공간을 빙 둘러 가며 가득 채운 백색의 서랍장들.

이 가운데 어딘가 근원 소멸기가 있다.

애리얼의 눈이 바삐 움직여 주변을 관찰했다. 서랍장의 서랍 크기는 각기 달랐으며, 각각 문자와 숫자가 쓰인 다이얼을 지니고 있었다. 서랍마다 비밀번호가 있으며, 그 번호가 각기 다 다르다는 의미였다.

메이지 정도 되는 이라면 아마 이 번호를 다 외우고 있겠지. 근원 소멸기가 어디에 들었는지도 정확히 알 것이다.

애리얼은 싸늘히 명령했다.

“근원 소멸기를 꺼내.”

“송구하오나 저도 그 위치까지는 모릅니다, 황후 폐하.”

“전에 데본시아에게 부탁했을 때 그의 보좌관이 직접 근원 소멸기를 찾아왔어. 그런데 네가 모를 리가 없어, 메이지.”

황제의 이름까지 부르며 명령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메이지는 곤란해 입술을 깨물었다.

근원 소멸기는 가장 최근에 다시 이 금고로 돌아온 물건으로, 황제가 렉시우스 크레시앙으로부터 탈취한 것을 메이지 본인이 직접 수납한 물건이었다. 당연히 메이지는 근원 소멸기의 위치도, 그리고 그걸 보관 중인 서랍의 비밀번호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계속 그녀의 명령에 저항해야 할까, 아니면 따라야 할까.

애리얼 허클리의 협조자는 그녀가 근원 소멸기를 획득하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뭔가를 탈취할 때 물건의 정확한 소재를 파악하고서 움직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메이지는 고민 끝에 걸음을 옮겼다. 원형으로 늘어선 서랍장 중 문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열한 번째. 육 열 사 행째의 가로로 가늘고 긴 서랍. 거기에서 근원 소멸기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물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애리얼의 눈이 번뜩였다. 저 안에 근원 소멸기가 있다.

이와 같은 근원 소멸기의 특성 때문에 메이지는 애리얼에게 근원 소멸기의 위치를 속이지 못했다.

애리얼은 그 서랍의 다이얼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열어.”

메이지는 침묵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열어.”

애리얼이 그녀의 허리춤에 총구를 누르며 명령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메이지는 꿈쩍하지 않았다. 뭔가를 헤아리듯 잠자코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담담히 거절을 뱉은 메이지가 제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움직이지 마!”

애리얼이 반응해 소리쳤으나 메이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 속의 호출 벨을 쥐었다.

“움직이지 말…….”

“당신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한 성격이 못 돼요.”

메이지의 판단은 정확했다. 애리얼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마력을 쓸 수 있었어도 이 시녀를 죽이지는 못했으리라.

“이곳까지 당신을 모셔 온 것도…… 솔직히 당신에게 협력하는 인간을 색출해 보려고 한 건데, 아무래도 제 판단이 틀렸던 거 같네요.”

“…….”

“아마도 당신의 협력자는 당신께 총을 건네는 것까지만 행동하고, 이렇게 총을 겨누고 저를 협박한 건 온전히 당신의 판단이라 보입니다.”

황제의 수족다운 판단력이었다.

메이지는 어느새 몸을 돌린 채 애리얼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애리얼의 총구는 여전히 메이지를 겨누고 있었지만, 메이지는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황제의 시녀는 곤란해하는 애리얼의 얼굴을 보며 호출 벨을 눌렀다. 황성의 기사를 부르는 벨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더 진노하시기 전에 당신을 다시 대기실로 데려가야겠습니다, 황후 폐하.”

“누구 마음대로.”

소년의 싸늘한 미성이 애리얼 대신 메이지에게 반박을 가했다.

메이지가 목소리에 반응해 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늦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자에 의해 메이지의 팔이 비틀어 꺾였다. 주머니에 있던 호출 벨이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아……. 이미 눌렸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작게 났다.

애리얼은 메이지의 옆으로 등장한 새하얀 은발을 보고서 당황하여 빠르게 총구를 내렸다.

“휘아킨……?”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님의 협력자입니다. 늦어서 미안해요.”

휘아킨이 태연한 낯으로 메이지의 손목을 꺾은 채 자신을 협력자라 소개했다.

그러자 메이지가 험악하게 눈을 치뜨며 소리쳤다.

“이 반역자가! 감히 황후 폐하께……!”

반역자?

애리얼이 의아함을 느끼며 눈을 동그랗게 뜬 사이였다. 휘아킨이 메이지의 머리채를 붙잡아 뒤로 꺾었다.

“좆같게 황후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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