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아킨이 비아냥거리자 메이지가 분노해 소리를 질렀다.
“반역자 주제에 감히 누구를 넘보느냐!”
“반역자니까 넘보는 거지. 진짜 뭐라는 거야.”
“건방진 놈! 네가 감히…….”
“반역자 신세는 고달프네. 고작 일개 시녀한테서 욕이나 들어야 하고.”
하소연하며 휘아킨은 메이지에게 강력한 세뇌를 걸었다. 사납던 메이지의 두 눈이 초점을 잃고 흐릿해졌다.
휘아킨은 메이지의 동공을 확인하고는 쥐었던 머리채를 놓았다. 메이지는 인형처럼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혼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거 열어.”
휘아킨이 명령하자 메이지는 기계처럼 움직여 서랍의 다이얼을 돌렸다. 달칵, 소리를 내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메이지가 손잡이를 쥐고 서랍을 빼내자 하얀 천 위에 놓인 근원 소멸기가 드러났다.
휘아킨은 망설임 없이 근원 소멸기를 들어 애리얼에게 건넸다.
지금껏 정신을 빼고 있던 애리얼이 뒤늦게 의문을 느꼈다. 은색 금속판에 그려져 있던 제비나비. 아무리 아리앨라여도 무하 공작가의 상징이 그려진 물건을 함부로 전할 수는 없다. 당연히 공작가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리라. 애리얼은 그게 무하 공작이라고 생각했었다.
“설마…… 아리앨라에게 소환진을 준 게 너였어?”
“네.”
휘아킨은 무덤덤하게 긍정하며 애리얼의 손에 근원 소멸기를 쥐여 주었다.
“제가 마력이 모자라서 구속구까지는 못 깨 드리겠네요.”
“그건 내가 할게. 고마워. 그런데…….”
“선배님.”
휘아킨이 질문을 꺼내려던 애리얼의 말문을 막았다. 애리얼이 의아해하며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애리얼의 손목을 붙잡았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실례 좀 할게요.”
시야가 전환되었다.
익숙한 형태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애리얼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줄곧 기다렸던 신부 대기실이었다.
“순간 이동…….”
“어지럽진 않죠?”
휘아킨이 넌지시 물었다.
애리얼은 놀란 얼굴로 황급히 그의 손을 살폈다. 메이지에게 세뇌를 건 건 마도구의 힘이라 여겼는데, 순간 이동까지는 그렇게 치부할 수 없었다. 순간 이동은 마도구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위 술식이었다.
분명 반지를 빼앗겼는데 어떻게 순간 이동을 했을까.
휘아킨이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채고서 그녀의 앞으로 가만히 양손을 내밀었다.
그의 열 손가락은 당연하게도 모두 비어 있었다.
“어떻게…….”
“마력을 되찾았거든요.”
그의 대답에 애리얼은 놀라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표정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잿빛에서 은빛으로 환해진 눈동자가 보였다. 무하 공작과 같은, 고고하고 선명한 빛깔이었다. 원래 이 색을 타고나야 했었다는 듯.
“어떻게?”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같은 말로 물었다.
“빼앗긴 걸 다시 찾은 것뿐이에요. 설명하자면 길고, 그리 재밌지도 않을 테니까 일일이 설명하진 않을게요.”
그의 대답에 애리얼은 의문이 더 짙어진 표정을 지었다.
“빼앗기다니, 누구에게?”
재차 질문을 던지자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에 들린 근원 소멸기를 톡 건드렸다.
“선배님의 적에게서.”
“…….”
“그러니 우린 같은 적을 둔 거네요?”
그가 말했다.
그래서 그가 제게 무기를 제공한 건가 싶었다. 어쨌건 고마운 일이었다.
“고마워. 복수할 수 있게 해 줘서.”
애리얼은 근원 소멸기를 들고서 브레이슬릿의 한 지점을 쿡 찍었다. 지긋지긋한 검은색의 고리가 한 방에 재처럼 파사삭 부서졌다. 운 좋게도 단번에 중심을 맞춰 찔렀다. 구속구가 풀리고, 맨손목이 드러났다. 마력이 한 번 훅 빠져나갔다가 다시 충만하게 차올랐다.
애리얼은 마력이 떨어졌다가 다시 채워지는 느낌이 근원 소멸기의 대가 청산 탓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구속구가 해제되면서 느끼는 해방감이라고 여겼다. 피를 흘리기는커녕 미약한 불편함조차 느끼지 않은 애리얼이 근원 소멸기를 주변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근원 소멸기는 분명 강력한 무기였으나, 쓸 때 느끼는 서늘함이 영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 쥐고 있기 싫었다. 어차피 무기는 파멸의 기원만으로도 충분했고.
그 광경을 휘아킨이 놀란 얼굴로 살폈다.
“선배님, 괜찮아요?”
“응. ……괜찮으면 안 되는 건가?”
태연히 대답하는 애리얼은 의아함까지 슬쩍 내비칠 정도로 멀쩡했다.
휘아킨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를 보았다.
황태자가 만든 마력 제어 구속구라면 아무리 못해도 신성 3계 술식에 가까운 위력일 텐데 저러고 멀쩡할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도 데본시아의 술식을 파괴하고서 죽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대단한 마력량이었다. 아카데미 때 그녀의 마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대강 파악하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마력의 불균형에 시달려 재능이 반토막 나다니.
데본시아, 그놈도 참 어지간한 재능이었다.
그러니 부모까지 죽이고 황제가 되어서 제 동생이고 친우고 다 독방에 가둬 처넣었겠지. 애리얼을 강제로 황후 자리에 세웠겠지.
그녀의 재능을 묶어 두고, 추를 달아 날아가지 못하도록.
휘아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애리얼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왜 웃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냥…… 쓰레기끼리는 닮는 건가 싶어서요.”
휘아킨이 의미심장한 소리를 답변으로 내놓았다.
애리얼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다가 이내 관심을 껐다. 지금 그녀에게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 더 중요했다. 피스톨의 형태를 한 파멸의 기원을 꽉 쥐고서 마력을 순환시켰다. 천천히 마력을 채워 넣으며 총구에 달린 마력 조절기를 제거했다.
조용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휘아킨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선배님…….”
똑똑똑.
노크 소리에 그의 말이 가려졌다.
애리얼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휘아킨은 앞으로의 일을 직감한 듯 무덤덤하게 허공을 보았다.
“애리얼?”
데본시아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애리얼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끼우고 문을 조준했다.
“네.”
“본식이 얼마 남지 않아서 와 봤어. 어디 불편한 건 없어?”
“네, 없어요.”
“몸은 괜찮아?”
“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요.”
그 대답에 데본시아가 조용해졌다. 브레이슬릿이 부서진 것을 분명 알았을 텐데,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애리얼은 그가 곧 문을 열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손가락에 팽팽한 긴장감이 어렸다. 바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장전된 마력탄이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날아갈 순간만을 기다렸다.
문밖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뿐. 데본시아는 뭔가를 망설이는 듯 방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지금 방아쇠를 당길까. 애리얼은 고민했다. 대기실의 문은 두껍지 않았다.
“……그래.”
데본시아가 짧게 말했다. 그러고는 문에서 물러났다. 복도를 빠져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멀어져 완전히 사라졌다.
그 순간 우습게도 애리얼은 긴 시간 기절했다가 겨우 눈을 떴던 이 세계에서의 첫 번째 일 월 일 일을 떠올렸다. 첫 번째 기회를 잃은 날.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 그녀를 덮쳤다.
한숨이 나는 허망함.
‘방금 그냥 쏴 버렸어야 했나?’
약간의 후회가 밀려든 참이었다.
“쏘지 않는 게 맞았어요.”
여태 모든 걸 방관하듯 허공만 보던 휘아킨이 입을 열었다. 빈 곳을 찾아 정처 없이 유영하던 그의 은빛 눈이 똑바로 애리얼을 담았다. 맞닿아 오는 그 시선에 애리얼은 눈을 맞췄다.
휘아킨은 그녀의 눈길에 전율하며 느린 호흡을 뱉어 냈다.
만나고 싶었다. 저 눈에 자신이 담기길 바랐다. 어떻게든 그녀의 뇌리에 새겨지길 원한다.
“식장에서 쏘세요. 모든 이의 눈이 당신을 향할 때, 황제가 당신에게 홀려 있을 때.”
애리얼은 그의 충고대로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사람을 증오하며 복수를 계획한다.
휘아킨은 지금이 생에 다시없을 순간임을 알고서 줄곧 전율하고 있었다.
‘결혼식 날 식장에서 온갖 깽판을 친 다음 애리얼에게 입을 맞춘 뒤 콱 죽어 버리고 싶어.’
애리얼이 황자비로 지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충동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애리얼. 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그녀의 모습에 현기증이 일었다. 맥박이 빠르게 솟구친다.
사랑하는 나의 선배님.
그는 부지불식간에 손을 내뻗어 그녀를 당겨 왔다. 한쪽 팔을 허리에 두르고 남은 한쪽 손으로 뺨을 감싼다.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맞붙였다. 그녀가 반응하지 못하고, 그조차도 인식할 수 없이 갑작스레, 본능에 몸을 내맡겼다.
쵹, 물기 어린 소리가 나며 촉촉한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말캉한 감촉에 몸이 바짝 굳는다. 온 감각이 예민해지며 환락과 같은 열감에 휩싸인다. 아, 좋아.
이대로 그녀를 가질 수 있다면 혼이라도 내다 팔 수 있었다. 마저증으로 오인당해 시궁창처럼 살았던 인생을 다시 반복하래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 된다.
그는 그녀를 위해 희생한 인간으로 그녀의 뇌리에 들러붙고 싶었다. 데본시아와 같은 쓰레기가 아니라. 그보다는 더 나은 그녀의 아픈 손가락으로…….
혀를 밀어 넣고 싶은 걸 참으며 겨우 입술을 뗐다.
“식장에서는 못 할 것 같아서요.”
휘아킨이 장난스레 속삭였다.
애리얼은 심히 놀란 듯 제대로 반응도 못 했다. 그런 와중에도 총구는 어느새 휘아킨을 향해 있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의 표현일까.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죽이지 마세요. 무례를 저지른 만큼 선배님께 도움이 될 테니까요.”
“휘아킨…….”
애리얼은 당혹스러워하며 그를 불렀다.
그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에 황홀감을 감추지 못하며 환히 웃었다.
“사랑해요, 애리얼.”
애절하게, 그러면서도 밝게 울리는 미성이 귀에 감겨들었다.
차마 답변할 수 없어 입술을 꾹 다문 애리얼이 그를 보았다.
곤혹스러움이 엿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만족스러워하며 그는 모습을 감췄다.
***
문제가 생겼으나 식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든 정도는 금방 수습할 수 있다. 그래야만 했다.
왕족과 귀족을 모조리 불러 모으고 제국민들에게 하사품까지 내리며 오늘을 알렸다.
중간에 그만두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연회에 이어 오늘까지 그런 불상사가 있어선 안 됐다.
하얀 예복을 입고 붉은 휘장을 두른 그가 붉은빛의 망토를 늘어트리고 웨딩 로드를 걸었다. 가슴팍에는 백합을 엮어 만든 부토니에르가 꽂혔다.
주례를 맡은 재상이 웨딩 로드 아래에서 황제를 올려다보며 황후를 기다렸다. 황제의 형제인 스카이라가 따로 마련된 상석을 차지하고, 대공가와 3대 공작가의 일원들이 가장 앞줄에 앉았다. 그 뒤로 왕족과 고위 귀족이 자리를 차지했다. 렉시우스와 레이신도 참석했다.
황성에서 그들이 벌인 일은 전부 비밀로 숨겨졌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 국혼에 참석해야 했다. 손목에 찬 브레이슬릿은 정장으로 덮어 감추고 무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미소는 짓지 못해도 날뛰지는 않았다. 그래야 하는 날이었다.
대놓고 반역자로 지정된 휘아킨만이 없었다.
오늘은 온전히 데본시아를 위한 무대였다. 그가 승리자임을 공표하기 위한 식이다.
애리얼은 그걸 박살 내기 위해서 발을 들였다. 백합으로 만든 부케 아래에 피스톨을 숨기고 걸음을 옮겼다.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입장로에서 대기하던 보좌관이 신부의 입장을 알렸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국의 황후가 웨딩 로드로 들어섰다. 두 명의 시녀가 그녀를 뒤따르며 드레스 자락을 부드럽게 펼쳐 늘어트렸다.
신부가 가는 길에 갈채가 쏟아졌다.
애리얼의 얼굴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시간이 촉박하여 치마폭에 숨긴 피스톨을 눈치채지 못한 시녀에게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