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58)화 (246/264)

웨딩 로드의 끝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는 황제가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 환희로 물든 그의 오드 아이를 마주했다. 제 수족이 세뇌당한 일도, 근원 소멸기가 사라진 일도, 그녀를 억제하던 브레이슬릿이 부서진 일도, 모르지 않을 텐데. 우아하게 여유를 가장한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식장에 선 그는 압도적으로 화려하고, 오만하게 고상했다.

그런 그를 앞두고 애리얼은 웨딩 로드의 도중에 걸음을 멈추었다. 더 다가가면 이 아래 숨긴 피스톨을 그가 눈치챌 테니까.

데본시아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브레이슬릿이 부서진 건 알았어도 파멸의 기원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나 모양이지?

애리얼은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면서 부케를 던졌다. 그를 위해 준비한 것을 드러냈다. 은색의 몸체를 지닌 피스톨의 총구가 그를 향해 겨눠졌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 찰나에 방아쇠를 당겼다.

탕!

시커먼 마력탄이 날아가 그의 방어술을 부수었다.

파지지직-

희고 검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일어났다.

밝았던 식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싸늘히 얼어붙었다가 경악으로 변해 비명을 지른다.

대공가, 3대 공작가, 왕족, 그 아래 귀빈들 전부 경악했다. 스카이라, 렉시우스, 레이신까지 놀라서 경직되었다.

데본시아가 급히 공간의 시간을 멈추었다. 대공저 연회 홀에서 펼쳤던 것과 같은 술식이었다. 사람들이 경악한 그대로 굳었다. 높은 마력을 지닌 황자와 세 명의 공작, 두 명의 공자만이 데본시아가 멈추어 둔 시간 속에서 눈을 깜박였다.

그 가운데서 애리얼이 다시 총을 쏘았다.

탕! 탕!

연달아 총성이 울렸다. 검은색 마력탄이 흉흉한 기운을 뿜으며 그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데본시아가 빠르게 반응해 방어술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신성 극계 술식을 연달아 쓰며 한계에 도달해 약해진 상태였다. 단순히 애리얼의 마력만 상대하는 거였다면 여유 있었을 터다. 하지만 파멸의 기원에 담긴 그녀의 마력을 상대하는 건 아무리 그라도 어려웠다.

마력탄에 맞아 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재차 방어술이 깨지고, 터진 마력탄의 여파가 이마를 비스듬히 긋고 갔다.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와 그의 매끈한 얼굴을 지저분하게 적셨다.

그런데도 애리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은 얼굴은 평온하게마저 보일 정도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살의조차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탕!

재차 마력탄이 쏘아졌을 때, 데본시아는 빠르게 거리를 좁혀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날아간 탄환은 그가 방어차 내민 팔에 막혔다. 다시 방어술이 펼쳐지고, 또다시 방어술이 깨진다. 그 충격의 여파로 마력탄을 빗나가게 만들며 그는 치명상을 피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애리얼이 접근해 오는 그를 향해 마력의 출력을 높이며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탕!

데본시아의 온몸에 총상이 새겨진다. 처음에는 비껴가게 하는 정도로 방어하던 것이 살점이 날아갈 정도로 심각해지고 나서야 애리얼의 손목을 붙잡아 총구를 바닥으로 내렸다.

가까이서 본 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예복은 찢기고 구겨져 피에 물들었고, 자랑하던 얼굴도 피로 범벅되었다.

꼴좋다.

이걸 누가 국혼을 치르는 황제로 보겠는가.

같잖게 부토니에르로 꽂은 백합마저도 피에 물들었다.

한마디 비아냥거림이라도 던져 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애리얼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죽이려 했는데 죽이지 못하고 손목만 붙들렸다. 넝마 꼴이 되어 이렇게나 피를 흘리는데도 그의 악력을 이기지 못해 분했다. 이를 악물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

증오에 차서 내뱉었다.

그가 피에 젖은 얼굴로 피식 웃었다.

“나는 네 증오마저도 가지고 싶은데.”

데본시아는 이렇게 엉망인 꼴로 다치고도 속삭이는 목소리는 간드러졌다.

“그래서 죽을 수가 없어.”

낮게 웃으며 애리얼을 당겼다. 그의 피 묻은 손이 그녀의 피부를 붉게 물들이고 피스톨에 닿았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꽉 주며 저항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었다. 파멸의 기원은 사격 실력이 부족해도 대상에 적중할 수 있도록 마력탄의 궤도를 어느 정도 수정해 주기는 하지만 그것도 방향은 맞아야 했다. 바닥을 향해 쏘아진 총알을 데본시아에게 적중시키게 해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상태면 다른 이가 맞을 확률이 높았다. 그 탓에 마력을 방사할 수도 없었다. 빼곡한 하객들은 그의 인질이었다. 그에게 제대로 대항할 수도 없게 만드는 족쇄였다.

애리얼은 그를 겨누려 손목을 비틀고 안간힘을 쓰다가 울분을 토했다.

“제발 나를 놔줘! 나 좀 죽게 해 줘! 그러면 당신은 안 죽일게! 나만 죽을게! 그러니까, 제발…….”

덜덜 떨며 애원하는 목소리가 식장에 울렸다. 안쓰러울 정도로 그녀는 제 죽음을 구걸했다. 신부가 신랑에게. 다름 아닌 원수에게.

스카이라의 낯이 창백해졌다. 죽고 싶구나. 여전히 간절하게 죽고 싶구나.

렉시우스는 이 광경을 바라만 봐야 하는 두 눈을 도려내고 싶은 심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브레이슬릿으로 마력을 억제당해 난입하기도 마땅치 않았던 둘은 이 처절한 촌극을 일 열에서 관람해야 했다. 마법도 쓸 수 없는 상태로 데본시아를 제압하려 해 봤자 오히려 인질이 되어 애리얼의 족쇄 노릇이나 할 것이다. 무력감이 벌레처럼 온몸을 기어다녔다. 끔찍한 고문이었다.

이미 그녀의 비명을 들었던 레이신마저도 처절한 음성에 입술을 깨물다가 자리를 떠났다.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외치는 그녀는 이 세계의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데본시아는 그게 너무나 싫었다. 진저리가 났다.

“애리얼.”

그녀의 손목을 틀어쥐고서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나약해서, 뭘 어쩌려는 거야. 이러다 죽는 것도 나한테 해 달라고 하겠어.”

“……상관없어. 당신이 죽여도 돼.”

“하…… 하하.”

데본시아가 황당해하며 웃었다. 당황하고 상처받은 걸 숨기려고 하는 것도 같았다. 그녀의 뺨을 감싼 그가 애써 오만한 표정을 가장했다.

“넌 내 신부인데, 죽일 리가 없잖아.”

“놔줘. 죽여 줘. 데본시아…….”

“이럴 때 부르라고 허락한 이름이 아니야.”

“황제 폐하.”

곧바로 딱딱하게 변해 버린 호칭에 그의 얼굴도 차갑게 굳었다.

“저를…… 반역자로 죽여 주세요.”

“애리얼.”

“식장에서 폐하를 쏘았습니다. 이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명백한 반역입니다. 증인이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어요. 사실 증인조차 필요하지 않아요. 모두가 알아요. 저는 반역을 저질렀어요. 그리고 반역은 사형으로 처벌하는 중죄…….”

“반역자는 죽이기 전에 협력자가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도 알아? 손톱, 발톱을 다 뽑고, 수족을 하나하나 잘라 내고,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고, 그 핏줄과 관련인까지도 전부 고문당할 텐데. 그래도 괜찮아?”

“폐하…….”

“그래도 반역자가 될 수 있겠냐고. 응?”

협박을 내뱉는데도 목소리가 어쩌면 이렇게 온화하고 우아할 수 있을까.

“이 정도는 가벼운 어리광으로 받아 줄 테니까, 이제라도 이거 놓고 식 올려.”

“…….”

“나머지는 내가 수습할게. 웨딩드레스도 새걸로 갈아입는 게 좋겠다.”

익숙하게 이어지는 회유책에 애리얼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머니와 카논은 풀어 줄 수 있어요?”

“애리얼.”

다정하던 그의 음성이 곧바로 무거워졌다.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도 결국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우선하는 태도가 문제였다.

“내가 네 뭘 믿고 그들을 풀어 주겠니.”

“그러면 뭘 하면 풀어 주실래요?”

“뭐든 할 생각은 있어?”

“네.”

하,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당겼다. 그는 급격히 낮아진 목소리로 그녀에게만 들리게 조곤조곤 속삭였다.

“나는 이제 네가 말로 하는 건 아무것도 못 믿겠어. 우리 결혼도 거래였는데, 네가 안 지켰잖아.”

“…….”

“내 애라도 밸래? 그러면 조금 믿을 수도 있을 거 같고.”

“네.”

애리얼이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흠칫 몸을 경직시켰다가 이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전에도 이미 그런 답변을 주지 않았던가. 결혼하겠다고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오늘, 총을 가져왔다. 그때도 ‘네’ 하고 대답했던 걸 잊을 정도로 그는 기억력이 나쁘지 않았다.

“말로는 믿을 수 없어.”

“그러면 행동으로 보여 드릴까요?”

중얼거린 애리얼이 발꿈치를 들고서 그에게 입을 맞춰 왔다. 피에 젖은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친 그녀의 행동에는 작은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데본시아가 소스라쳤다.

스카이라와 렉시우스가 경악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솔렘과 샤펠 공작은 방관자답게 피 튀기는 식장에서 자리를 비웠다. 무하 공작만이 뭔가를 기다리듯 자리에 남은 상태로 피투성이가 된 결혼식을 보았다.

신부는 역하지도 않은지 신랑의 피 묻은 입술 새를 파고들어 부드럽게 혀까지 엮었다.

그걸로 아주 쉽게 데본시아의 인내가 끊어졌다. 그대로 애리얼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참으로 어렵고 틈이 없는 인간이었으나, 이토록 간단하기도 했다.

그녀의 손목을 놓고서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고개를 기울이고서 밀려드는 그녀의 혀를 받아들였다. 말캉한 입술을 타고 입 안에 열기가 엉긴다. 피의 찝찔한 맛과 쇠 비린내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 사랑스럽다.

탕!

심취한 그의 귀로 총성이, 경종이 울렸다.

복부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울컥 피가 올라왔다. 그녀에게 감히 피를 넘겨줄 수 없어 물러나려는데, 그녀가 그를 붙잡았다. 몹시 황송하고 잔혹하게도.

탕! 탕! 탕!

연달아 총알이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등 뒤로 피가 튀었다. 하얀 웨딩 로드에 핏방울이 비처럼 쏟아졌다.

연이어 총격을 당한 데본시아가 힘이 쭉 빠진 듯 늘어졌다. 그제야 애리얼은 그를 밀어냈다. 힘없이 밀려난 그가 비틀거리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꿇리고, 뚫린 배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렀다. 만신창이였다.

애리얼이 맞붙었던 입술 새로 흘러들었던 피를 퉤 뱉었다.

데본시아는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서 완전히 엎어지려는 상체를 간신히 지탱했다. 남은 왼손이 애리얼의 드레스 자락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애리얼…….”

피를 질질 흘리는 입이 분노인지 간절함인지 구분하기 애매하게 떨리는 음성을 뱉었다.

애리얼은 무너지는 그를 무표정하게 감상했다. 제 이름을 부르며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이마에 총구를 댔다.

“이번에는 제발, 그냥, 죽었으면 좋겠어.”

애리얼이 중얼거렸다. 데본시아를 저주하는 말이기도 하면서,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복수의 희열이 없었다. 지치고 지쳐 공허하게 비어 있기만 할 뿐.

아무리 원수를 향한 복수라지만 사람을 쏘는 감각은 유쾌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만 전부 끝내고 싶었다.

이런 굴레도, 생도.

그녀의 손가락이 의무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데본시아의 오른손이 빠르게 뻗어 나가 총구를 잡아 내렸다.

타앙!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총알이 그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이미 상처가 심했던 탓일까. 그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애리얼을 올려다보았다.

“죽지 마.”

죽고 싶어도 죽지 마.

무심하던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데본시아는 괴로움에 잠식된 그 얼굴을 보며 웃었다.

“여기는 눈이 너무 많아서 불편하지?”

배려해 주듯 속삭인 그가 애리얼을 붙잡고 순간 이동을 썼다.

마력을 억제당해 섣불리 끼어들지 못했던 스카이라가 뒤늦게 뛰어나갔다. 하지만 늦었다.

둘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데본시아가 걸어 두었던 정지 술식이 풀렸다. 경악한 채 얼어 있던 귀빈들이 일시에 움직임을 되찾으며 식장이 순식간에 소란에 잠겼다.

스카이라는 그대로 인파에 묻혀 갈피를 잃었다.

식장을 먼저 빠져나간 건 제 무력함을 인지하고서 조용히 물러나 있던 렉시우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