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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59)화 (247/264)

황제와 황후가 사라진 홀은 아수라장이었다.

황제의 수석 보좌관인 제라온이 수습한다고 나섰지만, 이 난장판이 쉬이 진정될 리 없었다.

핏물이 고인 웨딩 로드를 가만히 주시하던 무하 공작은 몸을 돌려서 식장을 빠져나갔다. 제 아들을 불구로 만든 황제가 죽는 걸 보려고 기다렸는데, 황제가 사라졌으니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반역자로 수배된 이후 그녀는 제 아들을 마주하지 못했다. 아리앨라를 통해 애리얼에게 파멸의 기원을 지원해 주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물론 그토록 학대한 아들을 직접 찾아 집으로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 염치는 있었다. 다만 제 아들이 무언가 극단적인 행위를 꾸미는 것 같은 정황 때문에 불안할 뿐이었다.

***

둘은 술식이 빼곡한 방에 있었다.

지하 성소의 밀실.

다른 이들이 찾지 못할, 오로지 황제인 그에게만 허락된 비밀 장소.

타인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느껴졌다.

애리얼은 멍하니 주변을 훑었다.

밀실은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회귀 전에는 흠 하나 없이 깨끗했는데, 지금은 바닥이 엉망으로 금이 가 있었다.

조금 지나자 그게 금이 아니라 술식이 깨진 흔적이라는 걸 알았다.

“이야기 좀 할까?”

데본시아의 음성은 탁했다. 그는 여전히 총구를 아래로 잡아 내린 채였다.

그녀의 마력탄은 지독하게 파괴적이었다. 어마어마한 회복력을 타고난 마수도 그녀의 마력탄에 맞으면 맥을 못 추고 한동안 구멍이 난 채 다녔다. 그때보다도 더 높은 순도를 자랑하는 그녀의 마력은 시커먼 빛깔이었다. 아득히 높은 파괴력을 알리는 색으로 그를 꿰뚫었다.

데본시아는 제 상태를 알았다. 엘릭서를 세 병은 써야 겨우 나아질 상처였다. 치료술로는 어림도 없었다. 신성 마법사이기에 마력의 힘으로 살아는 있으나,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죽을 것이다.

그래서 애리얼은 굳이 그를 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더 오래 고통스럽길 바랐다.

“날 왜 여기로 데려왔어요?”

“둘만 있고 싶어서.”

“죽는 마지막에요?”

“왜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죽일 거니까요.”

“그거 영광이네.”

그가 웃었다. 죽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는지 총구를 내리누른 손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저렇게 온몸에 구멍이 나고도 대단한 악력이었다. 아프지도 않은지 부드럽게 미소 지은 입술도 같잖았다.

애리얼은 피를 철철 흘리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지금마저도 여유로운 그가 너무도 불쾌했다.

이대로 죽이기 아까울 정도로 그는 오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억울했다.

애리얼은 그의 절망을 보고 싶었다. 그가 저만큼 고통스러웠으면 했다.

“당신이 아팠으면 좋겠어. 나만큼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화가 났다.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나만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만큼이나 총을 쐈는데도 실실 웃고……. 어떻게 해야 당신의 얼굴이 나처럼 공허하게 비어 버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격해지는 건 애리얼뿐이고 그는 평온하다. 그녀의 열받은 모습이 기꺼운 듯이.

애리얼은 점점 더 불쾌하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를 죽이고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는데, 그는 웃는다. 미친놈. 미친 새끼.

담담하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복수를 하면 그가 어떤 표정을 하든 통쾌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대체 당신은……, 당신은 어떻게 하면 고통스러워? 뭐가 괴로워?”

답을 잃어 미로에 갇힌 그녀가 물었다. 상처받길 바라는 발언에도 그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글쎄……. 나랑 살면서 고민해 볼래?”

그 말이 기어코 애리얼의 눈을 뒤집히게 했다. 입술을 확 깨물며 손목을 비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에는 인질도 없지.

망설임 없이 마력을 방출하자 시커먼 스파크가 일며 그가 피를 후드득 쏟았다. 그런데도 그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애리얼, 나하고…… 살자. 나하고 살면서, 복수하면 되잖아. 나랑 결혼…… 결혼하자.”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피스톨을 꽉 붙들어 누른 채 애원했다. 사실 애원이라 볼 수도 없었다. 여유롭고 오만한 그는 피를 쏟으면서도 뻔뻔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왜! 내가 왜!”

애리얼이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그를 죽여도, 그가 기어코 지옥에서 올라올 것만 같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

이제는 거의 울먹이는 수준의 목소리가 나왔다.

데본시아는 격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고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환히 웃었다.

그 섬뜩한 눈빛에, 광기 어린 미소에, 애리얼은 해답을 들었다.

사랑해, 애리얼.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애리얼이 경기를 일으키며 그를 뿌리쳤다.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몸부림을 쳤다. 그녀가 뿜어낸 마력의 스파크가 사방을 지져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본시아는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괜찮아, 애리얼. 괜찮아. 진정해.”

피투성이 몰골을 하고서 그녀를 상냥하게 어르는 그는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그 낯짝이 꼴도 보기 싫어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처박았다. 갈가리 조각난 모양새의 술식이 두 눈에 담겼다.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술식도 망가졌다.

이제 더는 회귀하지 못할 것이다.

그 명확한 사실이 그녀를 일깨웠다.

경기하듯 바르작거리던 애리얼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는다. 고개를 천천히 다시 돌려 그를 마주했다. 기대감에 휘어지는 그의 오드 아이가 보였다. 핏자국으로 얼굴이 지저분하게 더러워진 와중에도 신비로움을 유지하는 두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날 사랑해?”

그녀의 물음에 그의 두 눈이 황홀하게 반달로 접힌다.

“사랑해.”

네 부모를 죽이고 이 세계로 널 끌어올 만큼, 몇 번이고 회귀할 만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만큼, 무하 공자의 마력을 빼앗아 그의 삶을 진창으로 처박을 만큼, 네가 아끼는 이들을 인질로 잡을 만큼, 너를 가두고 족쇄를 채울 만큼, 이 모든 짓을 하고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해.

말하지 않은 말의 무게까지 훅 끼쳐 드는 음성이 그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도무지 사랑처럼 느껴지지 않는 사랑이었다. 지옥에서 건져 낸 듯한 피비린내가 풍기는 날것의 진심이 그녀를 옥죄었다.

애리얼은 면사포를 고정한 핀을 빼냈다. 실핀에서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마력을 담아 그의 손등을 냅다 찔렀다. 기다란 실핀이 그의 손을 관통했다. 피스톨을 쥔 그의 손이 흠칫 떨리며 옥죄던 악력이 헐거워진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애리얼은 즉시 그의 손안에서 피스톨을 당겨 끌어와 제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데본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가 애리얼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도 빠르게 몸을 일으켜 달려들었다. 온몸이 구멍투성이일 정도로 다쳤으면서, 믿을 수 없는 반응 속도였다.

애리얼은 그에게 손을 붙들려 뒤로 넘어갔다.

탕!

빗나간 마력탄이 천장을 쏘았다.

“애리얼!!!”

그토록 꼴 보기 싫던 그의 평정이, 여유가 깨진다.

회귀 전과는 차원이 다른 분노와 초조함, 두려움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제 죽음에도 떨지 않던 그가 그녀의 죽음을 느끼고서 공포에 질렸다. 온몸을 벌벌 떨면서 그녀를 내리눌렀다. 일그러진 얼굴은 화가 난 듯 보이는 동시에 울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애리얼이 죽을까 봐 겁을 내고 있었다.

일말의 양심조차 없는 데본시아의 혐오스러운 진심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고 협박하며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끔찍한 진심이었다.

“폐하께선 제가 죽을까 봐 겁나시나요?”

“죽는다고 하지 마!”

그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존댓말도 하지 마. 여기까지 와서 폐하라고 하지 마. 이름으로…… 불러야지…….”

그가 자랑하는 중저음이 형편없이 갈라졌다. 늘 여유롭게 우아한 발음으로 유혹하듯 속삭이던 그 말이 볼품없이 들렸다. 그녀와의 거리감을 줄이고 싶어서 하는 구걸이었다.

여태 유혹으로 했던 그의 모든 말들이, 실은 지독히 결핍된 감정을 채우고자 바란 애원이었다.

“나의 엘……. 사랑하는 내 황후, 엘…….”

그가 애리얼을 바라보며 웃는 듯 우는 듯 처참한 표정을 지었다. 애써 지은 애칭으로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려 애쓰며, 애정을 구걸했다.

죽으려는 그녀의 앞에서 데본시아가 드디어 고통스러워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즐겁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달랐다. 그가 고통스럽기를 바라지만, 그의 고통을 딱히 즐기지는 않았다. 그는 죄인이기에 마땅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것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웃지도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 더 이상 회귀할 수 없죠?”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아주 멍청하게도 진실을 내보였다.

그랬기에 그는 그녀의 자살이 두려운 거였다. 예전과 달리 그녀를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

이제야 애리얼은 해방감을 느꼈다. 그는 저를 쫓아올 수 없다. 이제는 되살릴 수 없다. 온전히 죽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너무나 죽고 싶다.

“제가 죽고 혼자 남으시면, 그거야말로 폐하께 지옥이겠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에 젖었는데도 창백한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희게 질려 버린 그의 얼굴이 대신 답을 알렸다.

‘그는 나를 사랑해.’

그러니 자살이라는 복수는 헛되지 않다.

애리얼은 그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는 여전히 천장 쪽으로 어긋나 있어서 자신을 쏠 수는 없지만, 그를 쏠 수는 있었다.

탕!

마력탄이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가 신음을 흘렸다. 애리얼이 스스로를 쏘는 것에만 신경을 쓰던 그는 불시에 날아온 마력탄에 대처하지 못했다. 애리얼을 짓누르는 힘이 현격히 약해졌다.

애리얼은 총상이 심한 그의 복부를 발로 힘껏 찼다. 이미 상처가 컸던 데본시아의 몸이 더 버티지 못하고 일순간에 무너졌다. 그사이 애리얼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 그의 아래에서 벗어났다. 손에는 피스톨을 쥔 채로 다급히 일어나 밀실의 문을 쏘았다.

타앙!

방어술이 한 방에 깨지며 잠겨 있던 잠금장치까지 날아갔다. 굳게 닫혔던 문이 너덜너덜해져서 힘없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애리얼이 뛰쳐나갔다. 그러려고 했다.

“……애리얼…….”

피를 울컥 뱉으며 그가 애리얼의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본 애리얼의 살갗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저만은 붙드는 그 집착이 섬뜩했다.

“……마……. 나하고…….”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애리얼은 소스라치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있는 힘껏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데본시아는 치료술을 펼치며 끈질기게 의식을 붙잡았다. 바닥을 짚고서 한쪽 무릎을 세웠다.

애리얼의 말마따나 회귀는 더 못 한다. 그녀에게 자살 따위의 복수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밀실을 빠져나가 성소 바깥으로 달려 나가는 발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따라가야 한다.

그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따라가서 절대 죽지 못하도록…….

질긴 의지를 담으며 나아가려는 그의 발목을 서늘한 감촉이 옥죄어 왔다.

나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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