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본시아는 제 몸이 기이하게도 아래로 침전하고 있음을 느꼈다. 불길함을 느끼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망가진 제 술식의 위로 은색의 술식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치밀한 배열로 보아 신성 극계 술식이 분명했다. 그것도 그냥 술식이 아니라 저주. 서슬 퍼런 누군가의 증오.
“무하.”
“예, 폐하.”
술식이 일렁거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뱉어 냈다.
“네가 어떻게 감히 극계 술식을…….”
그렇게 말한 순간 바닥에서 새하얀 손이 올라와 그를 붙들었다. 찬연한 은색의 눈동자가 심연 속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신체와 마력, 그 혼까지도 모두 대가로 바쳐서 완성한 극계 저주가 넘실거리며 그를 덮쳐 왔다. 저항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 그를 내리눌렀다. 벗어날 수 없다. 저항할 수 없다.
이토록 강렬한 증오심이라니.
그는 제 끝을 직감했다.
제가 빼앗아 밑바닥으로 처박은 것에게 붙잡혀 같은 밑바닥으로 끌려간다.
그가 저지른 대로 당한다.
그의 과오였다.
하, 하하. 데본시아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애리얼을 사랑했던가.
그래, 사랑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의 증오심이 생길 리 없었다. 그는 제 사랑을 알았고, 제 발목을 붙드는 이놈의 사랑도 제 사랑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토록 닮았으니, 이것도 이 정도의 저주를 쓸 수 있었던 거다.
질척하고 음습하며 정도를 모르는, 시뻘건 날것의 사랑. 피비린내가 풍기는 순정.
끝없는 회귀를 반복하며 고이고 고여 썩어 가는 감정이 비명을 질렀다.
아직도 그녀가 가지고 싶다고…….
그는 가슴팍에 꽂힌 백합을 움켜쥐었다.
“아, 애리얼…….”
마지막으로 외며, 저주에 붙들려 아래로 훅 빨려 들어갔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연옥 속으로 추락했다.
***
끝없는 증오의 염원은 강력한 마법을 부른다. 그 마법은 저주라 불렸다.
그의 저주는 증오에 추악한 집착과 질투가 합쳐진 강렬한 사랑으로 완성되었다. 한계를 넘은 마법을 불렀다.
휘아킨은 그 마법에 제 모든 것을 불살랐다. 가진 모든 것을 대가로 극계 술식에 도달했다. 태생적으로 신성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그는 신성 술식을 쓸 수 없었으나, 그가 행한 것이 순수 마법이 아닌 저주였기에…… 가능했다. 성공했다.
술식의 힘을 가장 크게 받을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술식을 그리고 기다렸다. 마지막 순간에 황제가 발악처럼 이곳에 올 것을 알았던 것 같았다. 그것도 저주가 가진 일종의 힘이었을까.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원수, 황제는 그의 저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토록 강하고 오만한 신성 마법사가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그가 펼친 연옥으로 끌려왔다.
참으로 달콤한 힘이었다.
그가 여태 당하기만 했던, 시궁창 속에서 우러러보기만 한 고고한 상대가 이렇게 저와 같은 진창으로 처박히는 감각이란.
황제도 이래서 그랬던 건가.
닿을 수 없고,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상대를 찍어 누르고 끌어내리는 기분. 그리하여 손안에 쥐고 굴릴 때의 쾌감.
휘아킨은 캄캄한 저주의 무저갱 속에서 애리얼을 떠올렸다.
이 저주도 황제를 향한 증오로는 부족해서 그녀를 향한 사랑을 발판 삼아 자랐다.
사랑하고 동경하는 나의 빛.
이 저주의 힘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황제처럼 몇 번이고 쓸 수 있었다면…….
그는 막대한 힘을 지닌 자신이 황제처럼 굴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다행이다. 나한테 그 정도의 힘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만약 할 수 있었다면, 몇 번이고 시간을 돌렸을 것이다. 뭐든지 했을 것이다. 애리얼을 얻기 위해서 몇 번이고 그랬을 것 같았다.
휘아킨은 데본시아를 이해하고 만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연옥 속에서, 자신과 그의 영혼을 바닥으로 영원히 처박으며 생각했다.
그를 용서할 수 없다.
그를 이해한 자신도 용서할 수 없다.
애리얼을 사랑했기에…… 용서할 수 없었다.
연옥의 밑바닥에서 그의 집착적 사랑이 속죄로 산화했다.
***
애리얼은 지하 복도를 달렸다. 휘아킨의 저주에 가라앉은 데본시아의 말로를 모르는 그녀는 숨이 넘어가도록 뛰었다. 그가 쫓아오는 것 같아서, 멈출 수 없었다.
빨리 그가 쫓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데본시아의 흔적이 있는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데본시아와의 끔찍한 과거가 있는 이 황성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제 앞을 막는 문을 피스톨로 모조리 날려 버리고 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그렇게 중앙관의 1층에 발을 디딘 순간, 억센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확 낚아챘다.
렉시우스였다. 그가 1층의 계단 옆에서 기다린 듯이 서 있었다. 애리얼은 그의 품에 안겨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무리하면 잡으러 온다고 했지.”
렉시우스는 차가운 낯으로 피스톨을 쥔 애리얼의 손을 움켜쥐었다. 데본시아에게 당했던 것과 같은 악력이 그녀를 덮쳤다.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바르작대며 거부감을 표출했다.
애리얼의 이름을 담은 은색의 초커가 번쩍거렸다. 주인의 거부감을 감지하고서 렉시우스에게 벌을 가했다. 그의 목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하얀 셔츠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그런들 렉시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네 부탁을 들어줬는데, 대체 넌!”
“……놔줘.”
“놔주면!”
그가 고함을 질렀다. 억눌린 감정을 토해 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애리얼이 어깨를 움츠렸다.
렉시우스가 그 어깨를 움켜쥐었다.
“놔주면, 너 죽을 거잖아!”
죽으면 안 되나?
애리얼은 죽고 싶은 걸 부정할 마음도, 감출 마음도 사라졌다.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고, 저를 붙드는 렉시우스에게서 데본시아의 모습을 겹쳐 볼 뿐이었다.
“선배, 놔줘.”
그녀가 텅 빈 눈으로 되뇌었다.
“놔줘.”
렉시우스의 얼굴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데본시아에 이어 그도 그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초커 아래로 피를 흘리면서, 데본시아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면서.
“네가 죽는 걸 봤어.”
“…….”
“그때의 너랑 지금의 너랑 똑같아. 놔주면 당장 머리에다 대고 총을 쏴 버릴 얼굴이라고!”
“…….”
“근데 놓으라고? 내가 왜?”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비틀어져 올라간 입꼬리가 경련했다.
“그때 널 대공저에 가둬 버렸어야 했는데. 이런 몹쓸 생각, 하지도 못하게 세뇌라도 거는 건데.”
섬뜩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애리얼은 표정도 없이 그를 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지쳤다.
그와 깊은 속내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그의 속내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쉬고 싶다. 영원의 안식으로 떨어지고 싶다.
어쩌면 엄마, 아빠가 잠들어 있을지 모를 그곳에…….
“놔줘.”
그녀가 말했다.
렉시우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러더니 점점, 절망이 차올랐다. 분노를 닮은 절망에 미간을 잔뜩 구기고 그녀를 으스러뜨릴 듯이 붙잡았다.
은색 초커 아래로 흐르는 피의 줄기가 거세졌다.
목이 떨어져도 상관없는지, 렉시우스는 제 주인을 끌어안았다. 이미 엉망이었던 웨딩드레스가 새로운 피를 머금었다.
애리얼은 눈을 감았다.
렉시우스를, 언제나 데본시아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렉시우스도 그와 비슷하게 구는 걸까.
그렇다면 그도 쏴야 할까.
하지만 의욕이 나지 않았다. 데본시아와 그는 달랐다. 그는 원수가 아니었다. 그녀의 현실 도피에 놀아난 피해자에 가까웠다. 애리얼은 그를 쏘고 싶지 않았다.
“놔줘, 제발…….”
“웃기지 마, 주인님. 개가 주인을 어떻게 놔.”
“선배는 내 개가 아니야.”
“목줄도 매 줬으면서, 이제 와서 버리는 거야?”
“…….”
“네가 날 버려도, 나는 너 못 놔. 정 버리고 싶으면 이대로 죽이든가.”
“선배, 제발!”
죽이라는 소리에 애리얼이 소리를 질렀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호흡이 격해졌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금세 버석버석 메마른 표정으로 피가 흐르는 그의 목을 밀어내며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아.”
초커가 처벌을 멈추었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이지 않을 것이다.
렉시우스의 두 눈이 애리얼을 내려다보았다. 금빛의 눈동자에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이 담겼다. 아름다운 핏빛 신부. 우울증에 빠진 그의 연약한 주인님.
그의 눈이 애틋한 애정을 담는 순간이었다.
“살고 싶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그가 약간의 희망을 품은 순간에 가장 잔인하게 추락시켰다.
생기가 반짝이던 그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충격으로 깨어져 침잠했다. 금색이 탁하게 흐려졌다. 찬란한 황금과도 같던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 이제 그 두 눈에 번뜩이는 건 광기로 물든 이채였다.
다정하던 애정이 순식간에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그래, 그럼.”
렉시우스가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네 마음대로 죽고 싶어 해. 나도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선전 포고를 뱉은 그가 애리얼을 그악스럽게 붙잡아 당겼다. 애리얼이 몸을 비틀며 반항했다.
“우선은 우리 집 지하실에 처박혀서 살면 되겠다. 아니면 내 방에서 살래? 사슬도 예쁜 거로 사서 주인님 목에다 걸어 줄게. 다시는 죽고 싶단 소리 못 하게.”
경악할 소리를 지껄이며 그가 애리얼을 억지로 끌고 갔다.
“이거 놔!”
애리얼이 버텼으나 소용이 없었다. 구두가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양손을 붙들린 채 질질 끌려갔다.
벼랑 끝에 몰린 그녀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쇄액!
뭔가가 쇄도했다.
렉시우스가 정확히 저를 노리고 날아든 뭔가를 붙잡더니 갑자기 휘청거렸다.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스카이라!!”
그가 분노가 응집된 저음을 내질렀다.
애리얼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복도의 끝에서 칼을 쥐고 오는 이가 보였다. 언제나 그녀를 너무도 뒤흔드는, 그러나 끝끝내 외면했던 희망의 모습.
“누가 감히 황족의 중앙관에 함부로 발을 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