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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61)화 (249/264)

스카이라의 음성은 싸늘하게 분노해 있었다.

애리얼은 눈앞에 나타난 그를 차마 부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반가웠으나, 기쁘진 않았다.

죽음을 기원하는 그녀의 앞에 나타난 그는, 그 존재만으로도 그녀에게 고문과 같았다.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미련 같은 자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카이라의 시선도 줄곧 렉시우스만을 향해 있었다.

“죄송하게 됐네요, 황자 전하.”

렉시우스는 한껏 비아냥거리며 잡아챘던 것을 휙 버렸다. 대리석 바닥으로 피 묻은 칼이 챙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손잡이가 없이 오로지 날로만 이루어진 비수였다.

애리얼의 시선이 바닥에 팽개쳐진 날붙이를 향했다. 은색의 날에는 렉시우스로부터 배어 나온 피 외에도 묘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검은색의 진득한 점성을 지닌 액체가 날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독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성분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생각을 방증하듯 그녀의 손목을 틀어쥔 렉시우스의 악력이 약해졌다.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애리얼이 그를 뿌리쳤다.

“젠장! 가만히 있어!”

렉시우스가 으르렁대며 애리얼을 붙잡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힘이 빠진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손이 미끄럽게 빠져나갔다.

기회를 포착한 애리얼은 잽싸게 몸을 물리고 피스톨을 쥔 채로 복도를 질주했다. 도주하는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대로면 그녀를 놓친다.

그 생각에 사로잡힌 렉시우스는 스카이라의 존재도 잊고 애리얼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문제는 모종의 독으로 힘이 빠진 그의 신체였다. 빠르게 나아가야 할 다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등을 보인 그를 향해 스카이라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가볍게 도약하더니 공중에서 아래로 덮쳐들며 렉시우스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힘이 빠진 렉시우스는 불시의 공격에 손쉽게 바닥으로 엎어졌다.

스카이라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등으로 올라타 위를 차지하고는 검을 찔렀다. 날카로운 서슬이 렉시우스의 오른쪽 허벅지를 관통해 바닥에 꽂혔다.

하얀 대리석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렉시우스는 이를 사리물며 신음을 참더니 억눌린 음성을 토해 냈다.

“스…… 카이라!”

“이성을 잃으면 그 순간 지는 거라고.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스카이라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차분히 대꾸했다.

렉시우스는 분노로 헐떡거리면서 억지로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조금도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온몸의 힘이 쭉쭉 빠져 사지가 사방으로 늘어졌다. 천천히 몸을 침전케 하는 모래 구덩이 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아까 날아온 비수를 붙잡지 말고 피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렉시우스를 덮쳤다.

이제는 시야마저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애리얼의 발소리도 멀어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네 체력이면 죽지는 않을 거야.”

“입 닥쳐.”

신경질적인 그의 음성은 힘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독에 저항하는 중이겠지.

스카이라는 비웃음도 없이 무표정하게 그의 위를 지키고 앉은 채 중얼거렸다.

“너처럼 견고한 인간도 무너질 때가 있네.”

무미건조한 말투에는 동정도 조롱도 없었다. 약간 의외라는 듯한 감상만 짤막하게 담겼을 뿐.

“나도 너처럼 될까?”

애리얼이 뛰어간 복도를 바라보는 그의 입에서 우려와도 같은 질문이 흘러나왔다.

나도 기어코 데본시아, 레이신, 렉시우스가 행한 방식을 취하게 될까. 그들처럼 그녀를 억압하고 기어코 발목이라도 분지르려나.

죽음을 바라는 그녀의 앞에서 저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다.

그녀의 죽음이 두렵고 끔찍하여, 그 결과를 피하려고 뭐든지 저지르게 될까 봐…….

“비켜, 이 개자식아……. 애리얼이…… 죽는다고!”

스카이라의 아래에 깔린 렉시우스가 꺼져 가는 정신을 붙들며 악을 썼다.

그 음성에 스카이라는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불안을 억누르고 의지를 다잡았다. 브레이슬릿이 제 손목을 옥죄고 있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며 천천히 일어났다. 죽음으로 도주하려는 애리얼을 향해 움직였다.

애리얼이 뛰어간 복도를 따라서 스카이라가 멀어졌다.

렉시우스는 가까스로 고개만 들고서 스카이라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응시했다.

젠장, 젠장! 입에서 연신 욕설이 터졌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관통당한 허벅지의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무뎠다. 독한 수면제의 탓에 모든 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애리얼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발작적으로 그의 정신을 유지하게 했다.

애리얼. 그가 맨 목줄에 새겨진 이름. 그의 주인.

사랑이 집착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병증과도 같은 소유욕의 발현이었다. 그는 바닥을 긁으며 신음했다.

그녀가 살아 있기만 하면, 그러면, 목에 걸린 이 목줄로 주인인 그녀를 붙들 수 있다.

소유욕에 헐떡이며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무력하게 무너진 그에게로 누군가 접근했다. 그와 같은 처지의 불행한 동지.

“렉스.”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온 친우가 그를 불렀다.

“그만 포기해.”

같잖은 소리를 해 대며 그의 등을 눌렀다.

“레이…….”

렉시우스는 짓눌리는 감각에 으르렁대며 상대의 이름을 뱉었다.

“마수를 억지로 잠재울 때 쓰는 독이야. 일반인이라면 죽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독한데, 넌 제대로 잠들지도 않았네.”

“네 짓이었어?”

“스카이라한테 독을 준 게 나냐고 묻는 거라면, 맞아. 나야.”

“네가 왜……!”

성이 나서 질문을 쏟아 내려는 순간 목에서 기껍지 않은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 섬찟함에 렉시우스는 온 힘을 다해 손을 움직여 허전해진 목을 더듬었다. 만져져야 할 금속의 찬기 대신 피부의 온기가 느껴졌다. 따뜻한 살갗의 감촉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애리얼과의 연결 고리가 사라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 둘은 그 애의 구원이 될 수 없어.”

“뭐?”

“살리려면 이게 최선이야.”

레이신이 묘한 말을 늘어놓으며 뭔가를 멀리 던졌다.

탕, 타당.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으로 익숙한 생김새의 물건이 떨어졌다. 손잡이 없이 양쪽으로 검날이 달린 물건. 근원 소멸기.

그 물건을 포착한 렉시우스의 눈이 세차게 떨렸다.

깰 수 없는 맹세의 증거를 깨부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위에서 렉시우스를 누르고 있던 레이신이 쓰러졌다. 근원 소멸기가 행한 정산의 여파였다. 코와 입으로 피를 흘리며 기절한 레이신의 신체가 렉시우스의 등을 짓눌렀다. 행여나 렉시우스가 일어날까 걱정하는 것처럼.

아래에 깔린 렉시우스는 사라진 목줄에 절규하며 몸부림치다가 밀려드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닿을 수 없음에 비참해하며.

***

애리얼은 도망쳤다.

저를 억지로 붙드는 위협으로부터, 괜스레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미련으로부터, 도망쳤다.

죽으면 전부 해결될 거라 믿으며, 죽는 데에 집착했다.

다급한 마음을 담은 걸음이 쏜살같이 중앙관을 지나 정원을 가로지르고 북관을 지나쳤다.

황성의 사용인들이 그녀를 보고서 기겁하여 물러났다.

피 묻은 웨딩드레스, 은색 피스톨. 반역자인 황후가 가는 길을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황제조차 막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 누가 감히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

황성의 후원에 다다른 그녀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황성은 지나치게 넓었고, 애리얼의 체력은 부실했다.

넓게 펼쳐진 후원의 끝에 드러난 황성의 흰 성벽이 너무나 멀게 보였다.

데본시아가 어디까지 쫓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데본시아의 결말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여전히 데본시아에게 쫓기는 처지였다. 거동하기 불편한 드레스를 입고서 뛰다가 걷다가 다시 뛰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불안에 떨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이는 아직 없었다.

없어야 했다.

저 멀리 금발이 보였다. 북관의 후문이었다.

애리얼은 소스라치게 놀라 앞으로 질주했다. 금빛을 눈에 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제 옷자락을 붙들던 이의 음산한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했다.

“애리얼, 나하고…… 살자. 나하고 살면서, 복수하면 되잖아. 나랑 결혼…… 결혼하자.”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질척한 집착의 소리.

연옥의 굴레. 지옥의 구현.

“나의 엘……. 사랑하는 내 황후, 엘…….”

머릿속을 울리는 그 음성.

당장 관자놀이에다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다.

“애리얼!!!”

이름을 부르는 그 고함에 그녀의 걸음이 느려졌다. 무심코 머리까지 들어 올렸던 총구가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애리얼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먼 거리를 한달음에 좁혀 오는 스카이라가 보였다.

이 세계에 오고서 아카데미에 편입하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던 날. 저를 걱정하여 흐트러진 매무새로 백작가 저택의 응접실 문을 열었던 그때의 모습이, 지금의 그 위로 겹쳐졌다.

파란 두 눈에 가득 넘실대는 걱정과 애정.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죽음조차도 망설이게 만드는 그.

“스카이라…….”

미약한 음성이 바람에 흩어졌다.

걸음을 멈추고서 오로지 그만을 주시했다.

미련, 망설임.

스카이라는 그녀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의 손을 잡았던 과거는 좋은 엔딩을 맞지 못했다. 솔직히 최악이었다.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금 그녀를 망설이게 한다.

그녀의 결심을 뒤흔드는 유일한 이였다.

그래서 지금도 그를 기다리게 되는 걸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망이 아우성친다.

애리얼은 낭패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끼며 눈을 감았다.

푸른 후원을 가로지른 스카이라가 애리얼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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