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눈을 감고서 그의 존재를 느꼈다. 손에는 아직도 피스톨을 꽉 쥔 채, 죽음을 놓지 못하고 그와 만났다.
스카이라는 말이 없었다.
분명 그녀를 설득하러 왔을 텐데, 그녀의 죽음을 막고자 왔을 텐데,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피스톨을 쥔 손을 붙잡아 제압하지도 않고, 죽지 말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후원은 조용했고, 이따금 바람만이 둘 사이를 스쳤다.
말을 고르는 걸까.
애리얼은 천천히 눈을 떠 그를 마주했다. 새파란 두 눈동자가 저를 담고 있는 걸 발견하고서 호흡을 잠시 멈추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얼굴에 인내심이 묻어났다.
그래서 애리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왔어?”
“…….”
“내가 죽을 거 같아서?”
“…….”
“내가 죽지 않길 바라?”
그렇게 묻자 깨물렸던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낮은 숨소리와 함께 억눌렀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애리얼은 그의 짧은 대답을 가만히 들었다. 속으로 여러 번 곱씹으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듣고 싶지 않았던 걸까. 가슴속이 불편하게 요동쳤다.
싫다고 하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데본시아처럼 협박과 회유를 펼칠까, 혹은 렉시우스처럼 무시와 강압을 보일까.
아마도 둘 다 아니겠지.
애리얼은 그가 데본시아처럼도 렉시우스처럼도 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는 그럴 성격이 못 된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토록 차별을 받으면서도 제 어머니를 미워하지 못했던 사람이니까.
스카이라는 그런 이였다.
마음을 준 이에게는 한없이 친절하여 무른 사람.
그래서 애리얼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
죽고는 싶은데, 그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제 속에 가득 고인 음울함을 그의 앞에서 내비치고 싶지 않아서. 회귀 전처럼 그에게 매달리다가 기어코 그를 잃는 결과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죽은 가족과 그를 저울질하고 싶지 않아서.
이 우울함과 절망감을 그가 함께 감당하게 만들기 싫어서.
“그래도 죽지 말라고는 안 해.”
침울하게 표정이 죽어 가는 애리얼을 향해, 스카이라가 말했다.
그의 말에 애리얼은 마음속의 한구석이 맥없이 탁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피스톨을 쥔 손이 느슨해졌다. 내내 쫓기며 조급하던 감정이 조금 여유를 찾았다.
왜일까.
죽고 싶다는 의사를 존중받아서일까.
“난 네가 더 살기를 바라지만, 네가 도저히 더 버틸 수 없다면…… 내 의사는 신경 쓰지 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스카이라는 여전히 애리얼에게 손가락 하나 뻗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감히 네 아픔을 헤아릴 수 없어. 그래서 함부로 네게 죽지 말라고 강요할 수 없어.”
그의 목소리는 낮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게 그의 진심은 아닐 것이다. 스카이라는 지금 제 본심을 억누르고서 애리얼이 듣고 싶어 할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녀를 붙잡을 수 있도록. 그녀가 당장 죽지는 않도록. 친절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언제든지 죽어도 괜찮아. 죽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힘겹게 거짓을 말하는 그는 불안을 숨기지 못한 채 손을 떨었다. 제발 죽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데본시아처럼, 렉시우스처럼 하고 싶은 걸 참았다.
그녀가 죽지 않게 하고 싶은데, 제가 행하는 방법에 확신이 없어서 두려웠다.
과거의 기억을 아직 제대로 찾지 못한 그는, 예전의 자신이 어떤 말로 그녀를 회유했는지 알지 못했다.
죽어도 괜찮다고 해도 될까. 그랬는데 그녀가 안심하고 덜컥 죽어 버리면 어떡하나. 제 앞에서 방아쇠를 당겨 버리면…….
스카이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싶은 걸 인내하며 불안한 심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고요했다. 표정도 없었고, 이렇다 할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차분하고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미련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녀가, 너무나 아스라하게 느껴져서.
당장이라도 그녀를 붙들어 잡으려는 양손을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도록 세게 말아 쥐고서 숨을 골랐다.
만약 그녀가 정말 죽으려고 하면, 그는 당장에 팔을 뻗어 그녀를 찍어 누르고 죽지 못하도록 억압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모조리 기만이었다.
애리얼이 정말 죽을까 봐 불안에 덜덜 떨면서, 음침하게 그녀를 억압할 생각까지도 하면서, 그녀를 존중하는 척 가식을 떨었다.
“내일 죽어도 돼.”
절대 아니다.
“일주일 뒤에 죽어도 돼.”
상상도 하기 싫다.
“죽을 기회는 언제든 있어.”
언제든 죽지 못하게 하고 싶다. 죽는다는 생각조차 못 하게 죽음이라는 글자를 네 뇌에서 지우고 싶다.
본심과 전부 반대되는 말을 억지로 뱉으며 그는 고통스러워했다. 꾸역꾸역 거짓을 쌓아 올렸다.
마지막에 내뱉을 본심을 위해서.
“그러니까…… 오늘은 죽지 마.”
내일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다음 날도, 일주일 뒤에도, 한 달 뒤에도. 몇 년이 지나도 네가 네 생을 붙잡고 있었으면 좋겠다. 살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
줄줄 이어지려는 뒷말을 삼키며, 그는 침착한 척 기만을 뱉었다.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까, 조금 더 즐기다가 가도 괜찮지 않아?”
“…….”
“내가…… 내가 즐겁게 해 줄게.”
“하지만, 난 반역자인데…….”
그녀가 쓰게 웃었다.
스카이라는 그녀의 그런 표정과 말에 희망을 느꼈다. 기대감을 느꼈다. 들뜬 심정에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말이 멋대로 앞서갔다.
“괜찮아. 내가 수습할 수 있어. 그 정도야 쉽지. 걱정하지 마. 그런 대책은 다 준비하고 왔어. 데본시아도 걱정하지 마. 죄를 물어 폐위시키고 감옥에 유폐할 거야. 그러기 위한 황성의 장악도 마쳤어.”
줄줄 떠벌렸다.
사실은 아무런 대책도 없는 주제에.
그저 그녀를 조금 더 살게 하려고, 멋대로 장담했다.
그걸 애리얼도 느꼈는지, 조금 허탈한 듯 공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 스카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제껏 늘어놓은 말들이 실은 전부 거짓말인 걸 그녀가 알았을까.
“내가…… 황성에도, 그……. 괜찮을 거니까! 이미 수습이 되고 있으니까!”
다급해져 말이 두서없이 튀어 나갔다.
그는 제 작태가 한심스러워서 뺨을 붉혔다.
그의 달아오른 눈가와 뺨을 보고서 애리얼은 그의 진심을 느꼈다.
아,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구나. 이토록 간절하게. 거짓말을 진심처럼 말할 정도로.
본심을 잔뜩 억누르는 그의 다정함을 물씬 느낀다.
전에도 저를 조금 더 살고 싶게 만들었던, 가뭄의 단비 같았던 친절이었다.
차갑게 굳었던 가슴 속, 조금씩 온몸을 녹이듯 뛰는 심장을 느꼈다. 덩달아 오감이 예민해진다. 저를 감싼 주변이 돌연 생생하게 다가왔다.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후원에 자란 풀잎의 향, 봄을 맞아 부쩍 따뜻해진 대기, 살갗을 데우는 햇살.
손가락에서 힘이 풀려 피스톨을 놓쳤다. 잔디밭으로 서늘한 은색의 총이 떨어졌다.
죽음이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내내 그녀의 숨통을 조르던 압박감이 사라진 듯했다.
줄곧 죽음을 바라 왔음에도,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멀어지자 그녀는 안도했다.
수없이 죽음을 반복했지만, 그녀에게 죽음이라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가벼워질 수 없는 일이었다.
매번 악몽 속에서 보았던 엄마와 아빠의 죽음. 그건 너무나 무거워서, 애리얼은 늘 그 사실에 짓눌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죽음이란 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두려워지는 것이었다.
죽어 봤기에,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알았다.
극한에 극한까지 몰려 선택한 자살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기까지의 과정도, 그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너무 힘겨웠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하고 싶었다.
죽음조차도 그만하고 싶다.
이제는 그만 편해지면 안 될까.
애리얼의 떨리는 손이 스카이라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오늘은…… 안 죽을래.”
의외의, 그러면서도 그가 너무나 기다려 왔던 대답이, 애리얼에게서 나왔다.
스카이라는 안절부절못하며 애리얼을 보다가 팔을 뻗었다. 어깨를 감싸고 품 안에 쏙 넣어 안았다. 애리얼은 청량한 향기가 풍기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내일은 또 다른 감정이 들지도 몰랐다. 오늘보다 더 우울할지도 모른다.
그래. 당장 내일이면 이 결정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애리얼은 오늘만큼은 죽고 싶지 않았다.
기어코 그녀의 미련이 그녀를 쫓아와 듣고 싶던 말들을 쏟아 내 주었으니까.
오늘은 죽기 싫었다.
애리얼은 제게 찾아온 미련을 한껏 세게 붙들었다. 그녀의 손안에 잡힌 그의 옷자락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사실 그가 그녀를 붙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를 붙잡고 싶어 기다린 것처럼.
넓은 후원의 가운데에서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간절히 움켜쥐었고, 스카이라는 애리얼을 오래도록 안아 주었다.
***
생을 더 이어 가기로 정한 날, 애리얼은 생각했다.
휴대폰이 제게 제시했던 조건이 매번 누군가와 연결되는 것이었던 걸 보면, 사실은 누군가가 붙잡아 주길 바란 건 아닐까. 제 무의식에 담긴 생존 욕구를 반영하여 공략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건 아닐까.
사실 나는 죽기보다는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