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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63)화 (251/264)

스카이라의 옷자락을 붙잡고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황성으로 돌아온 애리얼 앞에, 어떤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황제, 데본시아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이었다. 황성의 기사단이 사방으로 뛰어 찾았으나 여태 황제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황제의 수족들도 황제의 행방을 몰랐다.

애리얼은 불안감을 느끼며 주변을 살폈다.

모두가 그녀처럼 불안에 떨고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황제가 잘못되었을까 봐 불안해하는 것이고, 애리얼은 그가 멀쩡할까 봐 불안한 것이었다.

황성의 사람들은 애리얼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녀가 황제를 해했다고 맹신하는 눈이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으니, 애리얼은 조용히 그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이대로 감옥으로 잡혀간대도 할 말이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데본시아에게 총을 쏜 것은 그녀였다.

계속 스카이라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으면 그에게 괜한 불똥이 튈 테지.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놓고서 앞으로 나섰다. 그러려고 했다.

스카이라는 단호하게 애리얼을 막아서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담담한 얼굴로 수습을 진행해 나갔다.

그동안 애리얼은 독방에 갇혔다. 주요 용의자였으니, 당연한 처우였다. 그녀가 바라기도 한 일이었다.

스카이라는 그녀를 독방에 두고 싶지 않았으나, 애리얼의 의지가 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수습될 때까지 애리얼은 조용히 가만히 독방에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지도 않고, 가만히.

석 달을 보냈다.

***

석 달 뒤, 독방을 나온 애리얼은 우습게도 영웅이 되어 있었다.

선황을 죽인 반역자를 처단한 제국의 영웅.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반역을 저질렀는데 도리어 반역자를 제거한 영웅이라 불리다니.

애리얼은 저를 두고 도는 소문과 칭송하는 말들을 한 귀로 흘렸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데본시아는 어떻게 되었나.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중앙관의 귀빈실로 옮겨진 그녀는 스카이라를 붙잡고서 곧장 질문을 던졌다.

“데본시아는? 어떻게 됐어?”

“저주에 당했어. 무하 공자가 금기를 깨고 펼친 저주에 데본시아와 공자, 둘 다 세계에서 지워졌어. 지하 성소의 밀실에서 그 흔적을 찾았고, 저주의 정황도 파악했어. 무하 공작과 클라우스 백작의 증언으로 사실 확인도 끝난 참이야.”

“그럼…….”

“데본시아는 이제 이 세계에 없어.”

스카이라가 단언했다.

아……. 드디어.

애리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가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그간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던 몸이 풀썩 무너졌다.

스카이라가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받쳐 안았다.

온몸의 힘이 다 풀린 애리얼은 기절하듯 그에게 안겼다. 불안으로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녀에게로 그간 밀려났던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두 눈을 덮었다.

스카이라는 당황하여 바쁘게 제 수족들을 불렀다.

“필릭! 올리비에! 빨리 황성의를…….”

“스카이라…….”

애리얼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를 가만히 불렀다. 목소리를 높이던 그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걱정이 느껴졌다. 다정하고 따스했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서 곧장 깊은 수면에 잠겼다.

죽음보다도 더 깊은 안식이었다. 다시 깨어나서 살아가기 전에 취하는 깊고 깊은 휴식. 희망적인 눈 감기였다.

드디어 이 지옥의 굴레가 끝났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

렉시우스와 레이신은 각자 독방에서 긴 조사를 마친 뒤 풀려났다.

황성을 나온 렉시우스는 허전해진 제 목 언저리를 더듬으며 미간을 구겼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매끈한 목의 감촉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양 손목에 채워졌던 구속구도 풀려 마력을 쓸 수 있는 몸이 되었지만, 그딴 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데본시아가 저주에 당해 사라졌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황성부터 사교계는 물론 왕국 연합까지 싹 다 그 일을 두고 난리를 피웠지만, 그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애리얼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고, 그걸 다시 만들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근원 소멸기는 초커를 제거할 때 그와 관련된 맹세와 구속의 마법까지도 전부 제거했다. 따라서 그의 맹세는 없던 일이 되었고, 한 번 깨어진 맹세를 다시 이루려면 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방법이 필요했다. 게다가 주인이 되어야 할 이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근데, 그걸…… 애리얼이 원할 리가 없잖아.’

선명한 현실에 입안이 썼다.

그럼에도 애리얼이 죽지는 않았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까…….

그러기에는 그의 사랑이 꽤 이기적이었으므로, 그는 기쁘지 않았다. 그녀가 죽지 않아 안도했으나, 그게 기쁨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대공저의 백색 세단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의 보좌관이 나서서 상석의 문을 열었다.

“타시죠, 대공자 저하.”

그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며 버렸던 호칭이 다시 되돌아와 그를 불렀다.

렉시우스는 헛웃음을 쳤다.

“누구더러 대공자래.”

“작은 도련님은 아직 미숙하십니다. 대공비 전하께서 도련님께서 다시 복권하시길 요청하셨습니다.”

“요청은 무슨. 네가 말하는 꼴을 보아 하니 복권 절차는 이미 끝났겠는데?”

렉시우스의 추측은 정확했다. 메튼은 변명 없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하긴 그의 보좌관은 정해진 이야기를 그저 전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으니까.

“복권을 거부한다.”

렉시우스는 차에 오르지 않고서 황성의 정문을 향해 걸으며 말했다. 메튼이 놀란 눈을 하고서 다급히 뛰어왔다.

“일단 차에 오르시죠. 대공저로 가서 대공비 전하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미안한데, 갈 생각 없어.”

“하지만 저하……!”

“난 대를 이을 생각이 없으니, 대공자 자리는 알아서 새로 뽑으시라 하고.”

막무가내로 나가는 렉시우스를 보고서 메튼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안 그래도 그간의 일을 수습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의 상사인 렉시우스가 복권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 일을 대공비가 알면 크게 분노하실 텐데. 대공비에게 이 사실을 직접 알려야 하는 메튼은 벌써 속이 쓰렸다.

그런 메튼의 처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무정한 상사, 렉시우스는 제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 정문을 나서자마자 순간 이동 했다.

홀로 남겨진 메튼은 허망한 얼굴로 그가 사라진 길목을 바라보았다.

***

“제가 아니어도 누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가주 자리를 엘레드라에게 넘기겠다는 말이냐.”

“누님께선 이미 후계자 교육도 모두 받으신 거로 압니다. 어차피 그 자리는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수도 모두 잃은 지금, 후계자 자리는 누님께 더 어울리는 자리입니다.”

레이신의 말에 공작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마수가 없으니 굳이 레이신이 후계자를 맡을 필요는 없었다. 가주라는 자리에 야망이 있는 엘레드라 쪽이 후계자에 더 어울릴 터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래서 공작은 더 화가 났다.

온갖 손해를 보면서 중립을 버리고, 마수까지 잃고 황제의 아래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황제가 사라지고, 이제는 손해만 남았다. 유일한 직계였던 외동아들을 잃은 무하만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피해가 컸다. 이런 와중에 후계자마저 덜컥 바뀌면 가문의 내외적으로 파란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다. 게다가 레이신의 마력이면 어떻게든 마수를 다시 키워 낼 수도 있을 텐데…….

“저는 솔렘을 이어 갈 마음이 없습니다.”

레이신이 무뚝뚝하게 전했다.

그 탓에 솔렘 공작의 사념이 탁 끊겨 버렸다. 그는 노란 눈을 빛내며 제 아들을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제 마력을 후대로 이어 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누님과 형제들을 통해 나온 자식들에게 격세 유전이 나타날지는 몰라도, 적어도 제가 직접 유전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너…….”

“자식을 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아버지께서 그간 제게 행하셨던 학대의 대가라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공작이 버럭 성질을 부리는 걸 레이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끊어 냈다.

“마수를 기르며 삶의 반을 시체처럼 지냈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 그때의 고통의 책임을 아버지께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을 제가 직접 유전시킬 생각도 없습니다. 누님과 형제들에게서 저와 같은 마력을 지닌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 마수의 부활을 꿈꾸시든 하시죠.”

결혼하지 않겠다. 자식을 보지 않겠다. 그 이야기를 그답지 않게 줄줄 길게 설명하고는 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집무실 안에서 쾅 책상을 치는 소리가 울렸다. 공작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들,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애리얼은 살았고, 그는 그걸로 족했다.

레이신은 제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애리얼에게 한 짓들도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잘못된 선택을 하여 그녀를 고생시킨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그녀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공작가 저택을 나와 후원으로 향하는 걸음이 조용하고 빨랐다.

이제 봄을 지나 여름이 완연한 계절이었음에도 솔렘 공작저의 후원은 삭막했다. 솔렘이라는 가문 자체가 마수와 함께 중립의 지위까지 잃고 삭막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공작가라고 권력은 번듯했으나, 예전 같은 위세는 아니었다.

레이신은 무심한 얼굴로 후원을 가로지르다가 퍼걸러 안에 자리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늦췄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고서 고개를 기울이고 앉은 방만한 자세.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자 그의 쪽에서 먼저 레이신을 불렀다.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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