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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64)화 (252/264)

익숙한 애칭에 반응하여 레이신은 퍼걸러 아래로 들어갔다. 그늘 속에서 렉시우스가 형형한 금색 눈을 빛내며 그와 마주해 왔다. 

“애리얼은 살았더라.”

“…….”

“네 말대로 나나 너 같은 이물질이 제거된 덕인지, 뭔지. 살아 있어. 얼굴은 못 봤지만, 소리는 들었거든.”

“잘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렉시우스가 의표를 찌르듯 물어 왔다.

레이신은 오랜만에 얼굴을 구겼다. 조사가 이어지던 석 달간, 시체처럼 표정이 없던 낯이 감정을 드러냈다.

레이신은 진실로 애리얼의 생존을 바랐다. 그녀의 의사가 어떻든 그녀를 살리는 데만 목적이 있었다. 하여 지금 그는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러우면서 고통스러웠다. 그는 이게 질투라는 감정임을 알았다.

그 질투 때문에 렉시우스의 목줄까지 부순 것이 아닌가. 이 일이 끝나고서도 그녀와 연결 고리가 있을 렉시우스가 부러워서. 그게 짜증 나서.

그 이유가 가장 컸다.

지금 애리얼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서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도 질투 때문이다.

스카이라가 그녀의 구원자이기에, 스카이라가 그녀의 옆을 지킬 것이기에.

그는 결코 그 자리에 설 수 없을 것이기에.

그는 기쁘면서 기쁘지 않았다. 기쁨보다도 질투가 더 컸다.

그리고 그 질투라는 감정은 부러움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레이신은 스카이라가 부러웠다.

하지만 그뿐이다.

스카이라의 자리를 감히 탐낼 수는 없었다.

레이신에게는 우선 애리얼이 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난 진심으로 애리얼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레이신이 말했다.

렉시우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개같은 기분이지만 나름대로 괜찮았다.

지금은 애리얼을 아직 볼 수 있다는 데 감사하겠다. 그런 심정이다. 참으로 기특하게도.

렉시우스가 퍼걸러를 박차고 나갔다. 레이신에게 남기는 작별 인사는 없었다. 레이신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서로 건조하게 헤어졌다.

같은 것을 좋아하다가 같은 파국을 맞고 같은 결말에 이른 친우다운 작별이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둘의 관계는 예전과 같아졌다.

***

스카이라는 매우 바빴다.

제대로 된 즉위식조차 없이 빠르게 황제직에 오른 스카이라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남부부터 향했다. 제국의 승리를 공표하고 남은 잔당을 처리한 다음, 세 왕국의 영토를 복속시킨 후 전쟁 영웅인 대공에게 그 구역의 관리 권한을 주었다. 긴 전쟁에 지친 왕국민들은 윗물이 누구로 바뀌든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대공의 관리도 꽤 나쁘지 않았고, 불만은 크게 없는 모양이었다.

남부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스카이라는 본격적으로 정무에 들어갔다. 데본시아의 수족이었던 이들도 활용했다. 일 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황제가 두 번이나 바뀌어 온 제국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모든 인력을 동원했다.

그동안 애리얼은 백작가로 가서 조용히 지냈다.

애리얼의 의지였다.

스카이라는 그녀를 제 곁에 두고 싶은 듯했으나 애리얼이 원하지 않았다.

황자였던 회귀 전과 달리 지금의 그는 황제였다.

이전처럼 그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가 황성에서 제대로 권력을 잡고 황제로서의 입지를 다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불안했고, 이따금 우울증이 도져서 죽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그의 곁에 있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분명 그에게 큰 짐이 될 것이다.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백작저에 틀어박혔다.

그 의사를 존중했는지 스카이라는 물론이고, 렉시우스와 레이신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애리얼은 백작저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조용하고 느긋한 생활이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편안한 듯 불안했다.

낮에는 백작, 카논과 시간을 보내고 이런저런 책들을 읽으며 평온하게 지냈다. 하지만 밤이 오면 그녀는 불안에 떨었다.

데본시아가 나오는 악몽을 꾸는 날은 식은땀에 젖어 일어나 카논을 찾았고, 가끔은 휘아킨에 대한 꿈을 꾸어서 심란함에 밤을 새울 때도 있었다. 죽은 부모님의 꿈을 꾸는 날에는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일어나곤 했다.

왜 나는 살아 있을까. 가족이 없는 이 세계에서.

때론 극계 마법을 써서 엄마와 아빠가 죽지 않았던 과거로 시간을 돌려 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데본시아처럼 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시간을 돌리면 부모님뿐만 아니라 악몽 그 자체였던 데본시아까지 다시 나타날 테니까.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데본시아와 같은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휘아킨의 희생 위에 얻어진 것이었다. 애리얼 스스로가 택한 미래이기도 했다.

그 괴롭고 끔찍했던 회귀를 수없이 반복하여 얻어진, 불탄 숲의 새순과도 같은 삶이었다.

수없이 그어진 상처를 버티고 견디며 쟁취한 길이었다.

감히 되돌리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엔딩을 맞지 않았다. 삶은 게임 따위가 아니었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 힘이 들 때면 그녀는 스카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가 부르는 제 이름 하나면 그녀는 괜찮아졌다.

좋았다. 기뻤다.

당장 만나러 가고 싶을 만큼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무척 바빴다.

스카이라는 시간이 없을 텐데도 애리얼의 전화는 꼬박꼬박 받았다. 어떨 때는 그녀의 전화를 내내 기다린 것처럼 굴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둘에게는 각자 시간이 필요했다.

애리얼에게는 스스로를 추스를 시간. 스카이라에게는 제 기반을 다지고 황성을 안정시킬 시간.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

맑은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화창한 날.

스카이라가 백작저를 찾아왔다.

드디어 모든 기반이 다져졌고, 애리얼을 만날 수 있게 되었기에, 그녀를 만나러 왔다.

카논에게서 그 소식을 들은 애리얼은 옷조차 갈아입지 않고서 곧장 그가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자 결혼식이라도 치르는 이처럼 잔뜩 차려입은 스카이라가 보였다.

빳빳하게 다려진 정장을 입은 그가 애리얼을 보고서 미소를 짓다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당황했다. 함께 응접실에 자리해 있던 백작도 애리얼의 모습을 보고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완벽한 복장을 갖춘 그와 달리 애리얼은 베이지색 잠옷 원피스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자다 일어난 것이 명백한, 엉망인 모습이었다. 심지어 잠옷이 얇은 터라 몸의 윤곽이 슬쩍슬쩍 비쳤다.

그 탓에 스카이라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리얼은 제 모습은 개의치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의 뺨에 손을 대었다.

“일이 다 마무리되어서, 그……. 애리얼…….”

스카이라가 비스듬하게 시선을 내린 채 그녀를 불렀다.

수화기 너머로만 들었던 그 음성이 그녀를 벅차게 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스카이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뛰어들었다. 그는 상당히 놀란 듯했지만, 금세 팔을 벌리고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오래오래 참은 감정을 토해 내듯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응. 그래서 나도 기다렸어.”

죽지 않고 기다렸다.

오늘을 위해서. 앞으로를 위해서.

“이젠 괜찮아?”

그가 물었다.

애리얼은 조금의 망설임도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괜찮아.”

그녀의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가 붙잡아 주었으니까.

“스카이라, 좋아해.”

애리얼이 말했다. 느닷없는 고백에 스카이라는 얼이 빠져 있다가 전율하듯이 온몸을 떨었다. 두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그 광경을 보고 백작은 조용히 웃으며 자리를 비켰다.

응접실에 오롯하게 둘만 남자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뺨을 감싸고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방금…… 뭐라고?”

그가 조금 바보 같은 얼굴로 되물었다.

애리얼은 제 뺨을 감싼 스카이라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며 활짝 웃었다.

“좋아해. 사랑해.”

기쁘게 제 마음을 드러냈다.

그가 낮게 신음했다. 파란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주룩 흘렀다.

그는 웃지도 않고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눈물에 축축해진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애리얼은 그 축축하고 말캉한 감촉에 기쁘게 응했다.

그렇게 입맞춤을 이어 나가다가 스카이라가 잠시 입술을 떼고 말했다.

“죽지 마.”

그가 여태 꾹꾹 눌러 왔던 진심을 꺼냈다. 불안을 내보였다.

아마 언제든 죽어도 된다고 말했던 그날도 본심은 이랬겠지.

애리얼은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도 축축해져 있었다.

“안 죽어.”

“정말?”

“응. 죽기 싫어. 무서워.”

애리얼은 그와 눈을 맞추고서 속삭였다. 글썽글썽한 눈으로 기어코 그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니까 네가 계속 잡아 줘.”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뺨을 감싸고서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

멀리, 아리앨라의 금고에 들어 있던 휴대폰의 액정에 바스스 금이 갔다. 형태를 유지하게 했던 애리얼의 열망이라는 힘을 잃고서 천천히, 서서히, 의무를 다한 마도구는 가루가 되어 부스러졌다. 그렇게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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