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1) >
300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변했다.
알 수 없는 물질이 지구의 대기에 스며들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걸 ‘마나’라고 명명했다.
그 결과 지구 인구의 90%가 소멸하는 악몽을 겪었고.
시간이 지나고 지나 300년 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네 가지로 구분됐다.
첫째,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나 거부자’, 태어나면서부터 마나가 몸에서 독으로 작용하는 천형을 가진 자들.
마나가 몸에 맞지 않기에 보통 20살 초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내부 장기, 특히 심장이 파열되어 죽어버린다.
이를테면 불가촉천민.
둘째, 마나를 받아들여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마나 순응자’, 일반인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다.
속칭 생산자 계급.
셋째, 마나로 인해 일반인보다 강한 신체 능력을 가진 ‘마나 적합자’, 신인류.
그들이 마나를 받아들이면 근육이나 혈관, 내부 장기가 튼튼해진다.
또한 각성자의 99%가 마나 적합자에서 나온다. 그래서 예비 각성자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부터 사실상 지배계급.
네 번째가 앞에서 설명한 최상위 계층 ‘각성자’.
마나와 더불어 과학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 중 하나.
각성하면 얼굴에 문신이 새겨진다.
시스템과 접속했다는 표식.
그들은 시스템에 의해 강해지고 성장한다.
오직 각성자만이 엘리트 마수와 챔피언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다.
사실 다섯째 유형도 있긴 하다.
‘마인’
각성자지만 각성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 놈들.
그러나 마인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니 논외로 하고.
※ ※ ※
삼한제국.
유라시아 대륙의 신흥 강대국.
300년 전엔 대한민국이라 불렸었다.
지배하는 영토도 광대하다.
그러니 제국이지.
물에 잠겨 영토 절반이 날아간 일본 열도, 넓디넓디 만주 곡창지대와 초록색의 풍성한 몽골 평야와 고비 초원, 공장과 산업시설들이 즐비한 연해주 일대가 제국의 영역이었다.
삼한제국군 소위 김태주는 동부 해안가 ‘설악산 전초기지’ 대청봉 간이 막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시원한 맥주캔을 들이켰다.
“크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시한부 인생에서 이런 게 소확행이다.
“씨발,”
욕이 절로 나온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인생.
평화로운 휴양지 같은 곳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싶었는데, 정작 그가 서 있는 장소는 마수와의 전투가 벌어지는 변방.
태주는 마나 거부자다.
그래서 시한부 인생.
마나 거부자로서 태주는 꽤 오래 버틴 편이다.
29살임에도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으으윽,”
태주는 갑자기 찾아온 격통에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제, 제기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발작, 며칠 전부터 더 간격이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끄억! 끄어어어어억!”
침대에 쓰러져 고통에 신음했지만 막사로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이게 하루 이틀인가?
오히려 자신이 죽길 바라는 사람이 더 많다.
자신은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쓰레기, 불가촉천민이니까.
그 쓰레기가 삼한제국 소위.
어떻게?
태주의 아버지는 마스터 김웅방 준장이었다.
직접 다스리는 영지도 있었다.
삼한제국 ‘파주 영지’
부유한 영지는 아니다.
평범하고 작은, 어떻게 보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파주.
그래도 아버지가 준장, 영지를 가진 권력자인데, 아무리 태주가 마나 거부자라고 하지만, 아들을 변방으로 쫓아내?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파주 영지의 정당한 계승자 김태주.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주의 친모는 그를 낳는 도중에 돌아가셨다.
그 후 아버지는 새 부인을 들였다.
과거 일본이라고 불리었던 땅에 위치한 삼한제국 규슈 영지 지배자의 둘째 딸 혼다 미쯔이를.
그녀는 파주로 시집와서 아들 2명을 낳았다.
그때부터 태주의 위치는 애매해졌다.
태주는 선천적인 마나 거부자.
영지의 계승자로서 치명적인 단점.
그래서인지 새엄마 미쯔이는 태주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뒀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어차피 20대가 되면 죽을 게 뻔하니까.
그렇게 흘러갔으면 미쯔이는 좋은 새엄마로 남았을 테지만 상황이 요상하게 흘러갔다.
20살이 되어도, 25살을 지나, 28살을 넘겼는데도 아직 살아있어?
미쯔이 부인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마나 거부자라도 무조건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매우 희박한 확률로 마나 거부자에서 갑자기 각성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오래 살아남으면 확률은 더 높아진다.
실제로 마나 거부자의 각성 사례를 보면 모두 30대 전후에 각성했으니까.
이러다 태주가 각성하면?
불가촉천민에서 최상위 계급으로 발돋움하면?
자신의 친자들은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아닌가.
그래서 남편을 졸라 태주를 설악산 전초기지로 내몰았다.
명색이 장군의 아들, 29살이 되었는데도 집안에만 있으면 어떡하냐고?
밖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마수와 맞서야 각성의 확률도 올라가는 게 아니겠냐고.
아버지 김웅방 준장도 못 이기는 척 수락했다.
사실 진급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자신의 아들, 김태주였다.
마나 거부자인 맏아들.
애비는 마스터인데 아들은 쓰레기.
차라리 마수와 싸우다 죽는 게 나았다.
군사 작전 중 사망하면 무공 훈장이라도 받을 수 있을 터.
그럼 자신의 진급에 도움이 되니까.
결과적으로 태주는 쫓겨났다.
설악산 전초기지로 말이다.
“후우.”
다행히 심장 통증이 잠잠해진다.
오늘도 견뎌냈다.
순간!
“김소위, 안에 있나?”
태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위 김태주!”
자신의 직속상관 장인동 중위의 목소리였다.
“멸마!”
“멸마.”
간단한 경례를 나누고.
“좀 전에 신음 소리가 들리던데, 아픈 데는 없나?”
“아! 괜찮습니다. 이젠 나아졌습니다.”
“그래, 그렇게 버텨야지. 살아남으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야.”
장인동 중위는 몇 안 되는 태주의 우군.
처음 설악산 전초기지로 왔을 때부터 자신을 토닥여주고 보살펴준 상관.
“그런데 무슨 일로···?”
장인동 중위의 표정이 좋지 않다.
“보직이 변경됐다.”
“변경이라뇨?”
“행정에서 야전 쪽으로, 상부에서 작전 투입 명령 떨어졌다.”
“···갑자기요?”
태주의 소속은 제국군 51연대 3대대 전투 지원 중대.
몸 상태가 거의 장애 수준이라 주로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야전 작전 투입이라니.
“나도 알아봤는데, 이건 거부할 수 없어. 육군 참모본부에서 직접 하달된 명령이야.”
“···.”
이거 혹시?
새엄마 미쯔이의 의지가 작용한 걸까?
하긴!
29살임에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
“장군님 입김도 안 통하는 모양이더라.”
아니, 아버지가 직접 나선 것일 수도 있다.
장군의 자식이 작전 중에 사망했다.
얼마나 그림이 좋은가?
그러니 명예롭게 죽어라.
“아직 전투는 무리니까 정찰 임무부터 수행해보자. 지휘는 무리고, 소대원들 붙여줄 테니까 따라만 다녀.”
어쩔 수 없다.
자신도 군인.
무조건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혹시 알아? 각성의 기회를 잡을지. 드물지만 거부자도 각성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며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장인동 중위, 그는 마나 적합자이자 각성자이다.
얼굴에 각성자임을 보여주는 문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언젠가는 자신도 장인동 중위처럼 얼굴에 문신이 새겨질 날이 오겠지.
버티고 버티다 보면 말이다.
다음 날.
소대원들과 함께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태주.
주요 정찰 지역은 대청봉에서 조금 떨어진 중청봉.
고영호 하사가 손짓하며 태주에게 말을 건넸다.
“저 밑이 오크 부락이 있는 지역입니다.”
설악산에서 가장 흔한 마수는 오크, 원래 멧돼지였던 놈들이 마나의 영향을 받아 걸어 다니는 돼지가 되었다.
그것이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오크와 비슷해 그냥 그 이름 그대로 불렸고.
“여기 오셔서 쌍안경으로 보시지 말입니다.”
태주는 쌍안경으로 오크 부락을 관찰했다.
설악산 전초기지 제국군의 임무는 오크의 개체 수를 조절하고 놈들이 부락을 통합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
“아직은 번식기가 아니라서 안전합니다.”
“그렇군.”
오크 정도야 그냥 쓸어버리면 되지 뭐하러 그러냐고?
대규모 전투는 부담이 있다.
제국이 오크를 토벌하려고 시도하면 저놈들도 뭉치게 된다.
부락 수준의 오크는 무섭지 않지만 통합된 오크 왕국은 제국으로서도 엄청난 부담이 된다.
‘흐음, 별다른 동향은 없네.’
사실 간단한 정찰 임무다.
쌍안경으로 관찰하고 드론을 날려 찍은 영상을 첨부해 보고하면 끝.
“드론은?”
“날릴까요?”
“어.”
철커덕!
등 뒤에서 들리는 기계음.
바로 그때!
뜨끔!
“윽!”
등뒤에 뭔가 뾰족한 것이 닿였다.
멈칫! 굳어버리는 몸.
“뭐, 뭐야?”
“움직이면 큰일나지 말입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을 태주의 등에 대며 비릿하게 웃음 짓는 고영호 하사.
“걱정마십쇼. 칼로 찌르진 않습니다. 김태주 소위님께서는 정찰 작전 중에 발을 헛디뎌 추락 사고로 뒈지실 겁니다.”
“뭐···?”
“저도 명령대로 하는 거라서.”
“며, 명령?”
“넵! 소대장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입니다.”
소대장이라면, 장인동 중위가?
“쓰레기 치우랍니다. 사실 소대장님도 하청받은 거지 말입니다. 저희는 하청의 하청.”
제기랄!
결국 배신을 당해?
태주는 죽고 싶지 않았다.
시한부 인생이지만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이없이 이렇게 죽는다고?
소대원들의 싸늘한 눈빛.
다 한통속.
“좆까! 이 개새···,”
“아이고, 힘도 없는 양반이.”
애써 허리춤에 찬 마나건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빼앗겨 버렸고.
“자, 쓰레기 분리수거 들어갑니다. 멸마!”
“야이, 개새끼야!!!”
고영호는 태주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퍽!
태주의 몸이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다.
※ ※ ※
잠시 후 슬며시 눈을 뜬 김태주.
어둑하다.
밤인가?
“끄응,”
온몸의 뼈가 다 부러진 것 같다.
‘여긴···,’
절벽 중간쯤이었다.
굴러떨어지다 커다란 나무에 걸려 멈춘 모양.
‘움직여야 해.’
여기서 죽어줄 줄 알고?
무조건 살아남는다.
그러나!
“허헉!”
갑자기 심장에서 전해지는 격통.
또 마나 거부자의 천형이 발동했다.
“끄억, 끄어어억! 끄극!”
이번엔 심상치 않다.
고통의 수준이 달랐다.
‘이, 이런 씨발!’
눈앞이 캄캄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이제 죽는 건가?
‘···안돼!’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초점을 잃은 태주의 눈동자.
죽을 때가 되면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지.
진급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 악귀 같은 새엄마 미쯔이, 그리고 항상 자신을 업신여기며 괴롭히던 배다른 동생들.
왜 저런 얼굴만 떠올라?
죽기 전에 엄마 얼굴이라도 보였으면.
어차피 기억도 못 하지만.
그때였다.
환영처럼 또 하나의 사람이 보였다.
‘응?’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앉아있는 머리 허옇게 센 노인.
저 사람은 누구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왜 머릿속에서 떠올려지는 걸까?
‘···환각인가?’
그런데 희한하다.
보면 볼수록 낯이 익다.
대체 누구?
순간 눈을 번쩍 뜨는 노인.
동시에 자신을 바라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바라만 봤다.
마치 영혼이 통하는 듯한 느낌.
마침내 노인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뭔가를 안다는 눈빛.
태주도 깨달았다.
그 사람이 누군지.
‘···당군악?’
저 사람의 이름.
하지만 그것보다.
노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넌···.’
들리진 않았지만 태주는 노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나로구나. 다른 세상의 나.’
맞다.
노인은 또 다른 자신.
영혼이 같은 동일인.
이름은 당군악.
그가 사는 다른 세상은 강호 무림.
그리고 강호에서 그의 별호는 절대독마(絶代毒魔)였다.
<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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